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의 작은 나라 동티모르.
87세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달 들어 동남아 순방을 했다. 교황이 들른 곳 중 한 곳이 동티모르였다. 10일 거기서 야외 미사를 집전했는데, 동티모르 인구의 거의 절반이 참석했다고 한다.
인구 절반이 어떻게 미사에 나오냐고? 동티모르 전체 인구가 130만명 정도다. 수도 딜리의 해변 공원에서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였는데 바티칸에 따르면 인구 절반 가까운 60만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미사가 치러진 날 딜리 거리는 나이든 이들부터 유모차 탄 아기들까지, 군중들로 가득했다고. 바티칸의 색깔인 노란색과 흰색 우산을 든 이들이 운집했고, 일부 참석자들은 미사가 시작되기 12시간 전인 새벽 4시부터 기다렸다고 한다. 교황이 도착하니까 "비바 파파 프란체스코"를 외치고, 전통 춤도 추고.
'바티칸 다음으로' 가톨릭 신자 비중이 높은 나라
동티모르는 인구 97%가 가톨릭이다. 바티칸을 제외하면 인구에서 가톨릭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다. 이유는 물론 옛날에 포르투갈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지만. 그래서 교황이 엄청난 환영을 받았지만, 논란도 없지는 않았다. 가톨릭 사제들의 성추행, 미성년자 성학대 문제다. 유럽 미국 라틴아메리카 등등 세계에서 터져나오면서 십수년 째 비판이 쏟아지고 있고, 교황청이 가해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프란치스코가 처벌을 하려 하자 타계한 전 교황 베네딕토16세가 "교회 조직이 흔들릴 수 있다"면서 억눌렀다는 보도도 있었다.
동티모르에서도 그런 스캔들이 있었다. 문제는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동티모르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카를로스 시메네스 벨루 주교였다는 것. 1980년대부터 소년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폭로가 나왔고 2019년에 이 문제가 공식화되자 바티칸이 벨루를 '비공개로' 징계했다.
이 문제가 가톨릭의 신뢰를 얼마나 떨어뜨렸는지 알기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외국 방문 때 그 나라의 학대 피해자들을 만나곤 했다. 이번 동티모르 방문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하면서, “모든 청소년이 건강하고 평화로운 어린시절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종류의 학대에 대처해야 한다”고 했다. 여전히 미온적이긴 하다.
교황이 동티모르를 방문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1989년 요한바오로2세가 방문한 적 있다. 하지만 그 때는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에서 독립하기 전이었으니 이번이 독립 이후로는 처음이다.
동티모르, 세계 여러 나라들 중에 가장 젊은 나라 중의 하나다. 독립국이 된지 얼마 안 되는. 공식적으로는 2002년 독립국가가 됐다.
인도네시아 남쪽, 호주 쪽 바라보는 곳에 티모르 섬이 있고 거기 동쪽 절반이 동티모르다. 정식 명식은 동티모르 민주공화국, 포르투갈어로 티모르 레스떼. 서쪽 절반은 여전히 인도네시아 땅이다. 이리안자야 지역이라고들 부르는.
20만 명의 목숨으로 얻어낸 독립
동티모르라는 나라를 대충 훑어보자면 면적은 1만5000제곱킬로미터이고 파푸아인들과 오스트로네시아 여러 민족들이 살아왔던 곳이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이 들어가서 1975년까지 지배했다. 포르투갈 지배가 끝날 때 동티모르가 독립을 선언했는데 곧바로 1976년 인도네시아가 처들어와서 합병해버렸고 그 뒤 독립 움직임을 처참하게 짓밟았다. 1975년에서 1999년 사이 동티모르 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20만 명 이상이 전투와 학살로 목숨을 잃거나 인도네시아 점령군의 잔인한 통제 속에 기근으로 사망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1990년대 후반, 동티모르인들이 고문 살해당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AP통신을 통해 세계에 전송됐다. 국제뉴스를 다루면서 끔찍한 사진들도 간혹 봤지만 당시 동티모르의 사진들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때 국제부 선배들이 고민 끝에, 토론을 거쳐서 사진들을 신문에 싣기로 결정했었다. 원칙적으로 처참한 사진들, 이를 테면 신체의 훼손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싣지 않지만 그 사진들은 세상에 덜 알려져 있던 동티모르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실제로 국제적으로 여론이 엄청나게 들끓었다.)
동티모르를 그토록 핍박하던 인도네시아, 당시는 군부 독재정권 시절이었다. 수하르토 독재정권이 1968~1998년 30년 동안 집권했으니까. 그러다가 아시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민주화 요구와 맞물려 퇴진했고, 혼란 속에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어쩔 수 없이 놔줘야만 하는 처지가 됐다. 수하르토가 물러나고 1999년 유엔 관리 하에 동티모르 주민들이 독립 투표를 했고 80% 가까운 지지로 독립안이 통과됐다.
그런데 투표 직후 인도네시아 군부가 지원하는 민병대가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고 교회도 공격했다. 벨루 주교를 비롯해, 교회가 인도네시아에 대한 저항에서 큰 몫을 한 것이 사실이고, 사제들도 많이 희생됐다. 그러다가 국제적으로 여론이 들끓고 인도네시아 스스로 더 이상 동티모르를 장악할 여력이 없어지자 결국 영토주권에 대한 주장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2002년 5월 20일, 동티모르는 21세기에 태어난 첫 국가가 됐다. 그 뒤로는 인도네시아에도 민주정부가 들어섰고 동티모르와의 관계도 정상화됐다.
국제 사회에서 동티모르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아진 데에는 '노벨평화상'도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한 벨루 주교와 독립 투쟁 지도자 호세 라모스-오르타가 함께 199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라모스-오르타는 2007~2012년 한번 대통령을 지냈고 2022년 선거에서 다시 당선돼 지금 대통령을 또 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로부터 벗어난 뒤 한국도 평화유지군을 파견해서 치안 유지와 국가 수립 과정을 도와줘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라모스-오르타는 한국을 여러번 방문했고, 작년에도 왔었다.
동티모르가 아세안에 못 들어간 이유
어느 새 동티모르가 독립한 지도 20년이 넘었다. 그런데 아직도 ASEAN의 정회원국이 되지 못했다. 그 느슨한 아세안이 이럴 때 보면 문턱이 높다. 과정을 살펴보자면, 동티모르는 2002년 독립 때부터 아세안에 가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인도네시아도 지지해줬다. 여러 준비를 거쳐서 2011년에 공식 가입 신청을 했다.
문제는 결국 경제력이다. 동티모르의 연간 국내총생산(GDP)은 20억 달러 규모다. 아세안 내에서 경제규모가 가장 작은 나라가 라오스인데 라오스의 GDP가 150억 달러 정도다. 그런데 동티모르는 그 13% 수준인 것이다. 1인당 GDP를 보면 구매력 기준으로 환산해도 4000달러에도 못 미친다.
아세안 헌장의 회원국 자격요건을 보면, 먼저 지리적으로 동남아에 있어야 한다. 모든 기존 회원국이 가입에 찬성해줘야 한다. 가입국은 아세안 헌장에 동의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사실 당연한 소리다. 그런데 회원국 의무로 규정된 것 중에 1) 아세안 내 모든 회원국에 대사관을 둘 것 2) 모든 장관급 회의나 정상회담에 참석할 수 있어야 한다 3) 아세안의 모든 조약과 선언과 협정에 가입해야 한다는 내용이 붙어 있다.
기존 회원국들 가운데 여러 나라가 동티모르를 받아들이는 것에 찬성했으나 싱가포르 같은 나라들은 “동티모르는 저개발 상태라서 가입하기에는 이르다”며 반대했다. 뒤에 반대한 나라들이 입장을 바꾸면서 동티모르는 2022년에 ‘원칙적으로’ 11번째 아세안 회원국으로 승인됐고
정회원 자격을 기다리고 있다. 작년에 아세안 가입 로드맵이 나왔는데 “대규모 회의를 개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영어를 구사하는 정부 직원들이 충분해야 한다”는 것 등등의 이행단계들을 규정했다. 이제 스물 두 살의 신생국에게, 앞으로도 갈 길은 참 멀다.
실제 경제가 어느 정도나 발전된 상태인지는 현지에 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수치로 보면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수입의 80%를 석유 수출에 의존하고, 화폐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해서 미국 달러를 쓰면서 centabo라는 동전을 일상생활에서 쓴다고 한다. 문자해독률이 2018년 기준으로 70% 수준 밖에 안된다. 아직도 30%는 글을 못 읽는다는 얘기다. 공식 언어는 포르투갈어와 tetum 이라는 현지어이지만 여러 부족들이 있어서 토착언어가 줄잡아 30개다.
다시 교황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이번에 교황은 12일간의 아시아 방문에서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동티모르, 싱가포르를 돌았다. 프란치스코는 전임 교황들과 비교하면 아시아와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평을 듣는다. 즉위 초반에 한국, 스리랑카, 필리핀, 일본을 방문했고 방글라데시, 몽골, 미얀마, 태국도 갔다. 워낙 고령이고 건강도 안 좋은데 이번에는 비행기를 7번 타고 3만2000km 날았다고 한다.
이번 방문국들 중에 가톨릭 신자가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는 동티모르뿐이다. 인도네시아 방문에서 교황이 이슬람 지도자를 만나 다정하게 대화하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이번에도 종교 간 대화와 화해, 포용이 교황의 메시지였던 듯하다. 세상이 교황의 말을 좀 들어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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