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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커쇼, <유럽 1950-2017>

딸기21 2022. 3. 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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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1950-2017 - 롤러코스터를 타다 EUROPE 1950-2017 : Roller-Coaster
이언 커쇼, 김남섭 옮김, 이데아 

 


프랑스인들에게 하나의 식민 전쟁이 끝나자 또 다른 식민 전쟁이 시작되었다. 인도차이나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1954년 알제리에서 시작된 새로운 전쟁은 본국에 가까웠다. 어떤 의미에서 알제리는 본국이었다. 1830년부터 신민화된 알제리는 1848년부터 프랑스의 일부로서 관리되었고 프랑스 제국의 다른 부분과는 달리 유럽인 정착민이나 피에 누아르pied-noir(검은 발) 이주민들을 수십만 명씩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폭발은 필연적이었다. 그것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몇몇 식민 당국의 목표들을 공격하면서 이슬람 원리에 기반을 둔 독립국가 알제리를 위한 8년 동안의 전쟁을 시작했던 1954년 11월 1일에 발생했다. (176-177쪽)

튀니지와 모로코는 식민지로 간주되었다. 알제리는 식민성이 아니라 내무부의 관리를 받는 프랑스의 필수적인 일부로 여겨졌다. 프랑스인들의 눈에 알제리에서 깊어가는 갈등은 식민 전쟁이 아니라 내전이었다. 
독립을 허용하려는 어떤 시도도 가로막는 엄청난 장애물은 이주민들의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태도였다.
알제리 민족해방 전선과 피에누아르들의 양 극단 사이에서 드골 대통령은 기우뚱거렸다. 불만을 품은 장군들은 라울 살랑 장군의 지도하에 비밀군사조직을 결성했다. 그들은 정부에 맞서 설익은 쿠데타를 계획했고 프랑스에서 일련의 폭탄 투척을 실행했으며 드골 암살을 기도했다. 비밀군사조직은 모두 합쳐 약 2700명의 사망에 책임이 있었는데 사망자는 거의 모두 알제리의 이슬람 교도였다. 드골은 알제리 독립을 통해서만 궁극적인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 만큼 현실주의자였다. 드골은 1962년 3월 18일에 조인된 휴전에 대해 프랑스 유권자 90%의 지지를 얻었고 7월 5일 알제리 독립이 선언되었다. 분격한 피에누아르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80여 만명이 알제리 유대인 공동체처럼 남부 프랑스로 이주했다. 보통 하급 공무원이나 경찰 병사로 일을 했던 하르키라고 알려진 알제리인들은 전쟁이 끝날 즈음에 민족해방전선의 끔찍한 보복에 직면했다. 그 중 소수는 주로 남부 프랑스로 용케 도피할 수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혹독한 대우를 받았고 사회적 차별 속에 다수파 주민들에게 기피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8년 간의 갈등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수는 최소한 약 17만 명에 이르렀다. 살해당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알제리의 이슬람교도였다. 어느 프랑스인도 살인 혐의로 프랑스 법정에 회부되지 않았다. (179-181쪽)

 



흐루쇼프가 파면되면서 소련에서는 역동적인 독재 체제가 종언을 고하고 이제 집단지도체제가 시작되었다. 이미 1964년 10월에 누구도 동시에 당과 국가의 수단이 될 수 없다고 결정되었다. 브레즈네프는 모든 권력을 수중에 모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브레즈네프의 활기 없는 개성은 흐루쇼프의 변덕스러운 격정과 뚜렷이 대비되었다. 그것은 카리스마적 통치 같은 것에 대한 완벽한 해독제였다. 체제는 보수적인 억압적 권위주의로 자리를 잡았다. 원대한 실험의 시간은 끝났다. (217쪽)

집단지도 하의 새 체제는 지난 시절의 테러적 억압을 모방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산주의 체제는 지도 면에서 어떤 변화가 있던 본질적으로 온전히 남았고 여전히 도전 불가능한 것이 분명했다. 지식인들은 개혁주의 희망의 미몽에서 깨어났다. 흐루쇼프 치하에서 역사 서술의 자유와 객관성을 확대하는 쪽으로 취해졌던 잠정적인 조치들은 중단되거나 심지어 뒤집혔다. 
하지만 그것은 스탈린 시절로 되돌아 가는 것은 아니었다. 자의적인 체포 투옥 처형은 더 이상 없었다. 조용히 지내면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그러나 공공연한 비판이나 정치적 일탈은 보복을 불러일으켰다. 억압은 체제에 내재했다. (218-219쪽)


티토의 이단은 소련 통치의 중심적 교의에 정반대되는 사회주의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에서 권력은 분산되어 고도로 관료화된 당-국가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아니었다. 산업 생산은 중아유계획의 절대적 명령을 강요하는 가혹한 경영자 통치가 아니라 6000여개의 선출된 노동자 평의회들의 ‘자주 관리’를 통해 이끌어졌다. 
1953년부터 1960년 사이에 산업생산은 매년 13% 이상 증가했다. 이 인상적인 경제성장은 많은 부분이 국가가 통제하는 금융 시스템을 통해 유입된 투자에서 비롯했다. 일정 정도는 유고슬라비아를 공산주의를 훨씬 더 깊이 갈라 놓을 수 있는 쐐기로 바라본 미국의 지원 덕분이었다. 1960년대에는 유럽에서 대중적 해외관광이 시작됨에 따라 유고슬라비아의 국고가 더욱 살쪄갔다. 
두 가지 독특한 요인이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상대적인 성공을 좌우했다. 한 가지는 스탈린의 위협이 가한 충격이었는데 유고슬라비아 내부를 단합시키는데 기여했다. 더 긍정적인 것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라는 인물 주위에 정체성 의식이 구축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티토의 대중적 입지와 위신은 그가 당내의 어떤 분파주의도 뛰어 넘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티토가 크로아티아계 아버지와 슬로베니아계 어머니를 가졌다는 사실은 인종적 분열을 초월 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는 티토가 아주 오래 살아 1980년에 사망할 만큼 운이 좋았다. (221-223쪽)


야노시 카다르의 ‘굴라쉬 공산주의’는 제한된 수준이나마 시장의 힘에 대한 노출을 허용했고 덕분에 국민은 소련 블록에서 가장 높은 생활 수준을 누렸다. 1968년 1월 1일에 도입된 신경제 메커니즘은 소련 위성국들의 경제에서 진정한 혁신이었다. 중앙 국가계획은 근본적으로 기본 필수품을 위한 장기적인 투자 프로젝트와 재정정책, 가격 규제로 바뀌었다. 이외에도 기업은 수익을 올리고 상업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서방과의 무역이 증가했고 농업생산이 촉진되었으며 소련 블록의 다른 국가들에서 만성적이었던 기본 필수품 부족 현상이 사라졌다. 그들은 또 모스크바와 긴장을 일으킬 정도로 고삐를 느슨하게 풀지 않으면서도 얼마간 표현의 자유와 심지어 서방 팝 음악을 개방할 만큼 충분히 개화되어 있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 결과 1956년에 가장 반항적이었던 헝가리는 소련 위성국 중에서 정치적 반체제가 거의 없는 가장 만족스러운 나라가 되었다. 
폴란드는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의 지도하에 1956년에 개혁을 포용할 것 같은 상태에서 고집스러운 정통으로 굳어버렸고 그 과정에서 많은 국민을 소외시킨 체제의 고전적 사례가 되어버렸다. (496-497쪽)


푸틴은 왜 크림 반도를 합병한 데 더하여 우크라이나에서 전쟁까지 조장했는가? 그의 전략적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가장 간단한 설명이 가장 그럴싸하다. 본질적으로 푸틴은 강대국으로서 러시아가 잃어버린 위신과 위상을 찾으려했다. 
요컨대 러시아는 1990년대 내내 깊은 국가적 굴욕감에 시달리는 강대국이었다. 18세기 이후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는 강대국으로서 러시아의 지위에 필수불가결했다. 
좀 더 폭넓은 이 목표에서 푸틴은 계산을 잘못 했다. 푸틴은 분명한 출구 없이 자신이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촉발했던 힘들과 자기 자신을 묶어버렸다. 진퇴양난에 빠진 푸틴은 러시아를 우크라이나 동부의 수렁에 빠뜨렸고 이런 상황은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었다. 시리아 전쟁은 그에게 세계 무대에서 러시아의 지배적인 역할을 재확립할 기회를 추가로 부여했다. 공산주의 종식 이후에 소련의 국경 밖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러시아의 군사 개입은 푸틴이 세계 강대국으로서 러시아 지배의 회복을 시도하는 새로운 단계이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세계에서 소련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는 징조는 없다. 러시아의 재원만으로는 그렇게 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었다. (995-996쪽)


아마도 환상의 불과한, 유럽 정체성 찾기는 유럽 국민국가들의 시민이 개별국가에서 평화, 자유,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법치라는 공통의 핵심적 유럽 원리를 옹호하는데 헌신하는 한, 또한 이 헌신을 뒷받침하는 물질적 복지수준을 유지하고 가능한 곳마다 적극적 협력과 친선의 유대를 강화하는데 헌신하는 한, 필요가 없다. (1018쪽)

유럽의 합동 군사력을 부활하려는 시도가 조심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유럽연합의 외교안보 고위대표가 소유하고 있는 권한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진 유럽 외무장관이 아마도 때맞춰 나타낼 것이다. (10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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