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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딸기21 2022. 5. 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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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They Thought They Were Free: The Germans, 1933-45 (1955년)

밀턴 마이어. 박중서 옮김. 갈라파고스 

 

독일에서 국가사회주의가 대두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미국인으로서 나는 혐오감을 느꼈다.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유대인으로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언론인으로서 나는 매혹을 느꼈다. 나는 이 괴물 같은 인간, 즉 '나치'를 직접 보고 싶었다. 나는 그를 이해하려 시도해보고 싶었다. 우리, 그러니까 그와 나는 모두 인간이었다.
나는 인종적 우월성에 관한 나치의 교리를 거부하면서도 그의 과거 모습이 어쩌면 내 미래의 모습일 수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 그를 그런 길로 이끌어 갔던 것이 훗날 나를 이끌어 갈 수도 있었다. 
(9쪽)

 

나온 지 오래된 책이다. 초판이 나온 것은 1955년. 전쟁이 끝나고 10년 쯤 됐을 때다. 유대계 미국인인 저자는 편의상 '크로넨베르크'라는 가상의 이름을 붙인 독일의 소도시에 잠시 살면서 '나치'였던 이들을 만난다. 책은 그 열 명의 남성들과의 대화,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저자의 생각들을 담은 에세이처럼 구성돼 있다. 후반부는 '독일 민족'에 대한 저자의 생각, 전후 냉전의 경쟁터가 돼버린 독일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들로 구성돼 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서 나치즘이 독일을 휩쓸게 되었는지를 좀 더 잘 알게 되었다. 이는 외부의 공격을 통해서도 아니었고, 내부의 전복을 통해서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적극적인 기쁨의 함성과 외침을 곁들여가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들은 나치즘을 원했다. 그들은 나치즘을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나치즘을 좋아했다.
귀국했을 때 나는 내 조국을 약간 두려워하게 되었다.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과 환상이 조합된 압력에 노출될 경우 내 조국이 과연 무엇을 원하고 가지고 좋아하게 될지를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내가 만난 사람은 독일인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단지 특정한 조건 하에서 독일에 있었을 뿐이었다.
(13쪽)


'나치'를 만나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겠다는 마이어의 문제의식 속에는 '무엇이 인간인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하는가'에 대한 관심도 있지만 매카시즘의 광기에 휘말린 미국에 대한 반성도 들어 있다. 책의 전반을 꿰뚫는 것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 그리고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로 시작되는 마틴 니묄러의 시다. 

 

연합국의 점령부조차도 내 친구들을 나치 반대자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들의 삶에서 국가사회주의 치하에서 보낸 한 시기를 부정하는 것은 완전히 부적절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그들 눈앞에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을, 심지어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자유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 친구들이 보기에 '자유'란 자기들이 한때 갖고 있다가 지금은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노예였다는 것을 몰랐던 사람들은 자기가 해방되었다는 것조차도 모르게 마련이다. 
(98쪽)

내가 만난 10명의 친구들은 국가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에도 유대인에 대한 자기 태도를 결코 바꾸지 않았다. 나치즘이 무력에 의해 패배했다는 사실조차도 나치가 유대인을 이전보다 더 사랑하게 만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변화가 있었다면 오히려 '덜' 사랑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열정 그들을 여전히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모닥불이라곤 마치 반유대주의 하나뿐인 것 같았다.
우리가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한 행동을 우리는 반드시 정당화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우리의 유죄인 관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킴으로써 그들을 우리의 유죄로 끌어들여야 한다.
(193쪽)

내가 만난 나치 친구들은 히틀러를 신격화하지도 않았고 그를 찬양하지도 않았다. 절대적 지배를 가능하게 한 절대적 권리나 절대적 권력이 그에게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그들은 단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를 총통이나 지도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않았다.
그들은 그를 히틀러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재건하길 원하든 간에 히틀러주의를 재건하고자 꿈꾸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들은 비록 낭만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히틀러를 되살리려는 낭만까지는 없었다. 
그들은 히틀러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행위를 굳이 삼가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말할 기회가 있으면 꼭 말했다. 다만 정작 그렇게 할 기회 자체가 드물었을 뿐이다. 독일인이 보기에 히틀러는 과거에 살았고 성공했고 실패했고 죽었고 지금도 여전히 죽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히틀러는 그 시대에 속한 사람이다. 그가 후세에 남긴 유산은 내 친구들에게 즉 폐허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속해 있었다. 머나먼 미래는 독일을 과거와 같은 또는 현재와 같은 상태로 남겨둘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108쪽)

 

본래 이 나라의 그리고 이 나라 사람들 모두의 통합은 오로지 독일인이 된다는 것이라는 한 가지 원칙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독일은 어디에 있는가?"
나치즘은 이 사실을 알았다. 내 친구들에게는 이것, 즉 독일의 정체성 확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또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이런 움직임으로 말하자면 내 친구들의 자신감을 회복시킨 것이기도 했는데 이는 마치 길을 잃었던 아이가 자기 집을 보자마자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50쪽)

 

독일 교육의 역사적 무능은 학자들의 무책임에서 부분적으로 기인하는지 몰라도 히틀러 이전의 공동체에는 비록 경직되고 얕긴 했지만 독립적인 정신도 있기는 있었다. 이런 정신은 비록 약하다 하더라도 일종의 보루였다. 물론 국가사회주의 자체에 대항하는 보루까지는 아니었지만 국가사회주의가 실천에서 이론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항하는 보루이기는 했다. 
왜냐하면 나치즘은 현대의 공산주의와는 달리 실천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치즘의 대중운동은 애초부터 비지성적이었고 그때만 해도 단지 실천뿐이었기 때문에 차마 이론화되기 전부터 반지성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62쪽)

 

백인 거주 구역에 사는 우리 백인 가운데 우리와 그저 얼굴만 알고 지내다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 흑인 이웃의 목적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어쩌면 그는 우리 구역에서 떠나라는 압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이때는 차라리 그 흑인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그가 어디로든 이곳을 떠나 "자기랑 같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더 행복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거나, 심지어 이곳을 떠나는 대가로 웃돈을 두둑하게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쪽이 더 안심이 된다
.... 내 친구들은 실제로도 상황을 알지 못했던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이 알지 못했던 까닭은 굳이 알고 싶어 하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알지 못했다. 그 당시에 몹시 알고만 싶어 했더라도 그들은 알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감히 알고 싶어 했겠는가. 우리 백인들은 흑인 이웃이 떠났을 때, 그가 왜 또는 어디로 또는 무엇을 가지고 떠나는지를 굳이 알아보고 싶어 하겠는가(181쪽)

 

"저는 유대인에 관해서 당신께 여쭤보고 싶어요. 거기서는 당신이 누군가를 딱 보자마자 유대인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나요? 여기 사는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언제나요.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구분할 수 있어요. 언제나요." (195쪽)

 

오래 전 만난 미국 저널리스트들이 생각난다. 한 사람은 내가 중동 국가에 가본 적이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유대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공교롭게도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얼굴만 보고 알 수가 있었다. 또 한 명은, 본인이 유대인이라고 내게 말했다. 나보다도 몇 살이나 어렸을 그는 어릴 적 동네에서 '유대인의 집'이라고 쓰인 낙서를 보고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이스라엘에는 가보지 않았다고 했다.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해야할 지 혼란을 느낀다고 했다. 그냥 문득 떠오른 기억일 뿐이다.

 

1950년 10월에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뉘른베르크를 모범으로 삼은 법적 소송 절차를 승인했는데 이는 만약 남한이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에 북한과 중국의 전범들을 재판하기 위해서였다. 법무관들은 영화 촬영 기사를 대동하고 한반도 최북단의 압록강까지 곳곳을 누볐다.
그로부터 1년 뒤에 유엔 사령관인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유엔에서 보호 관리 중인 전쟁 범죄의 확실한 사례가 499건에 달하며 피의자가 126명에 달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뒤에 북한과 중국의 전쟁 범죄자들은 재판도 받지 않고 교수형도 당하지 않은 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덜레스 장관이 전한 소식은 유엔 지휘부가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된 적국 포로들을 석방할 경우 북한과 중국의 지휘부도 적국 포로들을 석방하는 데에 동의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은 승패 없이 휴전으로 끝났다. (전범 처리는 무산됐다) 국가 간의 정복과 마찬가지로 국제법도 제대로 가동하려면 우선 패배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209쪽)
주권자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결코 알았던 적이 없었던 이들은 과연 무엇에 대해 유죄인 걸까.
내가 만난 10명의 친구 모두가 선뜻 고백한 바에 따르면 이것은 곧 자기들이 독일에 있는 독일인이라는 범죄였다. 
"우리는 근면하고 질서정연하기도 하죠.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점에서는 불운합니다. 즉 우리는 스스로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강철의 손'이 필요합니다."
"왜죠?"
"그건 저도 모릅니다. 우리 독일인은 원래 그렇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또다시 자기 연민이었고 또 한편으로 자기 변명이었으며 한마디로 손쉽게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234쪽)

"우리한테는 생각할 시간이 전혀 없었습니다. 워낙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거든요."
"빵집 주인의 말이 맞습니다." 내 동료가 말했다. 
"독재 정치는, 그리고 독재 정치가 나타나게 된 과정 전체는 무엇보다도 기분 전환이 되었습니다. 그건 어차피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핑계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나치즘은 우리에게 뭔가 끔찍하고 근본적인 것을 던져주면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변화와 위기를 가지고 우리를 계속 바쁘게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우리 주위에서 조금 조금씩 자라나던 그 끔찍한 것들에 관해서 생각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감사해 하고 있었습니다. 굳이 생각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237쪽)

"부끄러움에서 문제는 뭔가 하면요." 그가 말했다. 
"그건 바로 그게 깊이까지 스며들거나 또는 그렇게까지는 스며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약 부끄러움이 깊이까지 스며들지 않는 경우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다치자마자 부끄러움을 내던져 버리는 겁니다. 만약 충분히 깊이까지 스며들 경우 부끄러움은 자살의 일종처럼 됩니다."
"맞아요. 우리가 반대하고자 원했던 것은 항상 '과도함' 뿐이었죠. 전체적인 정신에 반대하는 것보다는 과도함에 반대하는 일이 훨씬 더 쉬워요. 왜냐하면 전자에 관해서는 매일같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라도 있어서 부담스럽지만 후자에 관해서는 당연히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도리어 체념하니까요.
(246-247쪽)

 

그럼에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있다.

 

"'당신은 선서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선서를 했습니다. 
바로 그날 저는 세상을 상실했고 그걸 상실한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제가 나중에 친구들을 도울 수 없어서 생겨나는 악에 비하자면 제가 선서를 함으로써 생겨나는 악은 오히려 정도가 덜하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선서라는 악은 확실하고도 즉각적이었던 반면 제가 친구들을 돕는 일은 미래의 일이었기 때문에 불확실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나중에야 가능할 선에 대한 희망으로 그 당시에 그곳에서 분명한 악을 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선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었던 반면 악은 이미 뚜렷한 사실이었습니다." 
(253쪽)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국가라는 강철 전차의 쇠못 박힌 바퀴 아래 자기 몸을 내던졌을 당시에 그들 각자가 충분히 그 상황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친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러지는 않았으며 나로선 이 사실 때문에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상황에 충분히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263쪽)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다른 누군가가 문제를 제기하는 걸 볼 때에' 사람들이 부당한 것에 대해 항의할 용기를 얻게 된다는 점이었다. 나 스스로 맨 먼저 항의를 하는 그 한 사람이 될 용기를 내지는 못한다 해도, 그 한 사람의 호소에 한 마디 거들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라도 된다면.

 

독일계 유대인은 사실 완벽한 독일인이었다. 우리가 독일의 '프로이센 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헌법적 토대를 놓은 사람은 다름 아닌 유대인 프리드리히 율리우스 슈탈이 아니었던가. 조만간 이스라엘을 지배하게 될 세력 역시 소수에 불과한 독일계 유대인이 아닌가.
우리가 들은 바에 따르면 이미 이스라엘에서는 우리가 유난히 독일적이라고 생각하는 극단주의적 경향의 형태들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나치의 행위에서 이와 똑같은 경향은 브루노 베텔하임 교수가 부헨발트의 유대인 죄수들 사이에서 목격한 바 있다. 
(373쪽)

나는 이 나라만큼 부족 중심주의적 희생에 거리낌이 없으면서 버스나 전차나 기차에서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남자가 하나도 없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교통사고 현장에서나 거리에서 아이들 간에 벌어진 싸움 현장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을 한결같이 마뜩찮아 하는 모습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독일의 호텔, 식당, 상점의 서비스는 훌륭하다. 이들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끔찍하리 많지 진지하고 끔찍하리 만치 둔감한 것이다. 
(381쪽)

진정으로 독일적이었던 것은 훗날 국가의 적들에 대한 냉정한 학살 즉 합법적이고 정확하게 조정된 조직적 박해라고 일컬어진 것들이었다. 
차마 조합이 불가능해 보이는 '냉정한'이라는 단어와 '학살'이라는 단어를 조합하면 여러분은 나치 독일을, 즉 훌륭하게 조정된 기관을 보유하고서 미쳐 날뛰게 된 '전체' 유기체를 갖게 되는 것이다. 
독일인들에게 침략받은 민족들이 보편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정복자의 '비'인간성, 그리고 그가 명령하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에 따라 분노에서 정식 절차로, 불에서 얼음으로, 또다시 불로 갑작스레 왔다 갔다 하는 현상이었다.
(393쪽)

 

1945년 5월 9일, 독일은 박살난 돌 조각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되었다. 1945년 5월 9일, 이제 더 이상은 나치도 비나치도 나치 반대자도 없었다. 단지 실제 천년 제국의, 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려서 만드는 데에만 천 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제국의 박살난 돌 조각들 밑에서 기어나온 사람들만 있을 뿐이었다.
이들 모두는 분명히 뭔가에 대해 유죄였으며 또한 분명히 뭔가에 대해 무죄였다. 
(405쪽)

 

공교롭게도 오늘이 5월 9일이로군.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던져진 질문들. <함락된 도시의 여자>에서 느꼈던 끔찍한 담담함. 그리고 이 책.

 

보스니아, 르완다, 시에라리온.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 그리고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오랫동안 '무고한 시민들이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품어온 내게, 책은 '해답'은 아니었어도 여러 생각할 거리들을 더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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