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조계사 앞 12일 연등회는 축제 분위기였다. ‘관서현 보살’이 나와 “천상천하”를 선창하면 무대 앞에 모인 이들은 “유아독존”을 외쳤다. 아이돌 ‘응원법’ 못잖은 호응이었다. 하일라이트는 마지막에 등장한 뉴진스님. ‘제행무상’ ‘자타불이’가 EDM과 어우러지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깨달을 수 있습니까!” 집회 구호를 연상케하는 말투로 목청껏 호응을 유도하고, 관객들은 “깨닫자!” “깨닫자!”로 화답한다. 현대 한국 ‘불교 씬’에서 가장 ‘신박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소셜미디어에는 비난이 적잖다. “개그맨이 승복 입고 나와 불교를 왜곡시키고 우습게 만든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더 큰 문제가 됐다. 이달 3일 뉴진스님이 콸라룸푸르의 클럽에서 공연을 한 뒤에 말레이시아 청년불교협회(YBAM)가 공식 비판 성명을 낸 것이다. 뭐가 문제였을까. 현지 언론의 표현을 보니 이해가 된다. “클럽 공연에서 머리를 민 디제이가 승복을 입고 관객을 열광시켰다.” 한국 연등회에서의 공연은 불교 행사의 하나로 기획된, 불교를 대중화시킬 수 있는 퍼포먼스였단 반면에 말레이시아에서는 ‘승복을 입고 춤판을 부추긴 클럽 쇼’였던 것이다. 받아들여진 맥락이 너무 달랐다. 말레이시아 불교계가 ‘삼보(불보·법보·승보)’의 하나인 승려를 사칭했다고 뉴진스님을 비난한 것에는, 공연 현장이 대체로 음주가무를 하는 클럽이었던 탓도 컸을 것이다.
종교의 엄숙함을 침해당했다는 느낌 외에, 말레이시아의 정치사회적 구성도 우려를 부추겼던 것 같다. 청년불교협회 사무총장 으오샹옌은 성명에서 3R(인종, 종교, 왕족)과 관련된 민감성을 경고했다. 3400만 말레이시아 인구 중 불교도는 20% 밖에 안 된다. 버마족과 샴족, 스리랑카계, 인도계 주민 중에도 불교 신자가 있기는 하지만 말레이시아 불교도의 거의 대부분이 중국계 즉 화교다.
종교 면에서 억압적인 나라는 아니지만 말레이시아는 ‘이슬람 왕국’이다. 이웃 인도네시아는 주민 대부분이 무슬림인데도 헌법에 명시된 ‘이슬람 국가’가 아닌 반면, 인구의 60%가 무슬림인 말레이시아는 헌법에서 “이슬람이 진정한 말레이인의 유일한 종교”라고 선언하고 있다. 다수 민족인 말레이계는 헌법에 의해 모두 무슬림으로 규정되고, 말레이계 인구 비중이 60%이기 때문에 ‘국민 60%가 무슬림’이라는 수치가 나오는 것이다. 법에 따르면 무슬림과 결혼하는 비무슬림은 먼저 이슬람으로 개종해야 하며, 이를 위반하여 체결된 결혼은 법적으로 무효가 된다.
말레이라는 민족 정체성과 무슬림 종교 정체성은 서로 결합돼 있다. 이슬람 세계의 대부분 국가들처럼 말레이시아에서도 최근 한 세대 사이에, 특히 미국의 대테러 전쟁 이후 이슬람주의가 강해져왔다. 이슬람 정치세력의 목소리가 커졌고, 정부가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적극 장려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이슬람이 국가와 법 체계의 기반이어야 한다고 믿는 이슬람주의 경향은 9.11 테러 이후 이슬람권만이 아니라 세계의 이슈였다. 반면 불교도들의 종교적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에서 ‘불교’는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작년 9월 미국 퓨리서치센터가 동남아시아 6개국에서 종교에 대해 설문조사한 내용을 공개했다. 성인 70% 이상이 불교를 믿는 캄보디아, 스리랑카, 태국에서는 불교도 10명 중 9명 이상이 “불교를 믿는 것이 진정한 국가의 일원이 되는 데 중요하다”고 답했다. 실제로 이 나라들은 세속국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정치에 불교를 활용하고 있다. 종교가 민족 정체성, 국가 정체성의 바탕이라고 믿는 것은 무슬림이나 불교도나 다를 바 없으며 다만 ‘다수’가 누구냐에 따라서만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 나라 불교도들은 불교를 “내가 속한 문화"이자 "따라야 하는 가족 전통"이라고도 말했다. 캄보디아 불교도 4명 중 3명은 불교를 ‘민족’과 연결지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는 이슬람이 그 역할을 한다. 두 나라의 무슬림 역시 진정한 인도네시아인 또는 말레이시아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슬림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말레이시아 무슬림 86%는 이슬람 종교법인 샤리아를 국가 법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의 64%보다도 훨씬 압도적인 비율이었다. 말레이시아 무슬림은 정치 지도자가 무슬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도 더 높았다. 4명 중 3명은 이슬람을 ‘민족’과 동일시했다.
싱가포르는 말레이계와 중국계의 인구 비율이 말레이시아와 반대다. 인구조사로 보면 싱가포르 성인의 30% 정도가 불교도이고 20%는 무종교인이다. 20% 조금 못 되는 이들이 기독교인이고 15%는 무슬림이다. 퓨리서치 조사에서 싱가포르인의 56%는 종교, 민족, 문화의 다양성이 자기네 나라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든다고 답했다. 10명 중 약 9명은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중국 전통 종교 모두 싱가포르의 문화나 가치관과 양립할 수 있다고 했다. 정치에선 가장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싱가포르가 종교에서는 훨씬 개방적이었다. 6개국 중 싱가포르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개종’에 부정적인 응답이 압도적이었고, 다수 종교가 아닌 소수 종교, 내 종교가 아닌 남의 종교를 ‘폭력적’이라 여겼다.
하지만 폭력은 다수가 소수를 상대로 저지를 때가 훨씬 많다. 동남아시아에서 정치, 경제가 불안정한 상황이 됐을 때 상대적으로 잘 사는 중국계가 대중들의 분노 속에서 공격을 받는 일은 드물지 않다. 말레이시아 화교의 경우 지난 세기 중반에 과거 공산당의 주축이었다는 이유로 극심한 탄압을 받은 아픈 역사가 있고, 1990년대 후반 환율위기 때에도 화교 상점들이 일부 약탈을 당했다. 화교에 불교도인 이들은 이슬람주의가 강해질 때에도 종종 타깃이 되곤 한다. 2013년에는 싱가포르의 불교 신자들이 말레이시아 조호르 주에서 무슬림 기도실을 수유실로 이용했다가 갈등이 불거진 일도 있었다. 문제의 수유실이 있던 리조트 주인을 경찰이 체포하기까지 했다.
종교든 언어든 민족이든, 어떤 잣대로 인해 마이너리티가 되면 설움을 겪는다. 공공 용지에 지어졌다는 이유로 당국이 불교 사원을 철거하고 개발업자에게 매각한 일도 있었다. 2014년에는 불교 유적지인 칸디 사원이 개발업자에 의해 부서졌고 문화유산 파괴를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페락 주의 킨타 계곡에 있는 석회암 동굴에서는 오래된 불교 사원을 지키려는 승려들이 채굴업체와 3년 전부터 싸우고 있다. 종교가 민족과 국가를 규정하는 사회에서 다수의 시선을 늘 의식해야 하는 처지이기에, 말레이시아의 불교도들은 뉴진스님의 흥겨운 공연이 자칫 힘겹게 지켜온 자신들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을까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딸기가 보는 세상 > 구정은의 '현실지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정은의 ‘현실지구‘] 고릴라와 피그미 (15) | 2024.07.13 |
---|---|
[구정은의 ‘현실지구‘]이스라엘에 맞장뜬 섬나라…몰디브로 본 인도양의 세계사 (0) | 2024.06.15 |
[구정은의 ‘현실지구’] 코끼리와 다이아몬드 사이, 보츠와나의 길 (1) | 2024.04.20 |
[구정은의 ‘현실지구’] 파나마 ‘게의 섬’ 사람들의 기후변화 이주 (0) | 2024.03.23 |
[구정은의 '현실지구']나이지리아 떠나는 셸 (1) | 2024.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