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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 프랑스 대선, 르펜이 저렇게...

딸기21 2022. 4. 8.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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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walk past official campaign posters of French presidential election candidates Marine le Pen, leader of French far-right National Rally (Rassemblement National) party, and French President Emmanuel Macron, candidate for his re-election, displayed on bulletin boards in Paris, France, April 4, 2022. REUTERS

 

10일 프랑스 대선이 실시된다. 후보가 에마뉘엘 마크롱 현 대통령을 포함해 12명. 아마도 과반 득표자는 없을 것 같고, 1차 투표에서 1위와 2위를 차지한 후보가 24일 2라운드 즉 결선에서 맞붙게 된다. 유권자 약 4700만명, 임기 5년, 유럽연합의 주축인 나라. 특히나 유럽이 시끄러운 상황에서 관심은.... 일단 한국에선 별로 없는 것 같다. ㅎㅎ

 

제일 유력한 후보는 마크롱 대통령이다. 정치적 성향은 중도파 리버럴로 분류된다.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사민주의 성향의 좌파와 기독교에 기반을 둔 우파 정당의 대결구도는 깨진지 오래이며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과거 사회당과 공화당으로 나뉘어있던 구도가 희석되고 양당에서 중도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2016년 ‘전진하는 공화국(앙마르셰)’ 정당을 만들었다. 마크롱은 그 정당 이름으로 2017년 대선에 출마해 당선됐고 이번에 재선을 노리고 있다. 

 

주된 경쟁자는 극우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좌파 장 뤼크 멜랑숑, 또 다른 극우파 후보 에릭 제무르, 2000년대 중도우파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 때 장관을 지낸 발레리 페크레스 등이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유럽판 집계를 보니 여론조사 지지율은 마크롱 27%, 르펜 22%, 멜랑숑 16%, 제무르 10%, 페크레스 9% 순이고 나머지는 5%를 밑돈다. 

 

 

마크롱과 르펜의 지지율 차이가 몇 %포인트 안 난다. 압도적인 지지를 얻는 후보는 없고 다들 고만고만한 형편이다. 마크롱 대통령조차 재선을 확신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특히 르펜의 추격이 무섭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마크롱의 지지율은 한때 30%까지 올라갔다가 그 뒤에 주춤한 반면, 르펜은 3월부터 계속 상승세다. 

 

두 사람이 결선에 가면 어떻게 될까. 현재로선 2017년 대선 때의 재판이 되리라는 예측이 많다. 5년 전 대선 때, 1라운드에서 마크롱의 득표율은 24%였고 르펜은 21.3%였다. 당시에는 중도우파 프랑수아 피용이 20%, 좌파 멜랑숑이 19.6%를 얻어서 후보들 간에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결선에서는 중도파와 좌파가 극우파 르펜을 막는 쪽으로 집결해 마크롱이 66%를 얻었고, 르펜은 34%를 얻는 데 그쳐 패했다. 물론 그것도 르펜 쪽에서 보면 놀라운 선전이었지만.

 

미국에서는 '현직 프리미엄'이 많이 작용하지만 프랑스에서는 근래 현직 대통령이 재선된 일이 없다. 1995~2007년 집권한 자크 시라크 이후에 연임에 성공한 대통령이 없었다. 시라크 뒤에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 부패 스캔들로 말이 많았고, 그 뒤를 이은 중도좌파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사생활 스캔들 등으로 엄청 시끄러웠다. 퇴임 때에는 지지율 한자릿수로 물러났다.

 

 

마크롱 역시, 국제무대에서는 존재감이 큰 편인데 국내에선 지지율이 생각보다 낮다. 마크롱은 1977년생, 올해 44세의 젊은 정치인이다. 부잣집 아들이고, 파리 정치대학과 국립행정학교를 졸업했다. 최고 엘리트 과정을 거쳐 투자은행에서 일했다. 공직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정치인 경력은 길지 않았는데 대통령이 된 케이스다. 젊고 개혁적인 이미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 못잖게 금수저 이미지도 강하다. 집권 뒤에 연금개혁 등을 추진하려 했으나 유류세를 올리면서 대대적인 반발에 부딪쳤다. 이른바 ‘노란조끼 시위’가 2018년 거세게 일어났고, 2019년과 2020년에도 산발적으로 반복됐다. '프랑스병'을 고치려는 개혁에 맞선 저항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경제적 사회적 갈등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외부적인 여건도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때 주요7개국(G7) 회의를 프랑스에서 열었지만 미국과 유럽이 대립하던 때라 성과는 적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막기 위해 크렘린까지 찾아가는 등 동분서주했지만 전쟁은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그의 외교 노력은 실패한 셈이 됐다.

 

코로나19 방역을 두고 유럽국들 상황이 대개들 비슷했지만 프랑스 역시 혼란을 거듭했다. 마크롱이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은 프랑스 국민이 아니다"라고까지 목소리를 높이며 단호한 방역을 주도하긴 했으나, 대외적으로 프랑스의 입지를 강화하고 유럽연합 상반기 의장국으로서 우크라이나 사태 등에 발언권을 높인 것에 비하면 국내에서 서민들의 생활과 관련된 정치적 의제들을 놓친 측면이 있다.

 

격렬한 토론을 거부하면서 선거 캠페인도 좀 안일하게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른 후보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판단, 정치적인 난투극을 피하는 전략을 썼던 것으로 현지 언론들은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막판에는 르펜의 상승세에 놀란 눈치이고, 일주일 전 유세에서는 “결과를 확신할 수 없다”며 지지자들에게 투표를 열심히 하라고 촉구했다. 브렉시트를 예로 들면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며 경각심을 일깨웠는데 과연 투표소로 얼마나 향할지. 

 

French President Emmanuel Macron speaks to his Russian counterpart Vladimir Putin at a December 2019 summit. Macron took a leading role in trying to avert war in Ukraine.

 

선거 막바지에 악재를 만나기도 했다. 마크롱 정부가 코로나19 백신 캠페인 등에 미국 컨설팅회사 매킨지를 고용했는데 이 일이 최근에 문제가 된 것이다. 정부가 외국 컨설팅회사를 고용한 것에 곱잖은 시선이 적지 않은데, 매킨지가 세금을 회피했다는 의혹까지 일어서 상원이 조사보고서를 내고 고발했다. 검찰은 대선을 코앞에 두고 세금사기 의혹 예비수사에 들어갔다.

 

마크롱에게 악재가 있었다고는 해도, 극우파 르펜의 부상은 놀랍다. 5년 전에는 결선에서 66 대 34로 마크롱이 압승했지만 현재 여론조사에서는 양자 가상대결시 54% 대 46%로 마크롱과 르펜 지지율 차이가 한자릿수 %포인트로 나온다. 르펜이 엄청 따라잡은 것이다. 매킨지 문제 같은 일이 마크롱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고만 해석하기엔 르펜의 정치력이 훨씬 대단했던 것 같다.

 

유럽 언론들은 대표적인 극우 정치인인 르펜이 지지율을 끌어올린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도 뭐 하루이틀 얘기는 아니지만. 국민전선을 창당한 주역인 르펜의 아버지 장-마리 르펜은 극우 막말로 숱한 문제를 일으켰다. 반유대주의 발언도 서슴지 않았고,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딸 마린 르펜이 2011년부터 당을 이끌면서 이미지를 많이 바꿨다. 당장 아버지부터 내치고, 국민전선을 ‘비악마화’하는 쪽으로 노선을 잡았다. 급진적인 극우파들은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거나 축출하고, 가톨릭 극우파들도 퇴출시키고, 사회복지 정책을 제시하고, 공화국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식으로. 2011년 당권을 잡자마자 이스라엘을 방문하면서 반유대주의 딱지를 뗐고, 당내 여성들을 늘리고, 극우라기보다는 우파 정도로 보이게끔 포지션을 바꿨다. ‘르펜 2.0’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것이다.

 

Marine Le Pen speaks at a campaign event in Reims, France, on February 5.

 

무슬림 이민자들에 대해서는 계속 혐오를 선동했으나, 방법을 미묘하게 바꿨다. 종교 자체를 공격하는게 아니라 이슬람이 남성우월주의이고 동성애를 혐오하며 반유대주의라는 쪽으로 몰아갔다. 혐오주의의 딱지를 극우파 자신들에게서 무슬림 이민자들에게로 넘겨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대도시 외곽으로 밀려난 서민층, 빈곤층의 지지를 얻었다. '과거에는 프랑스 노동계급이 산업사회의 황금기를 누렸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그 이유는 이슬람 이주민 때문이다'라는 논리가 특히 외곽으로 밀려난 서민들에게 먹혀들었다. 게다가 이번 대선에서는 제무르라는 극우파가 국민전선보다 훨씬 더 막말로 혐오를 부추기면서, 르펜이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비춰지는 효과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르펜의 약점이 있었다면 러시아 문제였다. 러시아가 유럽 극우 정당들을 밀어주면서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것은 사실이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친러 정당이 국민전선이었다. 예를 들면 르펜은 2013년 6월에 러시아를 방문했는데 당시 일정을 우크라이나 땅이던 크림반도에서 시작해 모스크바로 이동했다. 모스크바에서는 '유라시아주의'와 팽창주의를 주장해온 인물인 드미트리 로고진 당시 러시아 부총리와 만났다. 

 

르펜은 러시아가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위해 싸우는 거라며 찬양했고, 크렘린의 보호를 받는 시리아 독재정권을 편들었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관한 칭찬을 늘어놓곤 했다. 크림반도 병합으로 러시아가 서방의 제재를 받기 시작한 2014년에 국민전선은 러시아 은행으로부터 900만 유로를 대출받기도 했다.

 

Russian President Vladimir Putin meets Marine Le Pen at the Kremlin in Moscow on March 24, 2017.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에서 르펜의 그런 태도들이 문제가 되고도 남을 법하지만, 르펜은 교묘히 피해갔다. 반대 진영에서는 르펜이 러시아에서 푸틴과 만나는 사진을 선전물에 집어넣으며 공격했으나 르펜은 러시아 문제 대신에 다른 쪽으로 관심 방향을 돌리는 전략을 썼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된 논쟁은 최대한 피하면서, 지방 소도시들을 발로 뛰며 지지를 다졌다.

 

단골 레퍼토리였던 이민자 문제나 안보에 관한 얘기도 별로 하지 않으면서 프랑스인들의 구매력 즉 살림살이에 초점을 맞췄다. 에너지값을 낮추고 모든 가구에 150~200유로를 현금지원하겠다는 공약 등을 들고 나와서 주로 정치 무관심층을 공략했다. 마크롱이 우크라이나 전쟁 국면에서의 외교 노력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선거캠페인에서는 소극적으로 비친 것과 반대였다. 마크롱이 1차에서 이기고 결선에서 다시 중도와 좌파를 결집시킨다 하더라도, 극우의 부상이라는 대세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프랑스는 어디로 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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