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실시된 이란 대선에서 에브라힘 라이시 사법부 수장이 당선됐다. 하산 로하니 현 대통령의 정책을 이을 중도-개혁파 후보는 참패했고 강경 보수파 라이시가 8월 대통령에 취임하게 됐다.
미국과의 핵협상이 재개된 상황에서, 국민들이 로하니 정부의 협상 기조에 반대해 보수강경파 후보를 택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2019년 이란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연료보조금을 없앤 것이 계기가 됐지만 그 밑에는 경제사정이 깔려 있었다. 2015년 이란은 미국 등 6개국과 '포괄적 공동 행동계획(JCPOA)'라는 이름으로 핵합의를 했으나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다시 제재에 들어갔고 그 결과 이란의 경제난이 더 심해졌다.
당연히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시민들이 많겠지만 8년에 걸친 로하니 집권 기간 동안 경제는 눈에 띄게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됐다. 내부의 억압시스템을 고치는 개혁도 지지부진했다.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슬람 진영의 권력을 온건파 정부가 결국 깨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해 초 미국이 정예부대인 혁명수비대 알고드스의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이라크에서 사살해 반미감정을 자극했다.
보수파는 위기감 속에 결집한 반면, 반면 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은 무력감 속에 상당수가 투표를 포기했다. 6년 전 핵합의 뒤 자바드 자리프 외교장관이 테헤란으로 귀국했을 때 시민들은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축제라도 열린 듯 거리로 나와 환영했는데 그 기쁨이 좌절과 실망, 무기력으로 바뀐 것이다. 이란 대선 때마다 외신들이 앞다퉈 내보내는, 화려한 머릿수건을 쓰고 두 손을 치켜들며 개혁파 후보를 지지하는 젊은 여성 유권자들의 사진도 이번에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똘똘 싸맨 여성들의 사진들만 보일 뿐.
자리프는 로하니의 뒤를 이을 인물로 기대됐지만 출마를 고사했으며 이번 대선 투표율은 매우 낮았다. 48.8%, 1979년 혁명 이후 최저였다. 2017년 대선 때에는 73%였는데 이번엔 50%에도 못 미쳤으니. 투표를 거부한 시민들이 많은 상황에서, 라이시가 1차 투표에서 약 62%를 얻어서 당선을 확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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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표 가운데 12%는 혁명수비대 출신 보수파에게 갔다. 로하니 현 대통령이 지난번 선거에서 재선할 때 2360만표를 얻어 득표율이 60%에 육박했는데 이번 대선에서 중도 개혁진영의 주자로 나선 압돌나세르 헴마티 중앙은행장은 자리프의 동반자임을 강조했는데도 겨우 240만표를 얻었다. 온건개혁파의 득표력이 10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득표율은 8.4%에 그쳤다. 인물의 인지도와 영향력 문제도 있지만 중도개혁 성향 유권자들의 실망감과 외면이 그만큼 컸던 셈이다. 그 덕에 라이시는 전체 유권자 숫자를 놓고 보면 3분의 2가 지지하지 않았는데도 승리했다.
올해 60세의 라이시는 이란 동북부 호라산 지역의 마슈하드에서 나고 자란 근본주의 성직자다. 15세부터 시아파 이슬람 신학의 본산인 곰 신학교에서 이슬람 법학을 공부했다. 현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이라크의 나자프에서 태어났지만 사실상의 고향이 마슈하드다. 하메네이의 측근인 라이시는 혁명 이후 주로 법률 관련 부서에서 일했다. 1988년 정치범 수천 명을 숙청하고 사형 판결을 내린 인물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2000년대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맞섰던 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대학에서 과학과 교통공학을 전공했고 현 로하니 대통령은 신학자 출신이지만 영국 유학파다. 반면 라이시는 세속 교육을 받지 않은 인물이고, 그만큼 우려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잠시 이란 대선에 대해 들여다보자면-- 이란은 억압적인 독재국가 이미지가 강하지만 미국이 그렇게 몰아간 측면이 적지 않다. 선거도 없고 의회가 없거나 제 기능을 못하고 국민의 견제를 받지 않는 걸프의 왕정국가들에 비교하면 이란은 오히려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갖추고 있는 나라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4년마다 한번씩 대선을 치르고 선거 결과에 따라 정권이 교체된다. 대통령은 2번 연임은 가능하지만 3연임은 못한다.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세운 뒤 2명의 대통령이 짧게 재임했으나 1981년부터는 모든 대통령이 연임에 성공해 8년씩 집권했다. 30여년을 놓고 보면 중도온건파의 총 집권 기간이 오히려 더 길었다.
하지만 이란을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볼 수는 없다. 단적인 이유로, 대통령 위에 군림하는 최고지도자와 혁명수호위원회의 존재를 들 수 있다. 이들이 각종 선거에 나올 후보를 1차로 거른다. 이번에도 중도개혁파 후보들은 출마조차 못하게 대거 배제했다. 의회가 있는데도 성직자들로 구성된 전문가위원회라는 별도의 권력기구가 최고지도자의 지시사항이 이행되고 있는지 감시한다. 사법체제도 이슬람법에 의존하고 있다. 이슬람은 종교인 동시에 기본적으로 법체계다. 신학자가 곧 법학자이고, 성직자는 예배의 인도자인 동시에 이슬람법의 해석자다. 여성은 법정에서 증거능력을 남성의 절반만큼 인정해주는 식의 전근대적 차별이 여전하다.
이란의 정치구조는 이중적이다.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 역시 선거로 선출되는 의회(마즐리스)가 있지만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제도화돼 있다. 최고지도자와 사법부 수장 등이 그런 권력자이고 권력기구다. 초대 최고지도자는 이슬람혁명을 이끈 호메이니였고, 그의 뒤를 이어 지금껏 군림하고 있는 사람이 하메네이다.
하지만 흔히 얘기하듯 최고권력자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아니다. 이란의 정치구조는 매우 복잡하며 고도의 상호견제를 바탕으로 짜여져 있다. 종신직인 최고지도자는 혁명수호위원회 멤버 12명 중 절반을 정하고, 사법부 수장도 임명한다. 혁명수비대 사령관과 정규군 사령관도 최고지도자가 정한다. 그러나 최고지도자가 스스로 후임을 지명하지는 못한다. 81세 고령에 건강이 좋지 않은 하메네이가 만일 사망하면 후임자는 권익위원회라는 기구에서 선거로 뽑는다. 그 권익위원회의 위원들은 국민이 선출한다. 간접선거이긴 하지만 어쨌든 선출 절차가 있는 것이다.
최고지도자가 이슬람진영을 대변하지만 성직자들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그의 노선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2009년 대선 부정선거 시비가 벌어졌을 때에 고위 성직자들이 반발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메네이는 애당초 최고위 성직자 출신이 아니기도 했다. 사실상의 첫 대통령으로 호메이니 시절 8년간 재임했고, 이후 호메이니의 계승자가 된 뒤에도 종교적 권위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력으로 이란을 움직여온 인물이라 볼 수 있다.
하메네이를 비롯한 강경파들의 지원 속에 당선된 라이시가 집권하면 이란의 변화와 개혁은 더욱 미뤄질 수밖에 없다. 라이시의 성향으로 봐서, 새 정부가 억압을 완화하고 내부 개혁으로 움직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란은 20년 동안 이라크와 레바논, 시리아 등의 시아파와 친이란 세력들을 지원하며 중동 역내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 더군다나 미국이 오는 11월이면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을 모두 철수시킨다. 일각에선 미국이 대테러전을 종료하는 시기와 맞물려, 이란이 힘의 공백을 비집고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려 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과 아랍국이 손을 잡기 시작한 상황에서 갈등이 증폭될 수도 있다.
하지만 새 정부도 억압적인 신정 정치와 혁명수비대의 대외활동에 대한 국민들 반감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재작년, 작년 시위에서는 최고지도자를 직접 겨냥한 반대 구호들도 등장했다. 무엇보다 경제난이 심각하다. 라이시 정부가 개혁을 거부하더라도 '현상유지'를 택할 가능성이 있다. 라이시가 강경정책으로 갈 것이냐, 현상유지로 갈 것이냐, 등 떠밀려 개혁을 수용할 것이냐의 세 가지 시나리오 중에 강경 기조 쪽으로 갈 공산이 크지만, 현상유지를 택할 수도 있다고 알자지라방송은 관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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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어느 길을 가게 만드느냐는 미국의 태도와도 연결돼 있다. 미국 조 바이든 정부와 이란 핵협상이 다시 진행 중이다. 그런데 이란에 강경파가 집권함으로써 미국과 이란의 정부 성향이 맞지 않는 이른바 미스매치가 생기게 됐다. 하지만 핵협상은 계속 진행된다. 미국 트럼프 정부가 일방적으로 합의를 깨자 자 이란은 우라늄 농축 수위를 단계적으로 높였다. 하지만 사전에 단계 상향을 경고하고, 감정적인 맞대응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움직였다.
현 로하니 정부가 핵협상에 나선 것은 최고지도자의 승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보수-개혁 진영의 상층부에서 일종의 합의가 있었던 셈이다. 바꿔 말해,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뜻이 미국과의 협상 쪽에 있다면 대통령이 강경파 성직자로 바뀌더라도 핵합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라이시는 선거 과정에서 2015년 로하니 정부의 협상 '방식'을 비판하기는 했어도 합의 자체를 거부하는 발언은 한 적이 없다.
온건파가 그동안 주도해온 핵협상의 책임이 보수파에게로 넘어가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포린폴리시는 미국 리처드 닉슨 행정부 시절 중국과 손잡은 것이나 이스라엘 보수파 메나헴 베긴 총리가 캠프데이비드협정으로 이집트와 수교한 것을 거론하면서 오히려 이란 핵협상의 전기가 될 수 있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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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이란 측과 만난 미국 협상단은 "조금씩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핵합의로 복귀한다는 이란의 입장은 그대로이며 대선 결과 때문에 협상이 어그러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바이든 행정부는 강조한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이란의 최고 결정권자는 최고지도자라는 것이 바이든 대통령과 우리의 판단”이라고 했다.
바이든 정부의 외교를 이끄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외교안보보좌관 등은 버락 오바마 정부 때 이란과의 핵협상에 깊이 관여했던 주역들이다. 특정 정부의 '레거시'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이란과의 대립을 마무리짓는 것은 미국 입장에선 핵확산 억지 차원을 넘어 중동 전체에 걸친 전략의 문제다.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걸프 아랍국들과 이스라엘 등등 여러 나라가 관련된 이슈들을 풀려면 이란과의 관계가 새로운 방향으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핵합의로 복귀한다는 미국의 의지는 굳건해 보인다.
다만 이란 강경파 정부 출범으로 인해 협상 속도가 느려질 수 있다. 바이든 정부는 이란과의 핵합의를 되살리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이 일에 집중해왔다. 하지만 라이시 정부가 출범하면 서로 상대를 파악하며 숨고르기를 하는 기간이 필요할 것이며, 라이시가 취임하는 8월까지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 템포를 조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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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과 중국, 러시아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당분간 이란이 핵협상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서방과 교류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며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에 만족할 것이라고 CNN은 예측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란 대선 다음날인 19일 곧바로 라이시에게 당선 축하 인사를 보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그 이틀 뒤인 21일에 “이란과 중국은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라며 축하메시지를 전했다. 시 주석은 올해가 중국-이란 수교 50주년이라는 점도 언급했다고 중국 관영매체들은 보도했다.
중국과 이란은 경제적으로 매우 밀착돼 있다. 이 관계는 이란 정부가 개혁파냐 보수파냐에 상관 없이 장기적, 전략적인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이란 에너지를 수입하고 이란 인프라에 투자하면서도 동시에 이란의 라이벌인 사우디와도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이란과 중국의 관계에는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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