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능력'과 '능력주의'에 대한 짧은 원고 하나를 출판사에 넘겼습니다. 그 책을 쓰면서 그동안 읽었던 능력, 능력주의, 정의, 평등, 공정, 등등에 대한 책들을 쭉 다시 훑어봤습니다.
자기계발 분야의 구루라고 할 수 있는 야마구치 슈, 구스노키 켄의 <일을 잘 한다는 것>(김윤경 옮김. 리더스북).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그래, 일을 잘 하는 게 중요해. 능력이 중요하지.... 오래 일하던 분야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놀고 있는 저의 요즘 고민이기도 하거든요. 일단 좀 능력을 키워야겠구나, 그래야 이전과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 책을 읽다 보니, '회사 다닐 때 읽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도.
하지만 자기계발서 추천하려고 이 목록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고요. ㅎㅎㅎ
요즘 이쪽 담론이 넘쳐나고 하니, 관심 있는 분들께 도움 되라고 그간 제가 읽어온 것들을 정리해 놓습니다. 다만 요즘 쏟아져 나온 국내 저술들은 제가 읽지를 않아서... 한국에서 공정담론 지금처럼 번지기 전에 봤던 외국 책들이 대부분입니다.
이 분야에서 맛뵈기로 맨 먼저 볼만한 것은 역시나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유강은 옮김. 이매진)를 꼽을 수 있겠네요. 디스토피아 소설 형식인데, 소설치고는 너무 건조한데다 논문의 형식을 띠고 있어서 오히려 다큐처럼 읽을 수 있는 책.
또 가비얍게 읽을 수 있는 것으로는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읽을 때엔 재미있었는데 다시 훑어보니 스크랩할 내용은 딱히 없더군요;;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도 오래 전 재미있게 봤는데 그것도 리뷰는 없네요 ㅎㅎㅎ
샌델의 책보다는 무쟈게 좋아라 하는 폴 콜리어의 <자본주의의 미래>(김홍식 옮김. 까치)를 강력 추천합니다만, 이 책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링크로 대신합니다. 로버트 프랭크와 필립 쿡의 <승자독식사회>(권영경, 김양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도 나온 지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아주 재미있었던 책입니다. 이한 <중간착취자의 나라>(미지북스)는 많이많이 추천합니다.
그러나... 가벼운 것들로 시작하더라도, 결국은 읽어야만 하는 존 롤스의 <정의론>(황경식 옮김. 이학사). 읽은 지는 좀 됐는데 문장이 비비배배 꼬여있는데다 무식한 저에겐 너무 어려워서 정리를 안 해놨네요. 하지만 '무지의 베일'을 접했을 때의 신선함은 뭐랄까, 그냥 신선함이 아니고(이미 다른 책들에서 너무 많이 언급됐던 것이라) '신남'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에 도움 되는 원칙들 같긴 한데, '자유의 우선성'과 '차등의 원칙' 사이에 뭔가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로널드 드워킨의 <자유주의적 평등>(염수균 옮김. 한길사)은 오랫동안 질질 끌다가 최근에야 다 읽었습니다. 롤스가 무지의 베일이라는 장치를 통해 평등한 출발점과 제도의 창출을 얘기했다면, 드워킨은 무지 대신 '가상의 보험시장'이라는 사고실험을 제안합니다. '장애나 질병, 실업에 대한 보험시장이 있다면 어떤 보험상품에 시민들이 가입하려 할 것인가'를 가지고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제도를 모색하는 거지요. 책의 상당부분이 미국 사회의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미국 대법원 판례들을 재구성하면서 정의와 제도와 법과 해석을 검토한 뒷부분이 오히려 저한테는 더 재미있었습니다. 조만간 스크랩을 해놓을 생각입니다.
롤스와 드워킨을 읽었으니 아마티아 센의 <정의의 아이디어>(이규원 옮김. 지식의날개)로 가야겠지요. 어째 저에겐 '모든 길은 센으로 통한다'인 것 같기도 합니다만... 롤스와 드워킨을 읽으면서 좀 찝찝했던 것들을 센이 빨간펜으로 수정해주는 듯한 느낌.
센은 롤스와 드워킨이 '완벽한 정의'를 상정해놓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특히 드워킨에 대해서는 센답잖게 강경한 어조로 비판해서 놀라웠다능 ㅎㅎ) 두 학자가 비판한 공리주의의 전통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면서, 절차와 과정과 '다른 가능성'들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책 제목도 '정의론'이 아닌 '정의의 아이디어'로 붙였다고 합니다. 서구중심주의를 벗어나 인도 철학과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요소를 해석한 것이라든가, 재미난 부분이 아주아주 많았습니다. 역시 조만간(....) 정리를 할 예정.
(책과는 상관 없습니다만 리콴유식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아마티아 센과 DJ의 반박은 1990년대 후반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세계를 달군 논쟁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능력과 평등, 복지를 이야기하면서 '역량 접근'으로 이끌어가는 아마티아 센의 <불평등의 재검토>(이상호 옮김. 한울)도 꼭 읽어야 할 책입니다만 절판이니 패스. 역량 접근이라는 생각은 마사 누스바움에게서 많이 영향을 받았다고 센은 말하는데 누스바움의 책을 못 봐서...
센은 또 <정의의 아이디어>에서 한 국가를 넘어 지구적으로 사고를 확장해야 할 필요성을 누차 설명하는데, 이 문제는 롤스의 약점으로도 지적돼온 것이지요. 존 맨들의 <지구적 정의란 무엇인가>(정승현 옮김. 까치)는 바로 그런 작업을 담은 책이고요. 정의에 대한 문제의식들을 좀 더 구체화시킨 것으로는 스튜어트 화이트의 <평등이란 무엇인가>(강정인, 권도현 옮김. 까치)도 있습니다. 둘 다 아주 까치스러운 책입니다.
맨 앞에서 능력을 키우기 위한 이른바 자기계발서를 소개했는데, 생각의 방향을 확 바꿔서 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허택 옮김. 느린걸음)를 한번 읽어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능력에 대한 '생각 뒤집기'랄까. 일리치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머리 복잡할 때 일리치의 책을 읽으면 찬물을 확 끼얹은 듯한 느낌을 선사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자는겨? 싶을 때 피터 반스의 <우리의 당연한 권리, 시민배당>(위대선 옮김. 갈마바람), 클리포드 더글러스의 <사회신용>(이승현 옮김. 역사비평사), 어니스트 칼렌바크와 마이클 필립스의 <추첨민주주의>(손우정, 이지문 옮김. 이매진)를 펼쳐보는 것도 방법이고요. 그래도 시간이 있으시면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장경덕 옮김. 글항아리)도 읽어보세요. 유명하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없는 책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읽어보면 매우 재미있습니다!
다 읽기 번거로우시면 그냥 아래의 카툰으로... 뉴질랜드의 만화작가 토비 모리스의 카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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