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마이클 영, 유강은 옮김. 이매진. 12/31
Meritocracy. '능력주의'라고 번역돼 있긴 하지만 무슨무슨 '크라시'가 붙는 것에서 보이듯 정확히 말하면 능력에 따른 지배, 능력계급주의다. 일단 쟁이고 보는 유강은 번역가가 옮긴 책. 오래도록 회사 책상에 놓아두기만 했다가 퇴사하기 전부터 읽기 시작했고, 늘 그렇듯 한참 시간을 끌며 두어장씩 넘기다가 결국 해가 바뀌기 직전에야 끝을 냈다.
책 표지도 크기도 팜플렛 같다. 두껍지 않고 군더더기도 없다. 제목이나 표지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사회과학 책이나 평론처럼 생긴 이 책의 장르는 소설이다. 1958년 영국 노동당 이론가였던 마이클 영이 쓴 것으로, 가상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2043년의 영국을 말하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세기 후반기에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경쟁에서 상대가 되지 않을 위험이 너무도 현실적이면서도 정력적으로 강조됐으며, 그 결과 다른 모든 것을 생산의 요구에 종속시킬 필요성이 매우 절박하게 된 까닭에 마침내 교육이 결정적으로 개혁되고 가족이 봉건주의의 품안에서 떨어져 나왔다. 아니,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61쪽)
책의 전반부에서 '마이클 영'은 20세기 큰 전쟁을 거친 뒤 영국에서 '평등주의'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정책들을 추적한다. 귀족이 권력을 대물림하고 부자가 부를 대물림하는 사회의 바탕에는 가족주의가 있다. 현대 사회가 됐어도 사라지지 않은 가족주의와 세습의 잔재들을 혁파하기 위해 노동당과 '사회주의자들'은 평등주의를 주창한다. 그 수단은 공교육, 너나 없이 배제되지 않고 학교에서 배우게 하는 공교육이다. 하지만 어느 새 영국이라는 나라의 생산 효율성은 떨어지고 '국제 경쟁력'을 잃게 된다. 이 냉혹한 현실을 직시한 깨어 있는 엘리트들은 평등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능력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사회를 만드는 길로 나아간다.
능력은 곧 '지능과 노력의 결합'이다. 지능은 타고난 것이고 노력은 후천적인 것이라 여기기 쉽지만, 그 타고난 자산도 없는 어리석은 자들이 평등한 기회를 달라며 덤벼든다 해서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결과'는 경제적 생산성과 통치의 효율성이다. 머리 좋은 애들을 미리 골라서 '평등하지 않은' 교육을 통해 엘리트로 키우고, 그 엘리트들이 좋은 경제와 좋은 통치로 보답함으로써 머리 나쁜 인간들까지 먹고 살 수 있게 해준다면 좋지 아니한가! '평등한 기회'는 그렇게 능력주의로 대체된다. 그 과정에서 소란과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새 반발과 저항마저 무력화된다. 노동자는 기술자가 되고, 노동조합은 엘리트들의 파트너이자 아첨꾼이자 달램의 대상이 된다.
귀족제도, 군주제, 귀족집단, 옛날부터 이어진 대학, 명문 사립학교 등은 변화하는 사회의 변화하는 요구에 서서히, 그러면서도 더욱더 확실하게 적응했으며 따라서 여전히 근본적인 의미에서 위계적이었다. 미처 알아차리기 어려운 정도로 태생에 따른 귀족은 재능에 따른 귀족으로 변신했다. (82-83쪽)
능력은 지능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는 범주가 돼버리고, 그 평가에 따라 사람들은 분류되고 할 일과 직종이 정해진다. "평가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선발'의 과학성이 배가됨으로써. 이제 사람들의 불만은 '다시 평가받고 분류될 기회'를 얻으려는 쪽으로 모아지고, "모든 사람이 능력에 따라 평가받을 수 있는 권리가 침해할 수 없는 소중한 인권이 됐다."(124쪽) 평생교육이 그들을 달랠 장치로 주어지지만, 지능 평가 기술이 점점 더 발전하면서 이젠 그런 장치마저 필요없어질 판이다.
심적 분위기에 변화를 가져온 가장 큰 요인은 아마 능력이 점점 측정 가능하게 된 사실일 듯하다. 능력의 모호한 성격 때문에 능력에 반대하는 악순환이 깨진 때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선발 방법이 경제분야에서도 변형돼 활용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첫째 단계는 산업계에 들어가는 수준을 결정하는 방법이었다. 일단 사람들이 마음의 준비가 되자 지능 검사의 영향력이 확대돼 점수에 따라 선발뿐 아니라 승진까지 좌우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50-151쪽)
평등한 기회를 요구한 능력주의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여 계급을 고착화시키는 장치가 된다. 정치마저 '그들의 리그'로 전락하다 못해 뛰어난 관료주의를 보완하는 위안 장치 정도로 전락한다. 봉건적 가족주의는 지능의 세습 귀족들이 지배하는 사회로 바뀌었고, 지능이 떨어지는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기본급'이라는 당근이 주어지며 사회는 안정을 유지한다. 불안요인의 "진정한 치유책은 머리 좋은 대중의 눈과 귀인 사회 조사와 여론조사를 완벽하게 실시하는 데 있"는(236쪽) 사회가 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분류되기 때문에 계급들 사이의 간극은 어쩔 수 없이 더욱 넓어지고 있다. 한편으로 상층 계급은 이제 더는 자기 회의나 자기비판 때문에 약화되지 않는다. 오늘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성공이란 자기가 지닌 역량과 기울인 노력, 부정할 수 없는 자기의 업적에 뒤따르는 보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 (172쪽)
요새를 정복한 데 만족한 노동계급은 내부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점점 더 많은 부모가 자기 계급보다는 자식을 고려한 야심을 품기 시작했다. 자식 숭배는 민중의 마약이 됐다. (223쪽)
고용주들은 '노동자'를 해고하고 작업복 대신 흰 가운을 입은 기술자만 고용하는 식으로 변화하는 관습에 순응했다. 노동당도 마침내 같은 식으로 적응했다. '노동'은 무거운 짐이었고 '노동자'는 금기어였으며 오직 '기술자'만이 마법의 지팡이가 됐다. 그리하여 현대적인 기술자당이 탄생했다. (224쪽)
예전에는 기술자들이 생산성과 임금이 동반 상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명백히 잘못된 주장이었다. 경제적 진보는 육체노동자들 덕분이 아니라 새로운 기법을 고안하는 발명가와 조직가 덕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임금 인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면, 주인공은 바로 능력주의다. (253쪽)
반발하는 자들이 끝내 사라지지는 않았다. 주로 여성들! 여전히 남성들의 계급사회에서 배제된 '머리 좋은 여성들'과 아직까지 평등을 주장하는 일군의 '포퓰리스트'들이 나서서 공산당 선언을 방불케 하는 '첼시 선언'을 내놓으며 저항을 선동한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한쪽에서는 극단적인 능력주의가 계속 고개를 든다. 지능을 평가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평가 대상이 되는 나이는 점점 어려지고, 이제 태아 단계에서부터 그 아이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을 개량하는 것은 어떠한가? 머리 좋은 고아들을 입양해 엘리트 계급으로 키우면 어떠한가? 이런 계획들이 논의되고 시행에 옮겨지기 시작하는 시점, 철없는 불만분자들이 어떻게든 반발을 해보려는 시점에서 '마이클 영'의 저술은 끝난다.
능력주의, 메리토크라시라는 말은 1958년 마이클 영이 이 책에서 처음 만들어 썼다고 한다. 가족주의, 연줄, 인맥, 세습, 귀족주의 따위와 반대되는 능력주의. 개인의 자질과 의지에 따라 사회적 성취와 지위가 결정돼야 한다는 20세기 평등주의의 유산. 그런데 평등주의가 낳은 능력주의가 어떤 식으로 변질되고 또 다른 계급주의로 굳어지는지, 학벌사회 한국을 넘어 '인국공 사태'와 '불공정'에 대한 청년 세대의 불만이 터져나오는지 21세기의 우리는 매일매일 지켜보고 있다.
책은 사회에 대한 평론 형식을 띠고 있는데다 쓰인지도 좀 오래됐기 때문에 술술 읽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능력주의가 결국 '능력 없는 자들'에 대한 질타와 배제로 이어지게 되는 과정을 이미 알고 있는 2020년의 독자에게 마이클 영의 예언들은 너무 절묘하다. 반란을 주도하는 것이 여성들이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연공서열과 세대 갈등을 비롯해 도저히 풍자로 받아들일 수 없는 통찰력들이 페이지마다 툭툭 튀어나와 읽는 사람을 찔러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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