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스티글리츠, <유로>

딸기21 2022. 4. 1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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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조지프 스티글리츠, 박형준 옮김, 열린책들

 

스티글리츠의 책을 여러 권 읽다 보니 비슷한 논지의 글을 반복해서 듣는 것 같은 느낌이 좀 있었다. 이 책은 이전 저서들에서 얘기해온 것들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2008~2012년의 총칭 '유로존 위기'에 집중하고 있고 정책적, 제도적 대안들을 모색한 것이어서 도움이 많이 됐다. 스티글리츠는 독일의 흑자가 결국 그리스 같은 나라들을 궁지로 내몬 과정을 파헤치면서, "중국의 흑자를 욕하면서 왜 독일의 흑자는 욕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유로화와 그 배경이 된 '이상'에 공감하면서도 저자는 유로화를 '그리스-유로' 식으로 쪼개어 몇 개의 블록으로 나누는 것, 혹은 아예 독일을 유로존에서 내보내는 것까지 여러 종류의 해법들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쪼개진 유로, 독일 없는 유로존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논의 자체가 근본적이어서 눈길을 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한 '신화'는 한국에도 뿌리 깊게 퍼져 있지만,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는 금융당국의 독립성은 허상이며 오히려 시민들의 이익을 해친다는 지적도 새겨들을 만하다. 그리스에 '트로이카'가 빵 덩어리 크기까지 바꾸도록 강요한 것을 비롯해 피상적인 보도만으로는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된 것도 수확이다. 

 

책은 2016년에 쓰인 것이고 한국에서는 2017년 번역출간됐다. 그 뒤에 코로나19가 발생했다. 독일과 유럽 전체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이 돈을 풀었다. 한국만 빼고;; '재정정책의 귀환'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많다. 이번엔 구조조정이나 긴축이라는 '조건 없이' 유럽연합이 '코로나 경기부양'으로 방향을 틀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티글리츠가 이 책에서 지적한 유럽중앙은행 체제와 유로화의 구조적 문제점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말이다. 팬데믹 이후의 유럽 경제, 유로화는 어디로 갈까. 

 

[구정은의 '수상한 GPS'] '코로나 위기'와 독일의 바주카포…10년 전과 달라진 유럽 

 

오랫동안 경제 통합에 관해 고민하면서 글을 써왔기 때문에 유로화 실험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내가 1990년대 빌 클린턴 대통령의 경제자문과 경제자문회의 의장을 맡으면서 유로 실험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우리는 북아메리카 자유무역협정NAFTA을 통해 미국 캐나다 멕시코 간 무역의 국경을 개방하는 일에 착수했다. 또한 세계무역기구WTO 창설에 공을 들였고 1995년에 이 기구를 띄웠다. NAFTA는 유로존보다 훨씬 소심한 계획이었다. 세 나라 중 어떤 곳도 통화를 공유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정도로 제한된 통합에도 많은 문제점을 발생시켰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유무역협정이란 이름 자체가 허위 과장 광고 논란의 소지가 있다는 게 명백해졌다는 사실이다. NAFTA는 사실 세심하게 관리되는 무역협정이었다. 특별한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특히 미국 내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관리되었다. 바로 이 때부터 나는 경제 통합과 정치 통합 사이의 간극이 가져오는 결과들과 완벽한 민주적 과정과는 거리가 먼 맥락 속에서 소수 지도자들 간에 이루어지는 국제 협정들이 야기하는 문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나는 클린턴 행정부에서 일하다가 세계은행 수석 경제학자로 위촉되어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나는 경제 통합이 정치 통합과 조응하지 못했을 때 야기되는 여러 새로운 문제점들에 직면했다. 세계은행 자매 조직인 국제통화기금IMF이 자신들의 지원을 원하는 나라들에게 주관적인 관점에서(그리고 다른 원조국들의 관점에서) 좋다고 생각되는 정책을 강제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의 관점은 틀렸다. 때로는 매우 심각하게 잘못된 것들이었다. IMF가 강제했던 정책들은 종종 해당 국가의 경기침체와 불행을 야기했다. 나는 이러한 실패가 왜 발생했는지 그리고 IMF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15-16쪽)
우리는 이제 불평등이 경제 성장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우리가 불평등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이러한 연관성들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보다 근본적인 도덕적 문제가 결부돼 있다. 유로화는 불평등의 심화를 야기해 왔다. 이 책의 주요한 주장 가운데 하나는 유로화가 격차를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유로화는 약한 국가를 더 약하게 만들고 강한 국가는 더 강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신자유주의 경제 의제들이 평균 성장율을 높이는 데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지만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틀림없다. 유로화는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구체적인 사례 연구를 제공한다.
(19쪽)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표준 모델은 경제가 균형 상태에 있다고 단순하게 가정한다. 경기 하락이 발생하더라도 재빨리 원래 경로로 복귀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경제가 곤란을 겪은 후 재빨리 균형 상태로 수렴한다는 개념이 바로 유로존의 건설을 이해하는 열쇠다. 나는 왜 경제가 종종 균형 상태로 수렴하지 않는지를 설명하려고 오랫동안 연구해왔다. 유럽에서 펼쳐진 일들은 슬픈 사례이긴 하지만 이와 관련해 매우 훌륭한 사례를 제공해줬다.
(20쪽)

경제학은 개인들과 사회의 안녕과 복지를 증진한다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여야 한다. 개인의 안녕은 GDP 뿐 아니라 사회연대, 융합, 사회 정치적 제도에 대한 민주적 참여 같은 훨씬 더 광범위한 가치들의 집합에 달려 있다. 유로화 역시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들이 폄하되고 수단이 목적으로 변질됐다.
유로존이라는 교훈극은 자신들을 뽑아준 유권자들의 손에서 벗어나 지도자들이 어떻게 시민들의 이해에 복무하지 않는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경제 통합 과정에서 금융적 이해관계와 이념이 설치면서 어떻게 다수의 시민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소수만 이익을 보는 경제 구조를 낳았는지 보여 주었다.
(21쪽)

일부 평론가들은 내가 이데올로기와 신자유주의 역할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유로>의 핵심 메시지는 신념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29쪽)
세계 곳곳에서 중산층 노동자들, 특히 남성들 사이에 불안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면 그들의 곤경을 유로 탓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 그러나 유로화의 실패는 이러한 주제를 키우고 악화시켰다.
이 노동자들은 자신의 능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만약 게임의 규칙만 공정하면 경쟁자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세계화의 규칙이 그들한테 불리하게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이러한 자신감은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기술 낙관주의자로 남아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들은 신기술에 대해 자신들의 숙련도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신기술이 오래된 일자리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현실은 다르다. 기술 발전과 세계화의 결과로 우리 경제와 사회가 직면하게 될 변화의 규모는 너무 크다. 많은 개인과 공동체들은 혼자 힘으로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다.
(34쪽)

경제적 다양성을 고려 한다면 관련 정책들에 잘 조응하지 못하는 나라를 도와줄 수 있는 방향으로 제도적 장치들을 배치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다양한 환경, 믿음, 가치의 차이에 서로 적응할 수 있도록 원칙에서도 충분히 유연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전반적으로 유럽은 이러한 태도를 보완성의 원칙 속에 잘 담았다. 이 원칙은 공공정책에 대한 책임성을 개별 국가가 갖도록 했다. 즉 가능한 한 폭넓은 범위의 결정권을 개별 국가에게 부여하는 셈이다. 실제로 유럽연합의 예산은 GDP의 1% 남짓으로서 유럽연합 차원의 지출은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별 시민들의 복지에 매우 중요한 영역, 즉 실업 문제와 통화정책에서는 권한이 유럽중앙은행에 집중되어 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유로존 구조 속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내장돼 있다. 이를 테면 유럽중앙은행은 실업 문제, 성장 안정성 모두를 하나로 통합 관리하는 미국 연방준비은행과는 대조적으로 인플레이션에만 촛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로존의 구조와 원칙, 규제가 그 자체로 성장, 고용 그리고 안정을 촉진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다.
(55쪽)
그동안 실패한 긴축프로그램의 역사가 있는데 왜 이들은 다른 곳에서 실패했던 프로그램이 유럽에서는 작동할 것이라 믿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이념은 경제의 작동 방식에 관하여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반증이 쌓여왔는데도 그들은 꼼짝도 안 했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이외에도 정치적 의제가 있었을 것이다. 좌파 정부를 실각시키고 좌파 정부를 뽑으면 저렇게 된다고 다른 나라 유권자들을 교육시키면서 보수적인 경제적, 사회적 의제가 유럽 내에서 유행할 수 있게 만들려는 정치적 의제다. 나는 유럽 지도자들과의 토론 속에서 정치적 의제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유럽의 사회적 모델을 떠받치고 있는 여러 제도적 장치는 각국의 재무장관들로부터 별로 지지를 못 받고 있다. 재무장관들은 이번 위기를 자국 내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타국에서 해보는 기회로 여기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많은 이들이 해당 국가의 지도자가 취하는 외견상 반항에 대해 거의 분노에 가까운 보복 조치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이를 테면 지도자가 자국에 부과된 프로그램을 국민투표에 부칠 때가 그렇다. 유로존 내의 중책을 맡고 있는 관료들이 단지 각국 국민이 뽑은 지도자들과 의견 불일치 때문에 나라 전체를 고통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토론 속에서 일부의 어조는 이것이 진짜 사실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70쪽)

유로존은 신자유주의 이념을 통화 ‘헌법’ 속에 깔았다. 반면 변화하는 환경이나 경제 작동방식에 관한 새로운 이해에 대응 할 수 있는 유연성은 제공하지 않았다…  이런 구체적 내용에 대한 관심 부재도 부분적으로 이념의 의해 설명된다. 즉 제도적 장치가 어떠하든 시장의 힘이 지배해야 하고 끝내 승리한다는 이념이다.
(74-75쪽)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한 견해 차이가 중요할 수 있다. 첫번째는 보완성의 원칙이다. 즉 공공의 결정은 가능한한 낮은 권위의 수준에서 책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방의 고속도로, 학교, 경찰, 소방서 그리고 환경에 관한 결정들은 국가 혹은 초국가 차원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유로가 만들어질 때 심각한 외부성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유로의 설계자들이 촛점을 맞춘 외부성은 국가들이 과도하게 돈을 빌릴 때 발생했다. 이런 부채는 모종의 방식으로 화폐화 되는데 이렇게 되면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하지만 재정 적자에 대한 집착은 대체로 순수한 이데올로기적 문제였다.
만약 경제구조, 국가적 가치 또는 경제의 작동에 관한 견해 차이가 상당히 크다면 유럽 차원에서 복지를 증진하는 행위의 범위가 제약될 것이라는 사실이 두 번째 함의였다. 유럽 전체, 특히 독일에 인플레이션이 존재하는 한 유럽중앙은행은 높은 실업률로 고통받는 국가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평균 실업률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94-95쪽)

한 나라의 물가가 다른 나라에 비해 떨어지면 실제 환율이 변화하고 이 나라의 상품은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갖게 된다. 이러한 대체 조정 매커니즘을 내적 평가절하라고 부른다. 사실 긴축정책은 이러한 조정 과정을 쉽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경제가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총 수요 부족은 더 늘어나고 물가 하락 압력이 더 커진다. 따라서 조정하려는 힘도 더 강해진다.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신자유주의 옹호론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실업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155쪽)

덜 건강한 방법이지만 무역적자를 줄이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소득이 떨어지면 수입은 줄어든다. 이것이 유로존이 무역 균형을 달성하는데 성공한 핵심이었다. 심지어 그리스도 2015년에 무역수지 균형에 근접했다. 그러나 무역적자 감소의 대부분은 수입 감소로 인한 것이었다.
(157쪽)
한 나라가 다른 나라들보다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환율을 낮추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경쟁적 평가절하에 뛰어들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근린 궁핍화 정책의 한 형태이다. 무역 상대방을 희생시키는 댓가로 이득을 얻는 정책이다. 근린 궁핍화 정책은 대공황의 주된 특징이었다. 그런 경쟁적 평가절하를 막는 일이 IMF의 창설 이유 중 하나였다.
공동 통화지역 내에서 국가들은 분명히 전통적인 형태의 평가절하에 뛰어들 수 없다. 그러나 방금 설명한 것이 경쟁적 평가절하의 또 다른 형태다. 즉 임금이 억제되는 국가는 실제 환율이 이웃 국가에 대해 낮아진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의 경쟁적 평가절하는 부담스러운 근린 궁핍화 정책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다. 부당한 정책의 부담이 정책을 펼치는 국가의 노동자들에게 부과되는 것이다.
(163쪽)

독일은 지속적으로 엄청난 무역흑자를 이룩해 왔다. GDP 대비%로 보면 중국의 두 배에 달했다. 적자가 문제가 된다면 흑자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숫자가 세계적으로 문제라면 독일 역시 그렇다.
케인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일부 측면에서 흑자가 적자보다 더 큰 문제다. 흑자가 글로벌 수요 부족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흑자 국가들은 구매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하므로 자신들의 소득 모두를 지출하지 않는다. 흑자 국가가 지출하지 않은 만큼이 적자 국가의 과잉 지출로 완전히 상세되지 않는다. 그 결과 전세계 수요가 약화된다. 위기 이전 독일은 자국의 무역흑자를 스페인과 아일랜드 같은 주변 국가들에게 대출함으로써 사실상 재활용했다. 그 결과 유럽 내 격차가 확대 되고 유로 위기가 불거졌다.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분열보다 더 큰 분열은 없다.
(177-178쪽)

일반적으로 적자 국가가 적자에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보다 흑자 국가가 흑자를 다루기가 더 쉽다. 예를 들어 독일과 중국은 임금 인상 특히 최하위층 임금 인상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여력이 있다. 지금까지도 독일은 최저임금 제도가 없었고 지금도 최저임금은 겨우 시간당 8.5유로다. 프랑스의 9.47유로와 비교된다. 만약 독일 노동자의 소득이 증가하면 더 많은 구매가 이루어질 것이다. G20이 국가들을 회유하면서 흑자를 추구하지 않도록 유도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관심의 촛점을 독일이 아닌 흑자가 줄고 있는 중국에 두고 있다.
(180-181쪽)
2008년의 위기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갖는 장점에 관한 가설을 테스트하는 최고의 자료를 제공했다. 독립적인 중앙은행이 없는 국가들이 독립적인 중앙은행을 가진 나라들보다 훨씬 더 큰 성과를 올렸다.
원인은 간단하다. 진정으로 '독립적인' 기관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유럽중앙은행을 포함해 대부분 국가의 중앙은행은 소수 그룹인 금융시장에 포획된다. 민주적 책임이 없는 이들 중앙은행 관리자들이 '골드만삭스에 좋은 것이 경제에도 좋다'는 생각을 믿지는 않더라도, 자기규제 같은 생각에 동조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특히 능력주의와 기술주의를 믿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단순히 중앙은행의 리더십과 임원들이 민간 금융 시장에 가까이 있고 얽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관점을 수렴하게 만든다. 이를 종종 '인지적 포획'이라고 부른다.
(223-224쪽)

통화정책이 마치 기술적인 문제인 양 금융 부문 출신의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게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데는 정치적인 의제가 숨어 있다. 중앙은행의 정치적 책임을 제거하면 의사 결정권이 사실상 금융 부문으로 이전되며 그쪽의 이익과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게 된다.
(227쪽)

유로존의 테크노크라트들은 사람들의 고통을 포착한 통계에는 촛점을 맞추지 않았다 냉철한 통계 뒤에 실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삶이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려 하지도 않았다. 5만 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비행기처럼 그들이 말하는 성공은 파괴된 삶이 아니라 타격하는 목표물에 의해 측정된다.
(247쪽)
유럽중앙은행은 짧은 역사 속에서 세 명의 대표를 가졌다. 트리셰는 그가 저지른 엄청난 판단착오로 기억될 것이다. 가장 큰 실수는 경제가 위축되고 있는 순간에 금리를 인상한 일이다. 마리오 드라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리겠다는 약속으로 유명한 2012년에 연설을 통해서 유로존을 살렸다는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그처럼 강력한 영향을 미친 연설은 역사를 뒤져 봐도 몇 번 없을 것이다. 그의 연설은 지역 전체에서 국채 금리를 인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의 연설은 또 다른 방식에서 마력이 있었다. 유럽중앙은행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할 수 있는 권한과 자원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었다. 만약 독일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략에 성공적으로 반대 한다면? 요컨대 아무도 드라기가 벌거벗은 황제인지 아니면 권위 있는 황제인지 몰랐다. 물론 답을 찾는데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랬다. 황제에게 옷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 동안에는 그가 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상관 없이 마치 그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시장이 움직였다.
(231-232쪽)

 

드라기 부분 재미있었음. ㅎㅎ

 

[구정은의 '수상한 GPS']이탈리아의 '수퍼 마리오' 

 

통화주의는 결코 진정한 이론이 아니었다. 통화주의는 거래량과 통화공급의 비율(순환 속도)이 고정돼 있다는 증명 없이 단언된 경험적 규칙성에 기초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이론적인 이유가 없었다. 밀턴 프리드먼이 이러한 새로운 자연 법칙을 발표하자마자 자연은 프리드먼의 금언을 따르는 나라들에게 장난을 쳤다. 즉 순환속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가 당연시하는 단기금융투자신탁 MMF 같은 새로운 형태의 금융수단들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금융시장을 규제하는 규정이 변경되었다.
(234쪽)

1970년대 후반 미국은 용납하기 힘들 정도로 높은 물가상승률에 직면해 있었다. 연준 의장으로 새롭게 임명된 폴 볼커는 새로운 정책으로 거기에 대응했다. 이자율이 급등했다. 모두의 예상을 넘어선 수치였다. 연준 기금 금리는 19%까지 치솟았다. 이 새로운 이론이 인플레이션을 끌어내리는 데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심각한 부작용들을 동반했다. 첫째 대공황 이후 미국의 가장 깊은 경기침체였다. 1981년 레이건 정부는 대규모 세금 감면 등의 재정정책을 통해 막대한 부양책을 썼지만 1982년에 실업률은 10.8% 에 달했다. 두 번째, 1970년대 유가상승을 상쇄하기 위해 돈을 빌린 국가들이 전세계 걸쳐 부채 위기에 빠졌다.
통화주의라는 종교는 맹공격을 받고 세가 기울었다. 대신 그 자리에 인플레이션 목표 관리Inflation targeting라는 새로운 종교가 들어섰다.
(235쪽)
독일과 트로이카는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정부가 전임 정부의 예산 속임수를 발견하고 투명하게 공개하자 파판드레우 정부에게 가혹한 조건을 부과했다. 그런 처벌은 그리스를 실제로 대단히 곤란한 입장에 놓이게 만들었던 사마라스 우파 정부의 귀환을 위한 길을 열어놨다. 결과적으로 트로이카가 나쁜 짓을 한 정당을 처벌하기보다 보상해준 셈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문제가 있었다. 파판드레우 정부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리스 과두 정치세력의 권력을 축소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이 과두 세력이 은행과 언론에 지배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양자간의 연결을 부당하게 이용해 먹었다. 사마라스의 신민주당은 이와 같은 과두 정치세력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가 다시 정권이 잡자 파판드레우의 개혁을 다 뒤집었는데 이에 대해 트로이카 아무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251-252쪽)

최근 몇 년 동안 IMF는 불평등이 어떻게 성장을 약화시키는 주목해 왔다. IMF는 경제 성과와 관련해 불평등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자체 연구를 통해 정부의 지출 삭감이 상당한 경기 위축으로 이어진다는 설득력있는 증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IMF는 트로이카의 하나일 뿐이었다. (283쪽)

그리스에 부과된 긴축의 규모가 다른 나라들에 부과되는 것보다 컸다는 사실은 맞다. 그러나 긴축정책의 강도를 감안할 때 침체의 수준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281쪽)

그리스인들은 현지에서 생산되어 신속하게 배달되는 신선한 우유를 즐긴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다른 유럽의 우유생산 자들은 장거리 운송된 우유가 현지 산물만큼 신선해 보이도록 함으로써 판매량을 늘리고 싶어 한다. 2014년에 트로이카는 그리스가 진짜 신선한 우유에 부친 ‘신선한’이라는 표식을 떼고 우유의 유통기한을 연장하도록 강제했다. 
트로이카는 그리스가 빵덩어리의 크기에 관한 규정을 변경하도록 요구했다. 과거에는 덩어리가 0.5kg, 1kg, 1.5kg, 2kg 등 특정 크기로만 판매됐다. 그러나 트로이카는 매장에서 모든 크기의 빵을 팔길 원했다. 그들은 이것을 경쟁을 촉진하는 규제로 간주했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 트로이카의 입장을 설명해줄 이론적 근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스에서는 약국은 반드시 약사가 소유해야 하고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약도 약국 밖에서 판매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트로이카는 그리스의 이런 규정이 높은 의약품 가격을 야기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인들은 많은 수의 약국을 경쟁의 증거로 보았는데 경쟁이 없다는 혐의를 씌우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사람들 눈에는 트로이카가 신선한 우유의 경우와 비슷한 또 다른 의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스를 다국적 체인에 개방하고 이들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식료품점, 체인점을 강화한다는 의제였다.
(289-291쪽)
유로는 구할 수 있고 구해야만 하지만 어떠한 비용을 들여서라도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에 유로존을 괴롭혀 온 침체와 불황, 높은 실업률, 파탄난 삶, 좌절된 열망 등을 댓가로 지켜야 할 것은 아니다. 변동 환율과 독립적인 통화정책이 없는 상황에서 회원국들이 지속가능한 수준의 경상수지 적자를 운영하면서도 완전 고용과 견실한 성장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체제를 목표로 해야 한다. 경제를 완전고용 상태로 유지하겠다는 유로존의 근본적인 결의가 필요하다.
(313-314쪽)

구조개혁 1번: 은행연합
이 계획은 유럽 지도자들이 이미 동의한 계획이다. 공동 은행 시스템인 은행연합banking union은 공동 감독 이상의 역할을 수행한다. 은행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된 은행들을 처리하는 공동 절차, 이른바 공동청산과 공동 예금보험 업무를 수행한다. 이 3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 예금보험 기금이다. 이것이 없다면 약한 국가의 은행 시스템에서 강한 국가의 은행으로 돈이 흘러 나가 이미 문제를 안고 있는 국가들을 더 약화시킬 것이다.
(315쪽)

구조개혁 2번: 부채의 상호화
자본의 일탈적이고 불안정한 움직임을 먹으려면 은행연합이 필수적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의 일탈적 이동을 막으려면 어떤 형태로든 부채의 상호화가 필요하다. 이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달성될 수 있다. 유로존 국가들 전체가 공동부담하기로 동의한 유로채권을 유럽중앙 은행에서 발행하고 그렇게 조성한 돈을 여러 유로존 국가들에게 융자해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어떤 나라가 경기침체에 접어들 때 대규모 재정적자를 운영하는 것이 낫겠다고 인정하고 상호화하는 부채의 양을 제한할 수 있다. 새로운 부채를 발행해서 얻은 자금은 예를 들어 사회기반시설 또는 교육에 대한 투자에만 지출할 수 있도록 한다. 경제가 침체 상태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정 수준 이상의 부채 증가는 해당국가 안에서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는 요구도 가능하다.
(317쪽)

안정화를 위한 연대기금
필요한 것은 충격에 직면한 국가들이 완전고용을 유지하고 다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이다. 예를 들어 실업보험을 위한 공동자금, 특히 깊은 침체와 관련된 비정상적인 지출을 충당할 수 있는 공동자금 같은 것이다. 안정화를 위한 연대기금은 실업과 여타 경기 순환과 관련된 사회 지출을 지원하는데 사용할 수 있고 구조조정된 경제에서 새로운 일자리로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을 지원하는 데도 쓸 수 있다.
(321쪽)

신용 경매
첫째 중앙은행(정부)은 새로운 신용을 발행할 권리를 경매 방식으로 판다. 그 금액은 금융시스템에 있는 '돈'에 추가된다. 신용 경매 낙찰자는 중앙은행이 부과하는 제한 내에서 상환 능력에 대한 판단에 기초해 사용자에게 이 '돈'을 배분한다. 은행들에게 대출할 권리를 판매할 때 부쳐야 하는 조건들이 있다. 그 대출 가운데 일정 비율은 중소기업과 신생 기업에 할당되어야 한다. 부동산 대출은 최대치가 설정되어야 한다. 사회적 책임에 대한 최소한의 표준이 있어야 한다. 부가되는 금리에도 제한이 있어야 한다.
(361쪽)

무역 전표로 경상수지 적자 관리하기
이 개혁안은 워런 버핏이 미국을 위해 제시한 것이다. 이 제안에 따르면 정부는 수출업자에게 전표(무역 토큰)를 발행한다. 전표는 수출한 것의 가치에 비례하는 숫자를 나타내는 지표다. 다시 일정한 그리스-유로 가치의 상품을 수입하려면 같은 가치의 그리스-유로 전표를 내야 한다. 그러면 이 전표를 거래하는 자유 시장이 생기고 전표의 수요와 공급이 똑같아질 것이다. 그리고 경상수지가 자동으로 균형을 이룰 것이다. 정부는 이 시스템을 활용하여 적자 규모 또는 흑자 규모를 제한할 수 있다.
(367쪽)
IMF는 적어도 경기 위축 정책이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했고 최소한 그리스 아일랜드의 경우에서 강제된 정책의 실 수 일부를 인정했다. 다른 트로이카 구성원들한테는 이런 IMF의 정직함이 탐탁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였다. 왜 유럽은 이런 식으로 행동하려고 할까. 왜 유럽연합 지도자들은 파판드레우의 첫 국민투표 제안을, 혹은 시리자 정부의 2015년 국민투표를 거부하려고 했을까? 그리고 다음 지불 마감일을 단 며칠 연기해 달라는 요청까지 거부했을까?
(394쪽)

대중적 정당성에 대한 관심은 유로존의 정치와 양립할 수 없었다. 유로존은 한 번도 민주적인 프로젝트였던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회원국 정부는 유럽중앙은행에 통화주권을 넘겨주는 것에 대해 국민들의 승인을 직접 구하지 않았다. 더욱이 유럽중앙은행 자체의 정치적 책임은 제한적이었다. 오늘날 유로에 대한 대중적 저항의 일부는 독일의 과도한 영향력과 더불어 거기에 널리 퍼진 사고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려다.
(395쪽)

유로 창설 이후 16년 동안 펼쳐진 것은 민주주의의 반테제였다. 유럽연합의 많은 지도자들은 알렉시스 치프라스 좌파 정부의 종식을 보고 싶어 했다. 그들은 그리스를 괴롭히면 결국 그리스 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그들은 그리스 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실패했다. 치프라스는 2015년에 더 큰 지지로 새로운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것과 상반되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396쪽)

역설적이게도 그리스에 부과된 정책은 이주 위기의 한 측면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그리스는 발칸반도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 경제가 추락하면서 이민자들은 다른 곳을 찾아 봐야 했다.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독일과 일부 국가들 뿐이었다.
불균형한 이민자의 흐름은 유로화가 초래한 경제적 불균형의 예상된 결과다. 유럽연합의 기본원칙 중 하나는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이다. 하지만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이 원칙은 필연적으로 이민자들에 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더 반성하고 있는 독일 같은 나라에게로 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번영을 공유하지 않으면 유럽이 인도적 원칙과 자유로운 이동의 원칙 모두를 준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403-4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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