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에서 최근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발단은 제이콥 주마 전 대통령이 체포된 것이었다. 주마의 고향인 콰줄루나탈주, 하우텅 주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하우텅에는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와 최대 경제도시인 요하네스버그가 있다. 시위는 곧 폭동으로 변질됐다. 쇼핑몰, 공장들이 약탈을 당했다. 현지 엘지(LG)전자 공장이 전소됐고, 삼성전자도 창고가 약탈당하는 등 피해를 보았다.
이 과정에서 15일까지 7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폭동은 남아공의 주요 무역항인 동쪽 항구도시 더반으로도 번졌다. 요하네스버그와 더반을 잇는 고속도로도 막혔다. 콰줄루나탈 주에는 12일부터 병력이 배치됐다. 남아공의 코로나19 상황은 심각하다. 누적 감염자가 224만명에 사망자도 6만5000명에 이른다. 그래서 최근 거리두기 단계가 상향됐는데, 가뜩이나 코로나 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 사회적 동요까지 일어난 것이다.
제이콥 주마는 올해 79세로 2009-2018년 대통령을 지냈다. 재임 전에는 물론이고 재임 중에도 논란이 아주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대통령이 되기 전인 2005년에 불거진 성폭행 의혹이다. 기소되지는 않았으나 에이즈에 대한 무지를 그대로 내보여 세간의 비난이 쏟아졌다. '부족 관습'이라며 부인을 여러 명 둔 것도 대통령이 된 후에 국제사회에서 눈총을 받는 요인이 됐다.
무기거래와 관련해 수십억달러 규모의 부패 의혹이 제기됐는데, 2009년 대통령 취임 직전에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재임 기간에 다시 온갖 부패스캔들에 연루됐다. 공금 유용, 돈세탁 등 18건의 부패에 연루됐고 기소할 것이냐를 놓고 대법원까지 갔다. 2017년 대법원이 기소해야 한다고 결정함으로써 재판을 받을 위기에 몰리자 2018년 결국 주마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퇴임 뒤에도 그를 기소할지를 놓고 재판이 이어졌으나 주마는 법원 출두를 줄곧 거부했다.
결국 체포된 것은 법원에 나타나지 않는 그에게 법원이 법정모독죄로 15개월형을 선고하고 체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주마는 7일 자진출두해 고향인 콰줄루나탈의 에스트코트 교정센터(교도소)에 수감됐다. 한국에선 전직 대통령이 기소되거나 감옥에 가지 않은 경우가 드물지만, 남아공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토록 말 많고 탈 많은 인물이 어떻게 대통령을 두 번이나 했냐고? 대통령제인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대통령을 국민들이 선출한다. 미국은 이례적으로 간접선거이지만, 선거인단을 국민들이 뽑는다. 그러나 남아공은 대통령 선거 제도가 다른 나라와 다르다. 국민들이 뽑는 게 아니라 하원에서 뽑는다.
남아공에서는 1960~90년대 초반까지 백인정권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이름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인종분리 정책을 펼쳤다. 그러다가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고 첫 자유선거를 거쳐 의회가 구성됐다. 넬슨 만델라 등의 투사들이 이끌었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다수당이 됐고 만델라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백인정권이 끝나고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폭력적인 분열을 피하기 위해 의회에서 대통령을 뽑는 제도를 만든 것이었지만 이 제도는 결국 ANC를 '고인 물'로 만들었다. ANC가 계속 다수당이다 보니, 대통령이 늘 ANC에서 나오는 구조가 굳어진 것이다. 그래서 주마는 당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직접선거로 선출된 것이 아니라 해도 주마의 지지기반은 만만치 않았다. 2018년 기준으로 남아공 인구 약 5700만명 가운데 흑인이 80.9%이고 ‘컬러드’(혼혈)가 8.8%, 백인이 7.8%, 인도계 등 아시아계가 2.5%다. 흑인들이라 해도 부족이 여럿이다. 공식 언어만 11개인데 그 중에는 영어도 있고, 네덜란드어가 현지화한 아프리칸스라는 언어도 있다. 나머지는 현지 부족언어들이다. 언어 사용인구로 추정해보면 주요 부족들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줄루 25.3%, 코사 14.8%, 아프리칸스 12.2%, 세페디(북부 소토어) 10.1%, 츠와나 9.1%, 영어 8.1%, 세소토(소토어) 7.9% 등등이다.
흑인 중에 줄루 인구가 제일 많은데 과거 ANC의 주축은 코사였다. 만델라와 그 뒤를 이은 타보 음베키 전 대통령이 코사족이었다. 줄루족은? 만델라와 음베키의 시대가 지나간 뒤에 권력을 장악한 주마가 줄루족이다. (줄루족 지도자 망고수투 부텔레지가 1975년에 세운 '잉카타자유당'이라는 또 다른 흑인 정당이 있었고 1990년대 초반 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백인들, 그리고 ANC 지지세력과 약간의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ANC에 필적하지는 못했다. ANC는 만델라 4년과 음베키 첫 임기 4년 동안 잉카타자유당과 연합정권을 구성하는 형식으로 끌어안았다)
만델라와 음베키는 지식인이었다. 특히 음베키는 만델라의 동지였으나 끝내 옥중에서 사망한 고반 음베키의 아들이었으며 영국 유학파 출신이고 모스크바에서도 한때 공부한 적 있었다. 두 지도자 모두 인종차별에 맞서 싸웠던 정통성이 있었지만 다수 흑인들과는 정서적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마는 다르다. 그 역시 ANC에서 백인정권에 맞서 싸웠고 투옥과 망명 등을 거쳤으나 성향에서는 전임자들과 많이 달랐다. 무엇보다 주마는 공식 제도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말과 행동이 거칠고 국제사회에서 비아냥을 많이 받았지만 남아공의 가난한 흑인들에게는 적잖게 지지를 받았다. 가난한 줄루 빈민들에게 그는 영웅이었고 우상이었다.
그래서 지지자들은 "주마를 지키겠다"며 시위를 시작했는데, 시위가 약탈로 이어지고 폭동으로 비화됐다. 그런데 폭동과 약탈이 주로 일어난 곳들을 보면 주로 흑인 빈민들이 사는 지역이다. 극심한 약탈과 파괴가 벌어진 요하네스버그 외곽 도시 소웨토(SOWETO)가 그런 곳이다. 소웨토에서만 상점가 200여곳이 약탈을 당했다고 한다.
'소웨토'는 남아공 흑인 투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소웨토라는 명칭은 백인정권이 과거에 흑인 거주구역으로 만든 'South Western Townships'에서 나왔다. 대도시 저임금 노동자가 된 흑인들을 근교에 분리해두기 위해 만든 지역인 것이다. 그곳에서 1955년 흑인들은 ‘자유헌장(Freedom Charter)’을 발표하고 백인들과 싸웠다. 만델라도 한때 소웨토에 살았다. 그만큼 역사가 깃든 곳이지만, 백인정권이 끝나 ANC가 집권한지 30년이 돼 가는데도 여전히 그곳 사정은 열악하다.
사실 남아공 전체의 경제상황이 좋지 않다. 2019년 구매력 기준으로 남아공의 1인당 GDP는 약 1만2500달러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경제가 발전한 중위소득국가이며 천연자원도 많다. 그런데 경제성장률은 계속 낮아져서 2019년에는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인데도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전력 등 기본 인프라도 부족하거나 부실하고 빈부격차는 크다. 인구의 절반이 빈곤선 이하에서 살아간다.
거기에 코로나19가 겹쳤다. 어디서나 늘 그렇듯 가장 중요한 것은 일자리다. 공식 실업률이 코로나19 전에 28.5%였는데 팬데믹으로 록다운이 실시된 올 1분기 실업률은 32.6%로 올라갔다. 청년실업률은 46.3%로 나타났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식' 실업률일 뿐, 실제 실업률 43%에 청년 실업률은 75%에 육박한다는 추정치도 있다.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아직까지 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은 2.5% 불과하다. 그런 상황에서 록다운이 이어지면서 빈곤층의 고통은 더 심해졌다.
ANC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흑인경제력강화(BEE) 프로그램들을 실시했지만 그에 따른 과실이 공평하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흑인 빈곤층의 분노와 좌절이 폭동으로 나타난 것도 처음은 아니다. 2015년에는 나이지리아계 등 아프리카 다른 나라들에서 온 이주자들에 대한 공격이라는 인종차별적(xenophobic) 폭력으로 표출됐다. 2019년에도 요하네스버그에서 비슷한 소요가 일어났다. 올해에는 주마 체포에 항의한다는 명분으로 다시 터져나왔다.
데일리메일&가디언은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빈부격차에 대한 반발과 함께 법을 무시하는 경향이 계속 나타나고 있었고, 그것이 주마 체포를 계기로 폭동 형태로 터져나왔다"고 분석한다. 둘라오마르연구소의 에베네저 두로자예는 이 신문에 “정부의 무능에 대한 좌절감을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면서 "삶의 질이 열악해지고 생계가 막막해져 희망을 잃은 이들이 늘어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했다.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은 12일 약탈 범죄자들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놓고,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콰줄루나탈에 병력을 투입했다. 올해 68세의 라마포사(얼마 전 G20 때 한국 정부가 '국가 위상' 자랑한다며 사진에서 잘라내버린 바로 그 사람)는 만델라의 비서이자 최측근이었던 인물이다. 만델라가 1992년 교도소에서 나와 그후 2년 동안 FW 데클레르크 당시 대통령과 평화적 정권이양을 위한 협상을 했는데, 그 때 메신저 역할을 한 사람이 라마포사였다고 한다. 남아공 민주화 뒤에는 국제무대에서 활동했고 북아일랜드공화국군(IRA) 무장해제 작업을 감독하는 국제위원회에서 일하기도 했다.
남아공으로 돌아와 다시 정치에 뛰어든 라마포사는 2014-2018녀 주마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을 지냈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벌어진 뒤 보여준 지도력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다. 콰줄루나탈에 2500명의 군인들을 보냈는데, 사태를 진정시키기엔 역부족인 규모인데다 투입 시점도 늦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반면에 '정치로 풀어야 할 문제에 독단적으로 군대를 보냈다'는 야당의 비난도 동시에 일었다. 폭동 대응뿐 아니라 경제정책 전반의 실패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어느 현지 언론은 코로나19 이전부터 남아공 경제는 "라마포사가 왼쪽으로 가라 하면 오른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라 하면 왼쪽으로 갔다"고 적었다. 이번 사태로 란드화 환율은 출렁였고, 경제엔 악재가 더해졌다.
라마포사와 함께 ANC도 곤란한 처지가 됐다. ANC는 “범죄자들은 우리 지지자들이 아니다” “약탈과 파괴에 강력 대응하겠다는 정부 방침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일단 내놨지만 지지기반인 흑인 빈곤층의 분노를 어떻게 잠재울 것인지가 심각한 과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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