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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교 카페] 강화도 조양방직

딸기21 2021. 7. 2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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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입구.

 

도통 돌아다니는 일이 없었는데, 일을 그만두면서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진 관계로 요즘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습니다. 2주 연달에 주말에 찾아갔던 곳, 조양방직. 

 

강화도에 가본 것이 30년만입니다. 그때 나름 (인터넷 시절도 아니었는데) '맛집'이라고 찾아갔던 식당이 있었어요. 인터넷 검색해보니 너무 유명해져서 서비스와 음식이 나빠졌다고 해서 패스. 그 대신에 '대청마루'라는 솥밥집을 갔는데 매우 만족. 이제 어디 가볼까, 하다가 들른 곳이 조양방직입니다.

 

조양방직은 1937년 홍재용, 홍재묵 형제가 설립한 방직공장이다. 설립 당시 125,000원(현시가 60억 원 내외)의 자본금으로 시작하였으며 700여 평의 2층 건물과 50여대의 직조기를 갖추고 인견과 마직물 염색을 주로 하였다.

... 홍씨 집안이 소유한 논 면적은 600여ha(180만평 규모)가 넘고, 일하는 소작인 숫자도 3000명이 넘었다. 소유자는 홍재용(2대 강화군수 1946 - 1947), 홍재묵 형제와 홍재승(6,25 전쟁 때 강화치안대장), 홍두섭(강화금융조합장), 홍재준(강화소방조두)이 대표적이었으며, 이들은 1910년대 이후 강화의 최대 지주로서 쌀의 대일 수출을 전제로 지주경영을 하였다. 

... 1910년대 이후 경기도 일원에서 생산된 쌀의 상당량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이때 개통된 수인선은 경기도의 쌀을 항구인 인천항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었다. 강화의 논농사도 기본적으로 대일 수출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1920-1930년대 일제의 저미가정책, 농업공황으로 인하여 한국인 지주경영의 성장이 막히기 시작한다. 강화의 대지주들은 산업자본으로 전환을 꾀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조양방직인 것이다.

... 폐업이후 조양방직 터는 다른 형태로 활용되다가 2000년대에 오면서 잡동사니가 쌓인 버려진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2018년에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낡았으나 새롭고 옛스러우면서도 감각적인 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출처 : 인터넷 강화뉴스, '조양방직과 강화의 근현대사' 

 

 

마당을 둘러보고.

 

 

낡은 것들, 오래된 것들을 모두 모으거나 재활용해서 전시장 겸 카페로 만들었습니다. 키치를 지향하는 공간들이 실제로는 그저 촌스러운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곳은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철판 테이블. 전체적으로 공장설비나 낡은 물건들을 재활용했습니다.

 

공장에 남아 있는 철계단인데, 저기 말고 다른 곳들은 어린이들이 다 구경할 수 있어요!  

 

 

조각상 받침에 참새가 너무너무 많아서 보는 사람들이 다 신기해했는데, 사진엔 없네요 ^^;;

 

 

카페 안으로.

 

 

 

 

넓은 공장의 중앙통로에 저렇게 좌석을 배치. 일종의 메인홀이고, 옆에 딸린 공간들과 별관에도 좌석이 매우 많습니다.

저렇게 넓고 사람들이 오가는데 도심의 흔한 카페들처럼 시끄럽지 않고 생각보다 조용해서 놀랐습니다. 천정이 옛 공장의 나무지붕 그대로여서인지 카페에서 대화조차 나눌 수 없게 만드는 콘크리트 건물들의 웅웅거림이 없어요! 

 

 

 

본채 옆에 딸린 작은 건물들을 비롯해, 모든 자투리 공간을 전시장으로 꾸몄습니다.

 

 

그 다음은, 별관.

 

들어가면

 

 

 

본관에서 놀다가 화장실을 갔는데....
이렇게 멋진 화장실은 순천 송광사 해우소 이래 처음이네요 ㅎㅎㅎ

 

 

이제 나갈까, 하는데  스콜이 촤르륵.

갑자기 사라진 방문객들, 통유리창 안에서 바라본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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