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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 유리병 편지

딸기21 2024. 10. 6.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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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디에프(Dieppe)라는 곳이 있다. 프랑스 북부, 영국과 마주보는 해협을 낀 노르망디 지역에 위치한, 3만명 정도 사는 작은 마을이다. 9월 말 거기서 편지 한 장이 발견됐다.

유리병 편지. 유리병 안에 종이를 말아서 넣은 것을 가리킨다. 디에프에 고대 갈리아 유적지가 있다. 거기서 고고학 발굴 작업을 하던 자원 봉사자들이 작은 유리병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 메시지가 있었던 것이다. 고대로부터 온 것은 아니지만, 200년 전인 1825년의 메시지였다. 당시 이곳 Cité de Limes 유적에서 P.J. 페레Féret라는 고고학자가 발굴 작업을 했다. 그러면서 “이 광대한 곳에서 나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라는 내용을 적어 병에 넣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왜 이런 걸 남겼을까. 일종의 기념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것이 200년 지나서 페레의 후배 고고학자들에게 마법 같은 선물이 됐다.

 



유리병 편지. 낭만적이다. 역사가 길다. 무려 2300년 전, 기원전 310년 무렵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그리스 철학자 테오프라스투스가 병을 띄웠다고 한다. 지중해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대서양에서 들어온 건지 알아보려고 했다고. 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는 길에 심한 폭풍우를 만났다. 신대륙에서 발견한 것을 양피지에 써서 자기 항해에 돈을 대준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바다에 띄웠다. 유리병은 아니고. 양피지를 왁스 바른 천으로 싸서 나무 통에 넣어 바다에 던졌다는데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정말로 병에 넣어 바다에 띄웠는데 발견된 사례는 없을까. 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조카 프랜시스 그레이슨. 1927년 대서양 횡단비행 하려고 혼자 시코르스키 비행기를 몰고 떠났는데 뉴욕 근해에서 실종됐다. 2년 뒤 매사추세츠주 항구에서 병에 담긴 메시지가 발견됐다. “얼어붙고 있다. 가스가 새어나온다. 표류하고 있다. 그레이슨.” 이라고 써 있었다. 2차 대전 때 이탈리아 병사가 띄운 병이 몇년 지나 발견된 사례도 있다.

난파당한 사람들이 병에다 소식을 알려서 구조되는, 그런 스토리도 진짜 있다. 역시 19세기 말의 일인데. 스코틀랜드 북부에 세인트 킬다라는 섬의 이야기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고, 사진을 찾아보니 스산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1876년 존 샌즈라는 기자와 오스트리아 선원들이 거기서 난파를 당했다. 유리병은 없었고, 양의 방광에 나무 통을 붙이고 메시지를 넣어 띄웠다. 22일 뒤에 발견돼서 목숨을 구했다. 그 뒤로 이 섬을 찾아간 사람들은 ‘세인트 킬다 메일 보트’라고 불리는 일종의 놀이 같은 의식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 섬은 춥고 척박한 곳이다. 사람들이 다 떠나고 1930년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주민들도 투표 끝에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2010년, 환경 보전을 위한 기금인 스코틀랜드 내셔널트러스트의 고고학자가 ‘섬 철수 80년’을 기념해서 그 옛날 세인트킬다 메일보트와 비슷한 방식으로 부유물을 만들어서 메시지를 담아서 물에 띄웠다. 섬과 인연 있는 사람들 7명에게 보내는 엽서를 작은 방수 보트에 넣어보낸것이다. 2020년 4월 노르웨이 북부 안도야(Andoya)라는 섬의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놀다가 그 엽서들을 발견했다! 10년이 지나서 발견된 것이다. 바닷가에서 보트 모양으로 된 게 떠오니까 주워서 집으로 가져가는데 잘못해서 떨어뜨렸더니 터지면서 엽서 일곱 장이 나왔다고 한다.

그 중에 하나는 주소가 적혀 있었고. 그래서 10년 만에 수신자에게 보내질 수 있었다. 내셔널트러스트를 후원하던 사람들 중에 5살 때 킬다를 떠났던 길리스라는 사람이 있었고 이 사람이 수신자였는데, 안타깝지만 이 사람은 2013년 이미 사망했다. 그가 숨지고 7년 뒤에야 도착한 편지는 아들이 받았다.

동화 같은 스토리다. 혹시 로맨스 스토리는 없을까. 1945년 성탄절, 21세의 군의관 프랭크 하요스텍(Frank Hayostek)은 리버티호라는 배를 타고 뉴욕 항구로 들어오면서 아스피린 병에 메시지를 넣어 바다에 던졌다. 8개월 후 우유배달 일을 하던 브레다 오설리번이라는 여성이 병을 발견했다. 적혀 있는 주소를 보고 이 여성이 답장을 했다. 병을 띄운 하요스텍은 1952년, 7년만에 여성을 찾아갔다. 당시에 시사잡지 타임이 ‘불가능할 정도로 로맨틱한 이야기’라고 썼다고 한다. 하지만 언론이 너무나 관심을 보였고… 두 사람은 좀 사귀다가 헤어졌고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1956년, 스웨덴 선원 오케 바이킹(Åke Viking)은 “먼 곳에 있는 아름다운 누군가에게”라는 메시지를 넣어서 병을 띄웠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살던 17세의 소녀가 병을 주웠다. 그리고 병을 띄운지 2년만에 결혼했는데 4000명이 모여들어서 축하했다고 한다.

유리병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을까. 1991년에 캐나다 밴쿠버 부근에서 유리병 메시지가 발견됐다. 중국 반체제 인사 웨이징셩의 석방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대만인들이 띄운 선전용 유리병 편지가 태평양 떠돌아 캐나다까지 간 것으로 추정된다.

1979년에는 미국인 부부가 베트남 보트피플 가족이 띄운 유리병 편지를 발견했다. 미국 가족과 보트피플 가족의 서신 왕래가 시작됐고, 미국 부부는 이민국과 협력해서 베트남 가족이 1985년 난민 지위를 얻어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이례적인 사건들이지만, 해류를 연구하려고 병을 띄운 경우는 많다. 1929년, 독일의 한 해양 과학 탐험대가 플라잉 더치맨(Flying Dutchman)이라는 이름으로 병들을 대거 인도양에 띄워보냈다. 해류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플라잉 더치맨'은 유럽에서 신화처럼 떠도는 유령선 스토리인데 거기서 이름을 따왔다. 이 병을 만일 발견하면 독일 당국에 알리되, 건지지 말고 그대로 바다에 돌려보내라~ 이런 지침이 적힌 종이가 병 안에 들어있었다. 이 병들은 여기저기서 발견됐고, 2만6000킬로미터 떨어진 남아메리카의 남쪽 끝단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2015년 4월에는 독일과 가까운 북해에서 편지가 들어있는 병이 발견됐다. 100년도 더 전인 1904~1906년 영국 해양생물학협회가 플리머스 항구에서 북해에 1020병을 풀어놨는데 그 중 하나였다. 

디에프의 고고학 발굴지에서 나온 유리병은 200년 만에 발견됐으니, 메시지가 쓰이고 가장 오랜 시간 뒤에 발견된 것이다. 그 전 기록은 131년이었다고 한다. 2018년 1월에 호주 바닷가에서 독일 해군 천문대 과학자가 띄워보낸 유리병이 발견됐는데발신 시기가 1886년 6월이었다. 이것이 진짜냐 아니냐 논란이 있었지만 131년 동안 바다를 떠돈 것이 사실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1914년 1차 대전 때 영국군 병사가 프랑스에서 전사하기 며칠 전 편지를 써서 유리병에 넣어 영국 해협에 던졌다. 아내에게 보낸 것인데 아내는 받지 못했고 1979년 세상을 떠났다. 편지는 1999년에야 에식스 해안에서 발견됐다. 편지를 본 어부가, 전사한 군인의 딸에게 전달했다. 이미 딸은 86세 나이였는데 그제야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 비슷한 스토리는 또 있다. 2014년 3월 발트해의 어부가 덴마크 엽서가 들어 있는 병을 찾아냈다. 1913년 베를린에 살았던 한 스무살 청년이 띄운 것이었다. 101년이 지나서 그 청년의 손녀에게 전달됐다고 한다.

 

타임캡슐로 쓸 수도 있다. 바다에 띄운 것은 아니지만, 1959년 한 지질학자가 캐나다 워드헌트 섬의 외딴 동굴에 메시지가 담긴 유리병을 넣었다. 2013년 다시 회수해보니 54년 사이에 빙하가 60m 이상 북쪽으로 후퇴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구 온난화의 증거가 되어준 것이다.


유리병 편지, 워낙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이긴 하다. 에드거 앨런 포의 1833년 소설에도 나오고 찰스 디킨스의 1860년 작품 <바다에서 온 메시지>에도 나온다고 한다. 미래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장 낭만적인 매개 같기도 하다. 누군가는 구조를 요청하면서, 또 누군가는 알지 못할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어서, 혹은 정치적 선전을 하고 싶어서, 과학 실험을 하고 싶어서, 아니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병을 띄운다.

한번 해보고 싶기는 하다. 2009년에 나온 추정치인데, 꼭 유리병은 아니더라도 1900년대 이후 해양학자들이 띄운 부유물을 포함해서 편지나 메시지를 적은 것들이 바다로 간 게 600만 개는 된다고 한다. 이벤트나 과학실험할 때, 회수율이 매우 적기 때문에 대량으로 수천개씩 막 보내고 그랬기 때문이다. 그럼 결국 해양오염을 일으키는 것 아닌가. 기업들이 마케팅 차원에서 병 띄우기 한 적도 많았는데 플라스틱병은 바다속을 떠돌면서 잘게 부서져서 해양 오염을 일으킨다. 유리병도 날카로운 조각으로 깨질 수 있고, 그 조각이나 병뚜껑을 바닷새들이 먹기도 한다.

그래서 난 걍 안 띄우기로 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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