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 거주불능 지구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 김재경 옮김. 추수밭
'한계치를 넘어 종말로 치닫는' '21세기 기후재난 시나리오'.
"이 책은 현 세대의 '침묵의 봄'이 될 것이다-워싱턴포스트"
'지금 당장 우리에게 닥쳐올 12가지 기후재난의 실제와 미래'
"이미 재난은 닥쳐왔고 미래는 결정되었다"
"읽고 마땅한 반응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눈물을 흘려라"
'우리의 상식과 사회의 근간을 뒤집을 기후재난의 새로운 미래'
책 앞뒤 표지와 띠지에 적힌 홍보문구들. 현란하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는 것은 좋은데, 공포마케팅이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듯이 '위기'와 '재난'을 강조한 문장과 글귀가 가득하니 지레 질린다.
실은 그래서 책을 읽다 말다 했다. 원체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책을 읽는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책 전반부가 그런 미래의 공포에 대한 자료 제시로 가득하다 보니 초반부터 지나친 자극에 오히려 지겨워지는 기분이었달까. 기후변화에 대해 또 더 뭘 읽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분야의 책은 이미 넘치도록 많고, 나 역시 꽤나 많이 읽은 것 같다.
1부와 2부, 기후재난의 실제와 미래 시나리오를 다룬 부분은 '이렇게 심각하구나/심각해질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며 슬슬 읽고 넘어가도 괜찮다. 지구 기온이 파리기후협정에서 '권장'한 것처럼 이번 세기 1.5도 상승에서 멈출지, 혹은 파리협정이 목표로 제시한 것처럼 2도 상승에서 멈출지, 혹은 3~4도 상승할지, 아니면 (비)극적으로 그보다 훨씬 치솟아서 저자가 소개하는 것처럼 재앙으로 갈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너무 극단적인 시나리오들처럼 보이는 것도 있고, '정말 큰일이구나' 혹은 '그렇지,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게 너무 많구나' 싶은 것들도 있다.
폭염, 빈곤과 굶주림, 바다, 산불, 재난, 질병, 경제, 시스템... 저자가 소개하는 재난의 목록들을 보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어느새 현재진행형 기후 재난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일어난/일어날 일들을 알게되는 게 더 의미있다고 생각할 독자들도 있겠지만, 내 경우에 책이 재미있어진 것은 오히려 그 뒷부분부터였다.
기후변화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는가, 혹은 회피하는가. 기후학자들은 왜 입을 다물거나 조용히 있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다시 입을 열게 되었는가. 기술이라는 종교 속에서 우리는 어떤 심리적 경향/편향을 갖게 되는가. 대중문화는 어떻게 우리가 기후 위기를 곁눈질하면서도 위안을 얻게 해주는가. 신자유주의의 파도가 수십년 동안 휩쓸고 지나간 세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상상하는 것은 가능한가.
직접적인 열기를 평가할 때에는 습도를 고려한 기온인 '습구온도'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현재로서는 최대 습구온도가 26~27도를 넘는 지역이 거의 없다.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습구온도 한계선은 35도이며 그 이상부터는 순전히 열기만으로 사람이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지금부터 한계지점까지 8도 정도 여유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온열 스트레스 증상은 훨씬 일찍부터 나타날 것이다. 사실 이미 나타나고 있다. (70~71쪽)
수많은 역경이 지구상에 해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와중에 기후변화라는 문제가 하나 더 얹어진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 온갖 역경이 한데 모여 있는 상황인 셈이다. 다시 말해 기후변화란 미래의 모든 문제와 해결책을 담고 있는 지구환경 그 자체다. (89쪽)
전반부에서 재미있게 읽은 부분 한 토막.
수학자 이라클리 롤라즈는 이산화탄소가 인체 영양에 미칠 심각한 영향에 대해 식생학자들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 한 가지를 15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이산화탄소가 작물을 더 크게 만들 수는 있지만 더 커진 작물은 그만큼 영양가가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이산화탄소 수치가 높아질수록 지구상에 있는 모든 풀잎은 더 많은 당을 함유하게 된다. 그만큼 다른 영양소가 희석된다." 먹거리가 전부 불량식품처럼 변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꿀벌 화분에 들어 있는 단백질 역시 3분의1만큼 감소했다.
2050년쯤에 개발도상국에 거주하는 사람 중 1억5000만명이 영양붕괴의 결과로 단백질 결핍에 시달릴 것이다. 세계 빈곤층은 대다수가 고기 대신 농작물을 통해 단백질을 섭취하기 때문이다.
2018년 주춘우가 이끄는 연구팀은 20억명이 주곡으로 삼고 있는 18종의 벼를 대상으로 단백질 함량을 측정했다. 그러자 공기 중에 이산화탄소 수치가 높을수록 영양소 전반이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산화탄소는 단지 벼 한 작물에 작용하는 것만으로도 6억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었다. (94~96쪽)
물이 부족해지는 도시 이야기.
케이프타운 최초의 '데이 제로' 예정일은 2018년 3월이었다. 수십년 만에 최악이라는 가뭄을 겪고 있던 케이프타운에 몇 달 뒤 상수도가 완전히 말라 버린다는 예고가 나왔다.
당시 상황을 직접 경험하면서 실시간으로 기록한 주민 애덤 웰즈 Adam Welz는 물이 완전히 말라 버리기도 전에 케이프타운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어떤 식으로 모습을 드러냈는지 극적으로 묘사한다. 대체로 가난한 흑인은 소량의 물을 무상으로 할당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체로 부유한 백인은 이를 두고 흑인이 도시 수원지를 고갈시키고 있다고 불평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흑인이 나태하고 무신경해서 수도관을 열어 놓은 채 방치한다거나 훔친 물을 가지고 판자촌에서 사업을 벌인다는 비난이 거세게 타올랐다. 흑인은 풀장과 잔디밭이 딸린 집에 사는 교외 지역 백인을 손가락질하면서 '호화 백화점 화장실에서 변기 물을 펑펑 내리는' 인간들이라고 일격을 날렸다. 정부가 문제에 관심이 없다거나 첨단 기술을 고의로 숨긴다는 음모론이 나돌았으며 불신은 지방 당국에서 연방 정부로, 연방 정부에서 기상학자로 옮겨 갔다.
결국 2018년 2월 케이프타운 당국은 개인당 물 할당량을 반으로 줄여 49리터로 제한했으며 급수 시설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고통을 감지하기 시작한 사회에서 자주 나타나듯이 문제의 원인으로 개인의 무책임을 탓하는 것은 일종의 연막 술책에 가깝다. 실제로 한 보고에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가뭄이 닥치기도 전에 이미 9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물을 개인적으로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추산한다. 그들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데 요구되는 물의 양은 매년 남아공 포도밭에 사용되는 물의 양의 약 3분의 1이면 충분하다.
2015년에 상파울루도 똑같은 일을 겪었다. 2년에 걸친 가뭄 끝에 상파울루에서는 공격적인 배급제의 일환으로 일부 주민의 수도 이용을 하루 12시간으로 제한했으며 결과적으로 여러 사업체가 문을 닫고 대량 실직 사태가 벌어졌다. 2008년에 도시 역사상 최악의 가뭄에 직면한 바르셀로나에서는 프랑스에서 식수를 수입해야만 했다. 호주 남부에서는 1996년도의 저조한 강수량으로 시작된 ‘1,000년 만의 가뭄’이 2001년부터는 데스밸리와 유사한 계곡 지역에 8년간 지속돼 2010년에 라니냐 현상으로 비가 내리고 나서야 끝이 났다. (139-141쪽)
위 사례에서 밑줄 친 부분은 주석의 링크를 찾아보니 번역이 잘못된 것. 물 접근권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사람이 900만명인 듯.
태평양연구소Pacifc Institute 소속의 피터 글릭Peer Gleick은 훨씬 눈이 뜨일 만한 장부를 제시한다. 바로 기원전 3000년 고대 수메르 에아 Ea 신화부터 시작해 물과 관련된 모든 무력 분쟁 사건을 모아 놓은 단순한 목록표다. 목록 가운데 1900년 이후로 발생한 물 관련 분쟁은 거의 500건에 달한다. 게다가 전체 목록의 거의 절반이 불과 2010년 이후로 발생한 사건이다.
과거에는 분쟁이 나라 사이에서 발생했다면 곳곳에서 국가의 권위가 약화된 지금에는 국가 내부의 집단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시리아에서는 가뭄이 2006년에서 2011년까지 5년간 이어지면서 흉작이 초래됐고 그 결과 정치적 불안정과 내전이 발생해 세계적인 난민 위기가 촉발됐다. 글릭은 2015년 이후 예멘에서 벌어지는 특이한 양상의 전쟁에 특히 더 관심을 기울인다. 이 전쟁에서는 ‘피'만큼이나 '물’ 역시 인적 피해를 치렀다고 할 수 있다. 수자
원 기반 시설이 표적 공격을 당한 결과 2017년에 콜레라 발생 건수가 100만 건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144쪽)
요즘 자꾸 듣게 되는 라임병 이야기.
말라리아 전염에는 병원균 자체에 더해 모기가 필요하고 라임병 전염에는 병원균 자체에 더해 진드기(지구온난화 덕분에 세계를 빠르게 넓히고 있는 모기 이외의 또 다른 위협적인 감염원)가 필요하다. 메리 베스 파이퍼Mary Beth Pfeifer가 지적하는 대로 라임병 환자 수는 일본, 터키, 대한민국에서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2010년까지만 하더라도 라임병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지만(즉 발병 사례가 0건이었지만) 지금은 감염자가 매년 수백 명씩 늘어나고 있다. (171쪽)
기후변화 대응의 enemy 국가 중 하나였던 호주 사례. 호주는 여러 모로 욕할 구석이 참 많은 나라다. 기후변화 대응도 그렇고, 난민 문제도 그렇고. 하지만 사실 한국 사람이 호주를 욕할 처지는 못 된다. 노무현 정부 때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교토의정서 체제를 거부하면서(실은 아예 기후변화 자체를 부정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청정개발-기후 파트너십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당시 탄소배출량 감축을 거부한 중국과 인도를 포함해 한국, 일본, 호주 등이 거기 들어갔다. 부시에 참 잘도 발맞춰주던 정부를 보면서 어이없어 했던 기억이 난다.
호주는 풍요로운 사회가 기후변화의 압력에 어떤 식으로 억눌리고 주저앉고 재건하게 될지 미리 보여 주는 선례와도 같다. 현지 자연환경을 무시하고 원주민을 학살하는 가운데 세워진 만큼 현대 호주의 야망에는 늘 위태로운 구석이 있었다. 생태적으로 너무나 혹독하고 까다로운 환경임에도 그 위에 날림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린 것이다. 결국 2011년 호주에서는 단 한 차례의 폭염으로 대규모 고사 현상 및 산호 백화 현상, 식생의 죽음, 토종 새 및 특정 곤충의 개체 수 급감, 해양 및 육지 생태계 변형 같은 일이 벌어졌다. 호주 정부에서 탄소세를 부과하자 탄소배출량은 떨어졌다. 반면 정치적 압력으로 탄소세를 폐지하자 탄소배출량은 다시 증가했다. 2018년 호주 의회에서는 지구온난화를 ‘현재 진행 중이며 실제 존재하는 국가 안전상의 위기'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몇 달 뒤 기후변화 문제에 깨어 있던 당시 호주 총리는 파리기후협약을 이행하려 시도했다는 이유로 사임해야 했다. (201쪽)
의외로 유용하게 쓰이는 도널드 럼스펠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후 혼돈의 열두 가지 요소는 적어도 ‘알려진 지식 known knowns(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지식)’에 속한다. 이런 지식은 연구하기가 그나마 덜 까다롭지만 지식의 범주는 두 가지 더 존재한다.
우리는 기후변화가 실재한다는 사실, 인간이 기후변화를 초래한다는 사실, 기후변화가 해수면을 높이고 북극 빙하를 녹인다는 사실 등 지구온난화에 관해 꽤 많은 지식을 알게 됐다고 자신하지만 아직 딱 그 정도 알고 있을 뿐이다. 10년 전에는 기후변화와 분쟁의 관계를 다루는 논문이 거의 없었다. 20년 전에는 기후변화와 경제성장의 관계를 다루는 유의미한 논문이 전혀 없었다. 50년 전에는 기후변화 연구 자체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지금으로부터 50년 뒤에 우리가 얼마나 되는 지식을 알고 있을지 상상해 보자. 북극에서 메탄이 방출되거나 해류 순환 시스템이 급격히 둔화된 탓에 기후변화의 피드백 고리가 활성화돼 있지는 않을까? 대륙 크기만 한 탄소포집 시설을 세우거나 온 인류가 건강 문제에 노출될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이산화황을 붉은 하늘에 퍼뜨림으로써 인류를 보호할 수 있을까? 역시 예측하기 어렵다. 이런 지식은 ‘알려진 미지 known unknowns(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지식)’에 속한다. 럼스펠드의 혜안에 따르면 그보다도 무시무시한 개념(알려지지 않은 미지 unknown unknowns) 역시 남아 있다. (211쪽)
위의 구절은 럼즈펠드가 생각나 옮겨봄. 대테러전 뒤 럼즈펠드의 그 황당한 발언을 비꼬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지식과 무지를 훌륭하게 설명한 저자의 재치. 다만 당시 럼즈펠드의 발언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재미삼아 적어보자면 2002년 럼즈펠드의 발언은 이거였다.
"Reports that say that something hasn't happened are always interesting to me, because as we know, there are known knowns; there are things we know we know. We also know there are known unknowns; that is to say we know there are some things we do not know. But there are also unknown unknowns—the ones we don't know we don't know. And if one looks throughout the history of our country and other free countries, it is the latter category that tends to be the difficult ones."
기후변화의 영향이 눈앞을 가릴 정도로 커지면, 즉 너무나도 전면적이어서 피할 방법이 없어 보이면 기후변화는 더 이상 이야기거리가 아니라 삶 전체를 감싸는 배경으로 바뀐다. 그 자체로 서사를 구성하는 대신 문학이론가들이 말하는 ‘거
대 담론meta-narrative' 자리로 물러나 (종교적 진리나 신념처럼) 이전 시대의 문화를 지배했던 이야기 틀을 대체할 것이다. 그때는 석유와 탐욕 같은 소재를 다루는 서사극이 거의 인기를 얻지 못한다. 또 과거 대공황 시기의 불안감 속에서 스크루볼코미디가 틀 잡혔던 것처럼 앞으로 로맨틱코미디 역시 온난화의 징후를 배경으로 전개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지구온난화를 묘사하는 이야기를 읽더라도 그리고 거기서 공포감이 느껴진다 하더라도 아직 현실도피적인 민족감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더 이상 기후재난을 먼 미래의 일 혹은 먼 나라의 일인 척할 수 없어진다면 우리의 상상은 ‘기후변화에 대해서’가 아니라’ 기후변화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221쪽)
인도 출신 작가 아미타브 고시 Amitav Ghosh는 일종의 기후 대하소설을 기대한다. “일례로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라든가 '9월 11일에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 같은 전형적인 소설에 등장하는 질문을 생각해 보자. 동일한 맥락에서 ‘탄소 농도가 400ppm일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라든가 ‘라르센B 빙붕이 무너질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 같은 질문을 할 수는 없을까?" 아마 그럴 수 없으리라는 게 고시 본인의 대답이다.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딜레마와 드라마는 늘 우리 자신에게 해 오던 이야기에 등장하는 딜레마나 드라마와는 너무나 상이하기 때문이다. (222쪽)
라르센B 빙붕이 무너질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
월러스-웰즈는 기후변화 이야기가 대중문화 장르들 속에서 인기를 끌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첫째, 누구 하나만 악당으로 몰아갈 수 없는 이야기라는 점. 둘째, 영웅이 누구인지도 알쏭달쏭하다는 점. 저자의 말을 빌면 "드라마적인 관점에서 집단행동은 너무나 지루한 소재다."(223쪽)
가장 그럴듯한 악당은 석유 회사일 것이다. 실제로 기후 종말을 묘사하는 영화를 조사한 한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 영화가 기업의 탐욕을 겨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 세계 탄소배출량에서 운송업과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40퍼센트 미만
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더 이상 기업에 모든 책임을 부과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기후변화에 관해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거나 기후변화를 대대적으로 부인하는 기업이라면 충분히 악당이라고 부를 만하다. 기업이 저지를 만한 악행 중에 그보다 끔찍한 악행은 거의 없으며 앞으로 한 세대만 지나도 석유 회사의 지원을 받은 기후부인주의는 현대에 자행된 만행 중에서도 인류의 건강과 복지를 해치는 면에서 가장 악랄했던 사기극으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악랄함이 곧 책임으로 이어지진 않으며 단 한 개의 나라(세계 10대 석유 회사 중 2개만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한 개의 정당만이 기후부인주의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세상에 초강대국이 미국 하나였던 시절에는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가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세계의 움직임을 저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017년에 미국은 세계 탄소배출량의 15퍼센트만을 차지하며 미국 국경을 넘어서면 기후부인주의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지구온난화의 책임을 오로지 미국 공화당이나 공화당의 뒤를 봐주는 석유 회사에게만 돌리는 것은 미국 중심주의적인 생각에 가깝다.
아마도 기후변화가 바로 그 미국 중심주의를 깨부술 것이다. 미국 이외의 국가 역시 탄소 배출 문제에 늦장 대응을 하고 있고 실질적인 정책 변화를 강하게 거부하는 상황 속에서 부인주의적인 태도는 문제 축에도 못 낀다. (226-227쪽)
광활한 대지 가운데 22퍼센트는 불과 1992년에서 2015년 사이에 변화를 겪었다. 전 세계 포유류의 무게를 모두 합하면 그중 96퍼센트는 인간과 인간이 기르는 가축의 무게에 해당한다. 나머지 4퍼센트만이 야생 포유류의 무게라는 뜻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고독의 시대를 뜻하는 ‘에레모세 Eremocine’라는 이름이 우리 시대에 더 어울릴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는 그보다도 훨씬 우려스러운 메시지를 전달한다. 바로 우리가 자연환경을 전혀 극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활동이 지속되는 만큼 기후 시스템은 더욱더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 ‘과거’에 그랬듯이 인류는 여전히 자연을 넘어서지도 벗어나지도 못했으며 오히려 자연이 인간을 압도하며 응징하고 있다. 이것이 기후변화가 거의 매일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핵심적인 교훈이다. (234쪽)
비록 인류에게 재난을 극복할 회복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아직 많지만 그런 회복력은 화석연료를 이용해 쌓은 산업 시대의 풍요 덕분에 존재한다. 중세 시대의 왕은 자신이 전염병이나 기근을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크라카타우 산이나 베수비오 산 근처에 살던 사람은 자신이 화산 폭발을 견딜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지금 부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걱정하기보다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하향조정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또 ‘자본주의'를 단지 시장의 힘이 작동하는 방식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시장만이 공정하고 완벽한 사회 시스템임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생각한다면 최소한 엄청난 종교개혁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기대해야 한다. (252쪽)
일론 머스크가 인류를 구원해줄 것이라 믿고 있는 사람들을 질타하는 내용도 재미있었음. 아마도 머스크는 지구가 망가질 것이니 화성으로 이주하자는 꿈 같은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라 코로나19와 관련된 황당한 소리 때문에 더 위상이 무너졌을 것 같지만.
아이폰 같은 도구는 인류가 혁신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는 착각을 준다. 하지만 출시된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아이폰 사용자 수는 전 세계 인구의 10퍼센트에 미치지 않는다. 스마트폰 전체를 보더라도 사용자 수는 전 세계 인구 4분의 1에서 3분의 1 사이에 위치한다. 휴대폰이나 인터넷 등 훨씬 기본적인 기술을 기준으로 통계를 확인해 봐도 전 세계에 퍼지기까지는 최소한 수십 년이 걸렸다. 하지만 전 지구상에서 탄소 배출을 완전히 제거하기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20~30년에 불과하다.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데 요구되는 기술 혁신의 규모 앞에서는 실리콘밸리에서 이룬 어떤 업적도 왜소해 보인다. (271쪽)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미셸 마요르의 발언이 생각난다. "외계행성은 너무 멀다. 아직 살만한 우리 행성부터 보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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