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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극우파들

딸기21 2022. 4. 23.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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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극우파들

장 이브 카뮈, 니콜라 르부르. 은정 펠스너 옮김. 한울.

 

 

출판사가 한울... 딱 한울스러운 책이다. 진지하고 빡빡하다.

근래 읽은 가장 재미난 책. 읽는 동안, 그리고 다 읽고 나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생각할 것들이 많아서. 얼른 정리해야지 했는데 게으름 피우다 보니 어느 새 생각은 익는 것이 아니라 쉬어버렸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조차 뒤죽박죽이 돼버렸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그 자신 파시스트적 면모가 갈수록 강해지고 있는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탈나치화'하겠다고 했다. 네오나치스러운 유럽 극우파들은 러시아에 맞서 우크라이나를 편들며 집결하고 있다. 프랑스 대선에서는 르펜이 결선에 진출했다. 파시즘도, 나치도, 극우파도, 모두모두 혼란스러운 개념들이며 현실에서 표출되는 모양들도 가지가지로 혼란스럽다.

 

프랑스 학자들이 쓴 이 책은 프랑스 혁명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럽 극우주의의 계보를 통해 그 혼란스러운 개념의 역사적 궤도를 추적한다. 이 개념은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어느 하나도 한 문단 혹은 한 챕터,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되기 힘들다. 따라서 책을 다 읽는다고 해서 극우주의의 개념과 역사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어지러움을 쫓아가는 것 자체가, 이 개념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것인지를 보고 파악하는 과정이 된다.

 

극우주의는 서유럽 정치권에서 사용되는 분석 개념으로 한정되며 엄밀히 말해 이 개념에 속하는 단체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원네이션 당과 미국의 몇몇 소수 단체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를 그리워 하는 남아공의 몇몇 단체들(자유전선, 민족재건당)이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반동적, 성직자 지지주의적 독재자들인 우두머리(caudillistes, 칠레의 피노체트나 아르헨티나의 비델라)들은 이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폴란드의 공화국자주당Samobroona, 라트비아의 조국자유당LNNK, 세르비아의 급진당SRS 등은 서유럽 극우주의 단체보다는 1930년대 독립운동과 함께 부각되었던 민족주의적 전체주의와 비슷한 성향을 지닌다. 
(15-16쪽)

극우주의 추종자들은 자신을 '민족주의자'라고 지칭하지 않고 '애국자'라고 지칭한다. 또한 그들은 1820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해 계속 모호한 의미로 사용됐던 '사회주의'라는 단어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두 개의 이념을 토대로 생성됐는데 첫번째는 사회주의혁명 사조로서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 사조를 대변한다. 두 번째는 안토니오 라브리올라가 이끈 혁명주의적 노동조합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노동조합운동의 사조는 1902-1918년에 사회주의 정당에서 점차 멀어져서 민족주의 노선으로 분리돼 나갔다. 독일의 많은 극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솔리니도 조르주 소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3쪽)

1917년 러시아혁명은 혁명조직이 어떻게 권력을 쟁취하는지에 대한 본보기를 제시했으며,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10월 혁명의 교훈을 우익적으로 적용한 예"라고 볼 수 있다. 모든 국가의 혁명가들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수립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는데 러시아의 볼셰비즘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그 예이다. 그러므로 극우주의는 '혁명을 위한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며, 이는 사회주의적 나치 독일을 건설하기 위함이다.
극우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는 언제나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를 방어할 수 있는 일종의 구제책이었다. 극우주의 이념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혼합될 수 있었던 것은 보불전쟁과 1차 대전 사이에 프랑스와 유럽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24쪽)

 

왜 국가'사회주의'였을까. 사회주의라는 말의 다면적인 쓰임새는 늘 혼란스러웠는데, 책을 읽다 보니 좀 감이 잡히는 듯도. 좌와 우로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 그보다는 얼마나 급진적인지(극단적인지)를 가지고 구분하는 게 나을 정치운동들.

 

대중은 산업 혁명을 통해 구축된 생산 체제 안에서, 그리고 보통선거의 일반화로 활성화 된 정치적 논쟁의 장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880년대 공화정이 공고했던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사상의 교환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이것은 새로운 우익을 탄생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좌익에서 우익으로 이데올로기적 변환을 감행한 첫 번째 사조가 바로 민족주의이다. 
사회주의적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는 평생을 감옥과 음모론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지냈다. 블랑키즘의 특징은 봉기와 폭동을 부추긴다는데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라고 주장함으로써 민족주의와의 결별을 분명히 했다. 드레퓌스 사건과 푸르미Fourmies 학살로 인해 좌익 진영의 반군사주의적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26-27쪽)

반애국주의자 선봉에 섰던 귀스타브 에르베는 1914년 사상을 전환하면서 '성스러운 연맹Union Sacrée'에 동참했다. 그후 블랑키와 프루동의 영향을 받아 1920년대에 평화주의자가 되었다가 1932년에 파시스트 집단에 동참했다. 에르베 인생에 대한 간단한 소개로 오늘날 상당히 혼란스럽게 보이는 그 시대 사상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에르베의 행적이 1870년 이후부터 1918년에 이르는 사상적 흐름을 정확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사상적 전환이 급격하게 이루어진 시기다. 반유대주의는 좌익 진영의 프루동이나 로슈포르 같은 사람들의 환심을 얻었으며 민족주의자들의 신조가 되었다.
(28쪽)

 

민족적 포퓰리즘은 프랑스 극우주의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국민전선이 1980년대 선거에서 선전하면서 부각되었다. 아무리 미사여구로 치장한다 해도 그들이 원하는 것은 국가에 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모든 종류의 방해자 계층을 제거하고 국가를 통합하는 것이다. 이는 곧 계급투쟁 이데올로기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한다.
민족적 포퓰리즘에서 대중은 정치적 통합체로서의 시민demos, 생물학적 통합체인 민족ethnos, 그리고 사회의 몸통을 이루는 대중계급classes populaires, 마지막으로 최하층민plèbe이라는 개념으로 나뉜다.
민족적 포퓰리즘을 표방하는 극우주의는 앞의 세 개념을 사용에 '민족의 최우선 과제'가 사회적, 민족적, 정치적 대중을 통일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최하층민은 지도자에게 굴복해야만 하는 계층이다. 기생충 같은 부류가 제거될 때 대중은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될 수 있다.
이러한 민족적 포퓰리즘이 프랑스에 뿌리를 내린지 130년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민족적 포퓰리즘을 프랑스 극우주의 역사에서 떼어나 나치주의 이미지와 결부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족적 포퓰리즘을 프랑스 역사와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프랑스의 정치 시스템의 일부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31쪽)

 

1970년대에 이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정당들이 유럽 전역에서 설립됐다. 이들은 다음의 세 요소에서 원동력을 얻어 확산될 수 있었다. 사회복지국가 형태와 거의 몰수에 가까운 세금 징수에 대한 거부, 비유럽인으로 구별되는 이민자 문제에서 파생된 외국인 혐오증, 마지막으로 1973년 오일쇼크로 각인된 2차 대전 이후의 경제 성장 전망에 대한 비관이다.
첫 번째 요소를 대변하는 정당은 모겐스 글리스트루프가 이끄는 덴마크진보당과 노르웨이의 안더스 랑어당이다. 민족적 포퓰리즘에 속하는 프랑스의 국민전선은 1983~1994년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의 외르크 하이더가 이끄는 오스트리아자유당은 1986년부터 꾸준히 세력을 확장해 1999년에 전성기를 맞았다. 같은 시기에 벨기에의 플랑드르블록도 점점 입지를 강화해나갔다.
(31~32쪽)

 

극우주의자들의 전략적 변화는 지정학적 질서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1870년, 1918년, 1941년, 1962년, 2001년에 지정학적, 극우주의 전략적 변화가 동시에 일어났다. 극우주의는 세계화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가 변질돼 가는 것에 대한 적대적 반응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64쪽)

1945년 이후에 활동하고 있는 유럽 극우주의는 크게 네 종류의 극우 정당으로 나눌 수 있다. 1945~1955년에 활동했던 첫 번째 극우주의 정당은 1930년대 전체주의에 상당히 근접한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며 종종 '신파시스트'라 불린다. 1950 년대 등장한 두 번째 부류는 급진적 중산층 운동에 속한다. 1980~2001년에 세 번째 물결이 나타났는데 많은 학자들은 이들을 민족주의적 포퓰리스트로 규정한다. 9.11 이후 '문명의 위기'라는 개념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면서 네 번째 물결이 일어났다. (70쪽)

최근 극우주의의 등장은 1930년대의 상황과 전혀 유사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2008년 경제위기에 대한 반응도 아니었다. 지난 40년 동안 대서양 양쪽 지역에서 우경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와 인류 평등주의의 붕괴와 관련이 있으며, 국가의 형사적 성격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회문제를 민족화하는 경향 속에 진행되고 있다. 즉 이러한 경향은 경제적 세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가운데 기존의 생활양식이 점차 분화하고 급격하게 변동하는 데 대한 일종의 반응으로 나타나고 있다. 
(79쪽)

 

오늘날 활동하는 급진주의 단체들이 모두 파시스트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20세기 급진적 극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플랑드르의 이익Vlaams Belang'의 민족주의는 요리스 판 세베런의 대네덜란드 민족동맹연합 Verdinaso에 기초하며, 영토 확장주의와 철저한 반헝가리주의, 반유대주의와 반집시주의를 주장하는 대루마니아당Fomania Mare은 철위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철위대는 알렉산드르 쿠자Alexandre Cuza 교수와 그의 정당인 민족민주주의 정당의 영향을 받았다. 쿠자 교수는 1919년부터 반유대주의를 신조로 삼은 사람이다.
현재 헝가리의 민족주의를 이해하려면 호르티 섭정시대의 반동적 정권과 페렌츠 살러시의 화살십자당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안테 파벨리치의 우스타샤 운동과 우익당의 이데올로기와의 연관성을 검토해야 한다. 우익정당의 이데올로기는 이 당의 이론가였던 밀란 슈플라이가 두 전쟁들 사이에 발전시킨 이론에 근거한다.
(65-66쪽)

독일의 '뉴라이트'는 주간지 '융에 프라이하이트(청년자유)'와 그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 비엔나의 '추어차이트(현재)'를 통해 '독일민족적' 성향을 보여주며, 이탈리아의 '뉴라이트'는 정치학자 마르코 타르키와 함께 베를루스코니의 우익정당과 국민동맹의 미국 우상주의를 강하게 비판한다. 스페인의 '뉴라이트'는 가톨릭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 잡지 '헤리페리데스'를 통해 국민당에 협력하고 있다. 벨기에의 로베르 스퇴케가 이끄는 유럽공조는 이슬람에 강력한 적대감을 지닌 알렉산드르 두긴의 신유라시아주의 사상을 강조한다.
(70쪽)

오늘날 언론이나 정치가들로부터 신나치주의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단체들은 1930-40년대 독일 민족적 사회주의나 이탈리아 파시즘과 연관돼 있다고 볼 수 있다. 폴란드의 폴란드민족부활Narodowe odorodzenie Polski은 1934년 창설된 급진민족진영Obóz Narodowo-Radykalny과 연관돼 있으며 헝가리의 요비크(개혁운동)는 화살십자당의 연장이다. 크로아티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의 신나치주의 단체들도 뿌리를 소속 국가의 파시즘에 두고 있다. 
(83쪽)


그놈의 우스타샤... 그놈의 두긴....

 

1946년에 창당된 이탈리아사회운동 MSI은 형식적으로 나치 친위대의 허수아비였던 살로공화국(무솔리니의 망명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주장한다. MSI는 '무솔리니 당신은 영원하다 Mussolini Sei Immortale'의 약자다. 오랫동안 이 정당은 유럽 극우주의의 선두주자 역할을 해왔다. 
이탈리아 신파시스트들은 국가전복과 대항 국가전복(국가의 억압정책을 지지)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한 예로 혁명행동단체 Gruppi d'Azione Rivoluzionaria는 1945-47년 활동한 파시스트 민병대였지만 전직 나치보안대 SD의 보호 아래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미국 CIA가 조직한 '로스앤젤레스' 조직망을 구성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또 이 단체의 많은 요원들은 스테파노 델레 키아이에가 이끄는 민족선봉Avanguardia Nazionale에 합류해 '긴장고조 전략'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 전략은 밀라노 퐁타나 광장 테러(1969), 볼로냐 기차역 테러(1980)를 감행해 이탈리아 전역을 공포에 휩싸이게 만든 테러 전략이었다.
(90-91쪽)

1956년 피노 라우티는 일반적으로 신질서Ordine Nuovo라 불리는 신질서장학센터를 설립했다. 이탈리아 신질서는 유럽신질서뿐 아니라 비밀군사조직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한 동맹을 맺으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전략은 1965년과 1968년 두 번에 걸친 그리스 독재자와의 만남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신질서라는 명칭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92쪽)

이탈리아 5월혁명(1968) 때 이탈리아사회운동 지도자 조르조 알미란테는 핵심적 반공산주의자 세력을 규합했으며 이를 통해 이탈리아사회운동은 선거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72년 선거에서 '민족 극우'로 자리잡게 됐다. 알미란테는 프랑스 신파시스트 단체인 신질서(1969년 창립)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 단체는 이탈리아사회운동을 모델로 1972년 국민전선을 창당했다. 
그런데 이탈리아사회운동은 1995년 전당대회에서 잔프랑코 피니가 '후기 파시즘'이라는 개혁을 선포하면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개혁은 단체 이름을 민족동맹 Alleanza Nazionale이라 개칭함으로써 상징적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이런 합법화 노력은 오히려 세력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94쪽)

 

이탈리아 현대 정치운동은 참 알다가도 모를... 

 

그리고 국민전선.

 

르펜 정당은 스위스 정치사회학자들이 만들어낸 개념인 '지붕조직'의 전형적인 예이다. 지붕조직은 회원들의 이중 소속을 허용하고 그들의 잦은 이동을 통해 현존하는 모든 단체를 흡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65쪽)

1990년대에 이미 막강한 세력을 얻은 국민전선은 민족을 토대로 한 국가 개념을 아주 분명하게 정당의 근본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그런데 국민전선은 2010년 선거에서 기존 전략을 변경하고 표준화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또 다시 성공을 거두었다.
분명하게 장 마리 르펜은 반의회주의와 포퓰리즘적 감성을 혼합해 사회 질서를 완전히 전복시켜 재편성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동시에 국민전선은 후기 산업시대 정당의 특성도 가지고 있다. 즉 선거라는 수단을 통해 합법적으로 세력을 얻고자 하는 정당이다.
(70쪽)

국민전선은 전쟁 이전에 활동했던 파시스트 정당들이나 나치 동조자들과 아무런 유사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역사학자 에밀리오 젠틀레가 규정한 무솔리니 정권의 파시즘적 특성을 기준으로 하면 국민전선도 파시즘을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젠틀레를 따르면 파시즘은 이념이라기보다 끝없는 투쟁을 의미한다.
젠틀레의 규정을 통해 분석해 보면 "국민전선은 대중운동이 아니다. 민간 의병대 형식을 통해 조직된 정당도 아니다."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테러'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또한 '국가에 대한 시민의 완전한 종속'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국민전선이 파시스트 운동 단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국민전선이 가지고 있는 파시즘적 특징들이 다른 극우주의 단체들에서도 동시에 나타난다.
(71-72쪽)

국민전선은 오랫동안 팽창과 분열을 거듭하면서 살아남았으며 프랑스 극우주의의 상이한 단체들을 하나로 묶는데 성공했다. 그 단체들은 분열을 극복하고 국민전선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들이야말로 1789년 프랑스 혁명, 드레퓌스 사건, 해방, 식민제국의 손실 등 프랑스 역사의 큰 획을 긋는 모든 중대한 사건의 패배자였던 것이다.
(74쪽)

 

"사르코지는 2007년 선거에서 '노동 가치'라는 테마를 내세워 장 마리 르펜의 지지자들을 유인하는데 성공했으나 2012년 선거에서 정체성, 이민, 이슬람 문제를 내세우면서 르펜의 딸에게 유권자들을 다시금 빼앗겼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선거에서 표의 재분배는 단순히 중도적 입장을 취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264쪽)라는 지적은 정말이지 한국의 진보를 자처하는 정당/정당들에 소리쳐주고 싶은.

 

'유라프리카 사상'은 매우 신박함.

 

1921년에 처음으로 등장한 유라프리카라는 개념은 주로 프랑스 정치권에서 많이 논의됐다. 무솔리니가 변조한 이탈리아의 유라프리카 개념은 계속해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유라프리카론을 주장했던 이론가는 이탈리아의 에르네스토 마시Ernesto Massi였는데 그는 유명한 지리학자였으며 파시스트 국가와 이탈리아사회운동의 이론에 정통한 학자였다. 그는 독일의 보수 혁명주의적 계통의 학자인 지정학의 대부 카를 하우스호퍼의 이론들을 이탈리아의 전파한 사람이기도 하다. 하우스호퍼는 대중의 생동적인 생활공간을 보장하는 거대한 정치적 공간에 대한 사상을 이론화한 사람이다. 유라프리카 세상은 제국주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파시스트들의 에티오피아 침공 이후 경계선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는 토대가 되었다.
(100-101쪽)

영국 노동부 장관을 지냈고 영국 파시스트연합의 지도자였던 오즈월드 모즐리 경은 영국에서 연합운동Union Movement을 설립했다. 연합운동은 유럽을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3분의 1을 지배하게 될 제3의 세력으로 간주했다.
(100쪽)

모즐리의 사상들은 개인의 몽상에 그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직 장관이었으며 나치에 우호적이었던 오즈월드 피로 Oswald Pirow는 모즐리 경과 접촉하면서 그의 사상을 공유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시작된 1948년에 모즐리 경과 피로는 유라프리카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안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3분의 1을 백인이 통치하고 나머지 3분의 1을 원주민인 흑인들에게 맡기자는 계획이었다. 아프리카 문제는 1948년 브뤼셀 조약에서도 화두에 올랐으며 1954년 프랑수아 미테랑은 유라프리카 논의를 다시 거론하기 시작했다.
(102쪽)

모즐리는 인종 간의 결합을 배제하는 유라프리카의 실현을 꿈꿨다. 그에 의하면 유라프리카는 아프리카의 영혼과 유럽의 영혼을 파괴하지 않는 철저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그가 구상하는 유라프리카는 당연히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지만 남아메리카에 대한 지배는 미국과 공유해야 한다. 반면 아랍 국가들은 유라프리카와 소비에트연방 사이를 중재하는 완충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103쪽)

 

지랄이 풍년이네...

 

현대 유럽의 급진적 극우주의는 전체적으로 볼 때 통일된 정치 계열이라기보다 일종의 변두리 집단의 저항문화나 하위문화다. 여기서 하위문화는 경멸적 의미가 아니라 사회학자들이 사용하는 소수문화의 개념이다.
(65쪽)

'메타정치'는 일종의 문화적 투쟁이다. 오스트리아의 빌헬름 란디히Wilhelm Landig는 파시즘을 새롭게 포장해 일종의 정치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하나의 '세계 비전'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소설 <신비한 역사>에서 나치주의를 특정한 신화들과 혼합해 소개했다. 그의 작품들을 통해 일부 대중은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 부정주의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미겔 세라노는 비교주의적인 나치주의를 주장한 이론가이다. 그는 독일 나치들이 남미로 도주하면서 사용했다는 미확인비행물체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사비트리 데비Savitri Devi는 힌두 전통에 히틀러주의를 접목했다. 영국인 데이비드 마이엇의 나치 악마주의도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비교주의적 나치주의는 나치 독일과 인종주의 정책보다 주변 요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제한적이긴 하지만 대중의 거부감을 줄일 수 있었다. 이들은 '대체' 영성에 심취한 사람들이었으며, 음모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는 이질적 요소들이 혼합되는 포스트모던적 현상과 일치한다.
유럽의 나치 친위대 분대들이 사용했던 '룬 문자'는 현재 급진주의자들의 팸플릿이나 로고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황금새벽은 이따금 나치 깃발을 사용했는데, 이 깃발에는 나치의 만자무늬가 룬문자로 대치됐다. 이 룬문자는 네덜란드 란드스톰 나치친위대 분대가 사용했던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의 스보보다 민족주의 정당은 나치 독일 분대가 사용한 상징을 변환해서 사용하고 있다.
(111-112쪽)

유럽신질서NOE에 의해 작성된 사회인종주의 선언문Manifeste social-raciste(1971)은 신나치주의 단체들이 참고로 삼는 주요 문서 중 하나다. (84쪽)

유럽신질서의 지부들이 늘어남에 따라 조직 내에서 유럽이라는 개념과 백인 우월주의가 접목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지부들은 터키에도 세워졌는데 터키 파시스트들은 터키 민족이 아리아 인종의 분파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념은 두긴의 제국주의적 신우익주의에서도 발견된다.
(113쪽)

유럽스페인동지모임은 1977년 미국인 프랜시스 파커 요키가 저술한 <절대주권>을 번역했다. 유럽스페인동지모임이 교과서로 여긴 책이다. 이 단체는 바그너적 심미주의에 심취해 있었고 환경보호와 지방분권주의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단체들과 구별됐다. 이 모임은 프랑스 남동부에 본부를 둔 유럽동지환경연합으로 전환됐다.1970년대 후반부터 독일 민족주의적 혁명주의자들도 환경운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스페인의 급진적 극우주의는 환경보호주의와 동물보호주의 단체를 조직하는 전문성을 지니게 되었다. 
(123쪽)

대중화와 계급주의를 강조한 파시즘이 산업사회의 산물이라면 신파시즘은 포스트모던주의 사회의 문제로 생겨난 이념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신파시스트주의 운동단체들의 국제화 실패는 다른 관점에서 분석돼야 한다. 산업화 시대에 정치적으로 합당했던 국제화 모델의 효율성은 산업화 시대 이후에 더 이상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에는 상징들과 방법론, 전문용어들과 아이디어들이 교환되는 조직망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결국 신파시즘은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조잡한 형이상학으로 치부되고 있으며 핵심 이데올로기인 백인 우월주의는 조잡함의 정도가 심하다고 볼 수 있다. 
(136쪽)

미국의 게리 렉스 로크Gary Rex Lauck는 아주 철저한 기업가적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광신적 종교집단의 전형적인 지도자 타입이었다. 그가 설립한 독일민족사회주의노동당 해외지부 NSDAP-AO는 나치의 프로파간다를 12개국 언어로 번역해 수출하는 회사였다. 이런 서적들은 유럽에서는 판매금지 처분을 당했으나 미국에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보장 때문에 판매가 가능했고 그들의 웹사이트는 신나치주의의 성지가 되었다. 
미국민족사회주의운동ANSM의 제프 슈엡Jeff Schoepp은 특히 젊은 스킨헤드를 끌어들이기 위해 인터넷을 통해 '백인 파워White Power' 음악을 제공하고 비디오게임과 옷을 판매하는 사업을 신설했다.
그들이 표방하는 신나치주의는 정치적인 현상이라기보다 문화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문화현상으로서의 신나치주의는 일부 청년들의 자기표현 방식으로서 사회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모방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141-142쪽)

일부 청년들의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신나치주의는 1960년대 이후 청년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서구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계급적 인종주의가 백인 우월주의로 대체된 것이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사항은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과 같이 유대인을 백인종에서 제외시키는 것이다. 
(143쪽)

 

이 책을 번역하신 분은 '~적'과 '~주의'를 너무 많이 쓰는 주의주의적 주의주의자인 듯.

 

백인파워 이념은 스킨헤드의 사회적, 문화적 현상의 토대가 됐다. 스킨헤드 운동은 1960년대 말 영국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변두리 지역에서 처음 일어났다. 이 운동은 후기산업주의 시대의 유일한 프롤레타리아 극우주의 운동이었다.
스킨헤드 운동은 후기산업주의 사회의 특징과 폭력이 일상화되는 전형적인 운동에 속한다. 영국 변두리의 극우주의자들은 좌파들의 표현을 빌리지 않고 자신들만의 힘으로 사회 문제를 이슈화하는 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스킨헤드의 옷차림은 스스로를 주변화하는 사회집단의 상징이 되었다. 
초기 스킨헤드는 1960년대 청년 문화 속에서 발생했다. 파키스탄 이민자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지만 그것은 깡패 집단들끼리의 싸움이었을 뿐이며 결코 정치적인 성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스킨헤드 운동은 몇 년 동안 잠잠하다가 1977년에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는데 바로 펑크족에 등장하면서부터이다. 펑크족 몇몇이 펑크록을 급진화하면서 폭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도구를 얻었기 때문이다.
(144-145쪽)

스킨헤드 운동에 사회적 정치적 성향이 부가된 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와해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와해가 국경의 소멸과 동시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스킨헤드 운동은 저항 없이 다른 국가들로 확산되었다. 스킨헤드 운동이 급진적 극우주의 성향을 가지게 된 것은 1983~1986년이다. 스킨헤드의 급진화는 프랑스, 그리스, 헝가리 등에서 진행되었으며 1989년에는 동유럽의 체코, 루마니아 등으로 번져나갔다. 발트해 국가의 스킨헤드 운동은 1980년대부터 시작됐는데 이는 러시아에 대항하는 애국주의 때문이다.
러시아 스킨헤드는 1996년 경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정체가 불분명한 러시아 민족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독일과 미국 민족주의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제까지 활동했던 스킨헤드와는 전혀 다른 규모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스킨헤드는 약 5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으며 2006년에 있었던 반체첸 폭동에 2000명의 폭도들을 동원하는 위력을 과시했다.
(146-147쪽)

2011년 이후 국가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신나치주의 단체들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러시아민족연합Russkoe natsionalnoe yedinstvo, 슬라브연합 Slavianski Soyouz 등의 이데올로기에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와 정통 근본주의, 서방 증오주의가 뒤섞여 있다. 서방 증오주의는 정통 히틀러주의는 아니지만 비러시아인에 대한 살인을 정당화할 만큼의 파급효과를 지닌다. 비러시아인 중 특히 캅카스인과 아시아 사람들이 증오 대상이 되고 있다. 
(87쪽)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휘두르는 폭력과 공격적인 이념 이면에 숨어있는 현상들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폭력적 행동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대중의 위선적 행동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1992년 8월 말 독일 로스토크에서 스킨헤드가 외국인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자 구경꾼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진압 경찰들도 이런 행위를 방관했다. 
(152쪽)

 

포퓰리즘은 사회계층의 이해관계와 상관 없이 선거 때마다 정책과 이데올로기를 상황에 맞게 바꾸는 대응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있으며 바로 이러한 전략 때문에 포퓰리즘 정당들은 점점 우익화되고 있다.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는 19세기 우익과 좌익의 대립을 경험하지 않은 러시아와 미국에서 등장했으며 2차 대전 이후에 아랍 민족주의 정권과 남미 민족주의 정권의 등장으로 확산됐다. 포퓰리즘은 여러 이념의 혼합을 통해 발전해왔다. 전체주의가 배제된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숭배, 합법적 위계 질서 안에서 여러 사회계층의 결합, 과두제를 거부하는 국가에 대한 지지, 그리고 제국주의적 성격을 배제한 민족주의 등이다. 그런데 실제로 포퓰리즘적 성격을 가진 정당이 선거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북유럽에서였다.
2001년 이후에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이 신포퓰리즘으로 전환되면서 역설적인 상황이 최고점에 이르렀다. 극우 진영 내에서 자유주의 가치에 대한 주장이 확장되기 시작했고 복지국가에 대한 비판은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되었다.
(245-246쪽)

정책이나 경제개혁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민 문제와 다문화주의에 대한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반체제적 성격을 유지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이슈화하는 가장 대표적인 정당은 핀란드의 핀인당이다. 핀인당은 반체제적이며 유럽연합에 비판적이고 반이민 정책을 지지하지만 급진적 성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핀인당은 사회계층적으로 기독교 보수주의에 속하며 이념적으로 중도좌파에 속하고 소시민의 대변인을 자처한다. 그들의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이민을 막고 다문화주의를 사회적 위험 요소로 경계하며 난민의 권리와 개발원조 비용을 최소화한다.
핀인당은 2015년 선거에서 높은 득표로 다른 두 정당과 함께 우익 연정을 구성했다. 유럽연합을 거부하는 당의 민족주의적 이념은 그리스 구제를 거부하자는 주장으로 표출되었다. 핀인당은 연정에 참가한 사실과 유럽 자유주의 이념 사이의 모순을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치와 반이민 정책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이 같은 정책은 다른 유럽 운동단체들의 미래적 지표로 여겨진다.
(259-260쪽)

네덜란드 정치가 핌 포르타윈은 좌익 계열의 지식인으로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공개한 사람이다. 그는 이슬람이 네덜란드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혜성처럼 등장했다. 장 마리 르펜과 하이더에 버금가는 카리스마의 소유자였으며 엘리트를 공격하고 자신의 동성애를 공개함으로써 스스로를 이슬람에 대항해 자유를 수호하는 진보주의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포르타윈은 2002년 급진적 좌익주의자에게 살해되었으며 지도자를 잃은 핌 포르타윈 리스트는 결국 살아남지 못하고 해체됐다.
핌 포르타윈 리스트의 생성과 소멸 과정은 새로운 정치적 전략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 당의 전략은 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과장하는 '안전 지상주의'로 요약될 수 있다. 무슬림에 대한 비판은 기독교 보수주의 이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성들, 동성애자들과 유대인들에 의해 쟁취된 자유를 방어해야 한다는 논쟁 속에서 일어났다.
(269~270쪽)

헤이르트 빌더르스는 미국 신보수주의 진영과 연결된 네덜란드의 정치인이다. 유럽연합을 나치 국가에 비유하면서 거부하고 이슬람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그는 극우주의자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비유럽인 이민자에 대한 적개심을 증폭시켰으며 국가권력을 축소하는 전략 속에서 이민 문제를 계속 이슈화했지만 스스로 네덜란드의 '보통 사람'이라고 하면서 정년퇴직 연령을 늘리는 문제와 연금 축소 문제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는 할랄과 코셔 전통에 근거한 도살과 미나레트 건설, 이중국적, 새로운 회교 사원의 건설과 코란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 이외의 전략들은 대중과 엘리트 사이의 대립구도를 중심으로 전개했다. 특권층에 대한 거부, 도덕적 가치와 권위의 부활, 안전문제의 강조, 대중이 발의하는 국민투표제 도입 등이다.
(271쪽)

이스라엘에는 극우주의를 표방하는 여러 정당과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인종적 민족주의를 기본이념으로 삼고 있으며 폭력의 사용을 허용하고 민주주의를 경멸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극우주의 정당들이 가지고 있는 유대성에 대한 개념이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아비그도르 리베르만이 이끄는 이스라엘 베이테누는 비종교적인 정당이며 반면 민족연맹Ihoud HLeumi은 민족적 종교적 시온주의와 비종교적 민족주의를 혼합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고 민족의 이동을 적극 권장한다.
2000년 이후에 조직된 자기방어라고 불리는 단체들은 대부분 비종교적 유대인 단체에 속한다. 예를 들면 유대인 방어동맹은 리쿠드 청년당 베타르Betar에서 탈퇴한 비종교적 활동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정통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 모두 시온주의자들인 것도 아니다.
(235쪽)

르펜주의를 모방하려는 여러 나라들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카탈루냐 지방의 독립운동과 맞물려 스페인의 이민자 문제가 확대되자 2003년에 카탈루냐에서 민족의 정체성과 이슬람 혐오주의를 강조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바로 '카탈루냐를 위한 플랫폼'이다. 하지만 이들은 선거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첫번째로 민주주의 전환 과정의 말기에 창당된 국민당이 온건한 프랑코주의자들을 모두 수용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차단했다. 두번째로 프랑코 체제하에서의 경험과 바스크 및 카탈루냐 지방에 대한 억압의 기억은 극우주의자들이 자체 운동조직을 구성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독일은 민족주의적 포퓰리즘 실패한 또 하나의 예이다. 독일도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대한 생생한 기억과 강력한 보수 정당의 존재가 실패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256쪽)

포퓰리스트들의 성공과 실패는 다문화 사회의 갈등으로만 설명할 수 없으며 지난 몇십년 동안 대중의 교육 수준이 월등히 높아지면서 정치에 대한 참여도 높아졌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평등이나 자유의 문제가 더 이상 대중의 정치화를 촉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 내에서 동질감을 느끼기 위해, 다시 말하면 공통분모를 가지는 사람들과 일체감을 느끼려는 욕구가 대중을 정치화하고 있다.
(282쪽)

 

하이더와 오스트리아자유당 등에 대한 설명은 번역의 문제인지 의회진출, 연정구성 연도 등이 뒤죽박죽이네...

 

암튼 다시, 러시아와 두긴으로.

 

후기 소비에트연방 시대의 극우주의적 민족주의는 제정 시대와 공산주의 시대의 역사적 단절을 극복하는 러시아의 유일무이한 소명에 대한 지정학적 이념과 관련된다. 핵심 이데올로기는 알렉산드르 두긴의 신유라시아주의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두긴은 동양과 서양의 중심이라는 위치 때문에 러시아를 특별한 문명사회로 간주하는 초기의 유라시아주의와 뉴라이트의 이념,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의 주장과 1920-30년대 독일의 지정학적 사상의 유산을 혼합시켰다. 두긴의 이론은 경제적, 정치적 공간을 재구성하려는 푸틴의 아이디어에 토대를 제공했다. 푸틴이 꿈꾸는 유라시아 경제 연합은 벨라루스에서 키르기스스탄에 이르며 유라시아주의적 사상을 국가 이념으로 삼는 카자흐스탄도 포함한다.
(288-289쪽)

1988-1989년부터 서유럽 뉴라이트 운동단체와 자주 접촉했던 두긴은 반서구적 성격의 거대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러시아의 소비에트주의와 독일의 극단적 민족주의를 혼합했다. 그의 유라시아 개념 안에는 소비에트연방에 속했던 국가들뿐 아니라 중국, 인도, 터키, 발트해 국가들이 포함된다. 후기 소비에트연방 시대의 러시아에서 사용되는 유라시아 개념은 슬라브족과 터키 무슬림이 공존하는 공간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이 공간을 통제하는 자가 세계의 통치자가 될 것이며 통일된 문화적 정체성을 대변하게 될 것이다. 이 문화적 정체성은 한편으로 기독교 동방정교회와 이슬람 영적 가치의 첨예한 대립 가운데 형성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물질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퇴폐적인 서구적 가치 위에(오역인 듯;;) 확립될 것이다. 
(292-293쪽)

러시아의 민족주의는 정교회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러시아는 불경건하고 물질주의적이며 퇴락의 길을 걷고 있는 대서양 세력에 맞서 '진정한 신앙'에 근거한 극단적, 보수주의적 가치를 보존해야만 하는 운명을 다시 확인하는 중이다. 이런 관점에서 정교회는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에서 일으킨 분쟁을 정당화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 
(302쪽)

2012년 두긴은 대통령 측근들과 정교회 고위층, 그리고 조국당과 교류했던 사람들과 함께 클럽 이즈보르스키를 설립했다. 하지만 이 클럽 회원들은 대러시아와 유라시아 개념의 토대인 다민족주의에 쉽게 동조하지 않았다.
두긴은 새 질서의 출현을 앞당기기 위해 2012년 이후부터 우크라이나를 침략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또 대서양 블록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유럽 내의 모든 극우주의 운동단체를 아낌없이 지원해야 하며, 전통적 가치를 보전하고 문화적 자유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07쪽)

러시아 정치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두긴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두긴은 푸틴의 측근도 아니고 푸틴의 견해를 좌지우지하는 인물도 아니다. 하지만 두긴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미 중앙정보국은 2015년 3월 우크라이나 사태의 배후조종자로 두긴을 지목했다. 두긴은 유럽의 두 종류의 급진주의적 사상을 매개하는 인물이며, 동시에 러시아의 운명에 관해 러시아의 대다수 대중이 열망하는 사상의 대변자이기도 하다.
(312쪽)

민족연합, 국제유라시아운동 등 친러시아 단체들의 지국이 우크라이나에 계속 남아서 활동하고 있었고 2005년 두긴의 제자들이 세운 도네츠크공화국 같은 특수한 단체들도 계속 존속하고 있었다. 이 단체는 2014년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선언했으며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으로 명칭을 바꿨다.
(316쪽)

신유라시아주의는 유럽의 급진적 극우주의자들에게 지정학적 개념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두긴과 교류하고 있는 헝가리의 요비크는 거대한 우랄알타이어 연맹을 꿈꾸는 자들과 이상을 같이한다. 이러한 연맹에 속하는 나라로 중앙아시아 국가들, 러시아, 이란, 터키가 있다. 
(308쪽)

 

"푸틴이 민족주의 정치진영과 교통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카이사르적 지배방식과 대중적 메시아주의를 연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303쪽)


이 부분은 예전에 썼던 
액션맨 푸틴, 크림반도에 가다 글에서 다뤘던 것.

그런데 번역 진짜.... '교통'과 '연합' 등등, 책 전반에서 어휘 사용 정말이지;; 

 

국민전선의 계속되는 성장은 모스크바에 특별한 의미를 던져줬다. 프랑스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며 독일과 함께 유럽연합의 기둥이기 때문이다. 2012년 사르코지가 선거에서 실패해자 푸틴의 동의를 얻어 러시아 권력의 일부가 프랑스 극우주의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2013년 마린 르펜은 러시아를 둘러보면서 그때 러시아에 합병되지 않았던 크림반도에서부터 일정을 시작했다. 르펜은 모스크바에 도착해 국가두마를 방문하고 부총리인 드미트리 로고진과도 회담을 가졌다. 그녀는 어디를 가든 푸틴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으며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위해 투쟁을 벌이는 러시아를 찬양했다. 러시아의 한 은행은 2014년 9월 국민전선에 900만 유로를 빌려줬으며 조국당 지도층도 국민전선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309~310쪽)

크렘린은 '키예프 권력을 탈취한 파시스트 정권'을 계속 비난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발트해 국가들도 파시즘에 점령당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로고진은 2003년 9월 나치가 라트비아를 장악했다고 비난했다. 
라트비아 문제의 핵심은 국민 다수를 차지하는 라트비아인(57.6%)과 러시아인(39.6%) 사이의 관계에 있다. 라트비아인들은 소비에트연방에 소속됐던 시절을 소비에트라 표현하지 않고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고 표현한다. 1994년 제정된 국적취득법에 의하면 라트비아의 언어, 역사, 법에 관한 시험에 통과해야만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데 10년이 지났는데도 취득한 사람은 7만8540명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라트비아에 사는 20% 가량의 시민은 라트비아 국적자가 아니며 취업에도 많은 제한을 받고 있다.
(317~318쪽)

동유럽의 정치상황은 1940년 이전 정치상황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루마니아에서는 1940년대 이전에 민병대 활동을 했던 용사들이 1990년대에 다시 활동을 시작했고 불가리아에서는 민병대 지도자였던 이반 도체프가 1991년에 활동을 재개했다가 2005년에 생을 마감했다. 슬로바키아에서는 흘린카친위대 지도자였던 알렉산드르 마치가 1968년 출감해 장관직을 지내기도 했다. 이러한 연속성은 폴란드의 기에르티흐 가문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세대를 걸쳐 활동하는 폴란드가족연맹과 같은 당을 헝가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호르티 정권과 헝가리 '정의와 삶의 당'의 관계가 그러하며, 슬로바키아의 흘린카친위대와 슬로바키아민족당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325~326쪽)

동유럽 극우주의 단체들이 뿌리를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원인 중 하나는 주요 정당들의 정책이나 이념에 이미 민족주의와 반집시 정서, 유럽연합을 향한 비판 등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동유럽 정치시스템 안에는 서유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족중심주의 단체가 존재한다. 
(332쪽)

 

동유럽 사람들은 굉장히 오래 사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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