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인샤알라, 중동이슬람

무함마드 만평 파문 총정리

딸기21 2006. 3. 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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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의 이른바 ‘무하마드 만평시위’에 대한 뉴스가 한동안 시끄럽게 외신을 장식했다. 이슬람권의 중심인 아랍국들에선 시위가 어느 정도 사그러들었지만 파키스탄과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는 무슬림들의 항의시위와 유혈충돌이 그치지 않고 있다. 석달 가까이 계속된 시위로 곳곳에서 사망자가 속출했고, 결국 최대 피해자는 유럽인들이 아닌 무슬림들이 되고 있다.


만평, 항의, 폭력, 유혈사태. ‘비무슬림’의 시각에서 보기에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격렬한 만평 시위는 왜 일어난 것일까. 무슬림들은 ‘별것도 아닌’ 신문 만화에 어째서 그렇게 거세게 항의하고 나선 것일까.

‘표현의 자유’와 센세이셔널리즘을 오간 언론들 

이 사건을 바로 보는 첫걸음은 원인이 된 만화들을 보는 것이다. 만평 파문을 촉발한 것은 덴마크 일간지 율란츠포스텐이다. 신문에는 무함마드를 테러범으로 암시한 그림을 비롯해 만화 12점이 실렸다.

‘어째서 기분나빠하는지’를 알려면 과연 이것들이 ‘어떤 그림들인지’를 알아야 한다. 한국의 무슬림 인구가 10만 명에 이르지만(한국이슬람중앙회 통계) 한국 사회에서 무슬림들의 발언권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한국의 일부 언론은 무하마드 만평을 거리낌 없이 지면과 화면에 내보냈지만, 국내 언론에 공개된 만평은 문제가 된 12점 가운데 가장 ‘덜 모욕적인’ 무하마드의 얼굴 그림 정도였다(‘덜 모욕적인’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무하마드의 머리에 폭탄 모양의 터번을 얹었다는 것만으로도 무슬림들이 불쾌하게 여기기에는 충분했다). 

이슬람에서 예언자 무하마드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라는 사실은 이미 여러 언론에서 짚었다. 그러나 엄격한 신성모독 기준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12점의 만평들은 노골적으로 이슬람을 모독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라는 혐의가 짙다. “이제 테러는 그만해, 너희들에게 줄 처녀가 모자라잖아.” 서방에 맞선 무자히딘(전사)들에게 예언자 무하마드가 “처녀가 모자란다”고 말하는 내용을 그려놓고서 “모독할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니, 무슬림들에게 그런 해명이 받아들여질 리는 없지 않은가. 

‘처녀들’은 꾸란(코란)에서 천국을 묘사할 때 명시돼 있기 때문에 그것조차도 유럽인들의 횡포로 볼 수만은 없겠지만,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경전을 악용해 서방에 맞선 모든 투쟁을 희화화하는데에 동의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만화들을 앞다퉈 실은 뒤 유럽 언론들은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다. 

물론 유럽 전체가 ‘표현의 자유’ 옹호론자들로 뒤덮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표현의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혹은 윤리적인 이유로 종종 제한을 받아왔으며 ‘무제한적인 표현의 자유’가 용인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만평 항의시위가 한창이던 2월20일 오스트리아 법원은 나치 옹호론자였던 영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어빙(67)에게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어빙은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학살)를 부정하는 것을 범죄행위로 규정한 법에 따라 지난해 체포됐다. 법정에서 어빙은 자신의 견해가 잘못됐음을 시인했지만, 재판부는 ‘잘못을 시인하는 태도가 진실해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 뒤 오스트리아 학계에서는 학자들이 다양한 관점과 학설을 제시할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는 반발이 터져나왔다. 표현의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인정해줄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해를 미치는 견해’를 발표하는 것에 제약을 가할 것인가. 각각의 주장은 나름의 논거를 갖고 있고, 제각기 타당한 측면이 있다. 

문제는 유럽(내지는 서방)의 태도가 무슬림들에게 극히 이중적으로 비친다는 사실이다. 홀로코스트를 부인할 자유는 없지만 무슬림들을 모독할 자유는 있다? 미국에 미운털 박힌 이란의 한 관영 언론이 ‘홀로코스트 만평’을 공모하겠다고 나선 것은 유럽의 이중 잣대를 비꼬기 위한 것이었지만, 서방(그리고 한국)의 몇몇 언론들은 이란을 우습게 묘사하는 데에 급급했다. 이란의 행동에 이스라엘은 ‘이란 폭격론’까지 주장했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은 이슬람권이 미국과 서방을 미워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국 언론들이 무하마드 만평을 경쟁적으로 싣는 가운데서도 영국의 가디언 같은 좌파 언론과 미국 워싱턴 포스트 등은 그림을 싣지 않았다. 이 신문들이 내세운 입장은 “다만 도발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만평을 싣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만평을 싣는 언론들의 행위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센세이셔널리즘에 치우쳐 있음을 지적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만평을 게재한 유럽 언론들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면서 신문판매고가 급증하는 상업적 효과를 거뒀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유럽 언론들은 무하마드 만평을 놓고 ‘표현의 자유’와 센세이셔널리즘 사이에서 줄타기를 벌인 셈이다. 

뿌리깊은 이슬람 차별과 ‘이주민 몰아내기’ 

앞서 한국의 무슬림 수가 10만 명이라고 했지만 그 중 70%는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온 외국인들이다. 유럽도 상황은 비슷하다. 2대, 3대 째 유럽에서 거주해온 무슬림 주민들도 있지만 1970년대 이후 건너온 이들이 대부분이다. 덴마크의 경우 인구의 3%인 17만 명이 무슬림인데 아랍계 이주민은 오히려 적고 터키와 파키스탄, 북아프리카, 이란 등지에서 온 노동자들이 많다. 

이슬람에 대한 서방의 적대적인 인식의 뿌리를 찾기 위해 십자군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무슬림 주민들이 율란츠포스텐의 만평에 격분한 이유는 ‘표현의 자유’ 이면에 있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때문이기도 하다. 

덴마크의 경우 국민들의 종교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돼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종교가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입헌군주국인 덴마크는 루터파 복음주의를 국교로 규정해놓고 있다. 이밖에 기독교의 다른 종파나 유대교는 헌법상 지위를 보장받는다. 그러나 무슬림은 그렇지 못하며, 교회가 정부 산하 기구의 하나이기 때문에 출생·사망신고를 교회에서 해야 한다. 

파키스탄 출신으로 덴마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코미디언은 지난달 5일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이 나라에선 개도 매장지가 있는데 무슬림에겐 이슬람식 매장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썼다. 이런 차별의 일선에 서있는 것이 바로 만평들을 게재한 율란츠포스텐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만평 파문은 유럽의 우파 신문들이 ‘몰고간’ 기색이 역력하다. 율란츠포스텐은 덴마크의 대표적인 우파 기독교 신문이고, 이슬람 문제가 아니더라도 도발적인 보도로 수차례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고 한다. 만평 게재에 항의하는 이들은 특히 덴마크에서 2001년11월 우파 정권(이 정권의 총리는 만평 파문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누차 말했었다)이 집권한 이래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 전반의 적대감이 커졌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율란츠포스텐 같은 우파 언론들의 부추김이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만평들을 실으면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던 프랑스수아르라는 신문은 발행부수 4만5000부의 작은 매체인데, 역시 센세이셔널리즘으로 벌이를 해온 우파 대중지로 알려졌다. 덴마크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백인 원주민과 무슬림 이주민들 간의 불화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재작년 무슬림 광신도가 테오 반 고흐라는 영화감독을 살해한 뒤 기독교도들의 반격으로 대대적인 ‘모스크(이슬람사원) 파괴’가 벌어졌다.

지난해 영국 런던에서 발생한 7·7테러와 프랑스 파리 소요사태에서 보이듯 유럽 내 무슬림 차별은 이미 심각한 상태다. ‘백인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무슬림들’에 대한 적대감이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그것을 상업주의 언론이 돈벌이에 이용하려 하면서 만평 사태가 불거져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유럽 자체의 문제점 뿐 아니라 이슬람권 전역의 반미 감정이 반(反)서방·반기독교 감정으로 확산되면서 폭력사태로 치달은 측면도 물론 무시할 수는 없다.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와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으로 이슬람권에서 반미 감정이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번 만평 파문에서 미국은 한 발 비껴서 있었으며 당사국이 아니었지만, 무슬림들의 분노는 결국 미국을 향해 갔다. 인도네시아 미국대사관이 공격을 받았고, 아프간과 파키스탄에서는 미군 기지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3월4일 부시대통령의 파키스탄 방문 때에도 격렬한 시위가 계속됐다.

이슬람 세계 내부의 요인들

앞서 무슬림들이 무하마드 만평에 격렬한 반응을 보인 이유들을 나열했지만, 이슬람권 내부의 문제도 간과할 수는 없다. 자신들의 종교를 모독한 데 대한 이슬람권의 대응은 성숙하지 못했고 폭력적이었다. 일본에서 혐(嫌)한류 만화가 출간됐다고 해서 한국인들이 일본 기업 건물을 부수거나 서로 죽고 죽이진 않는다. 만평 사태는 분명히 이슬람권의 전근대성과 고질적인 모순들을 반영하고 있다.

만평을 놓고 두드러지게 독설을 내뱉었던 것은 이란이었고,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라크 등 이슬람권 전역에서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가장 극렬한 반응을 보인 곳, 아직까지 시위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곳은 파키스탄이다. 파키스탄은 인구로 보아서는 인도네시아에 이어 2위 규모의 이슬람국가이지만 이슬람권에서는 ‘변방’에 속한다. 파키스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만평 폭력시위가 지역 내 억압구조와 관련돼 있음을 시사한다. 

파키스탄은 아프간전쟁 때 미군 기지였고 지금도 알카에다 체포 작전이 전개되고 있다. 부시대통령의 방문에 맞춰 파키스탄 정부군은 대대적인 탈레반 공격작전을 벌였으며 4일에는 아프간 접경지대에서 정부군이 ‘탈레반 잔당’ 56명을 사살했다.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아프간 전쟁 때 기지사용을 허용하면서 미국으로부터 3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받았다. 하지만 국민들에게는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으며 무샤라프 정권은 이슬람 세력을 계속 탄압하고 있다. 미군과 정부군의 `탈레반 제거작전'으로 민간인 피해가 계속되고 있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가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만평 항의시위가 유혈극으로 번져 기독교·무슬림 주민 간 학살에 가까운 참사가 일어난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는 독재정권이 종교 갈등을 부추기며 국민들을 억압해왔던 곳이다. 사니 아바차를 비롯한 독재자들은 남부 기독교도들과 북부 무슬림들을 이간질시키며 정권을 유지했다. 아바차 정권이 무너지고 올루세군 오바산조 대통령이 이끄는 새 정권이 들어섰지만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만평 사태가 일어난 뒤 덴마크 대사관 방화사건이 벌어진 레바논은 1980년대 기독교 세력과 무슬림 세력이 내전을 벌였던 곳이다.

독재정권의 압제를 받아온 이슬람 국가들에서 국민들은 선거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의 교훈으로 새겨 왔다. 이런 나라들에서 증오의 화살이 독재정권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준 미국과 서방을 향하게 되고 폭동에 가까운 대중 시위로 이어진 측면이 있다.

한국 사회는 어떤가. 이슬람이라는 특정 종교에 대한 탄압이라든가, 이슬람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여태까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수치상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무슬림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유럽이나 마찬가지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측면에서는 유럽보다 낫다고는 자신하기 힘들 것 같다. 한국의 언론이 유럽의 상업주의 언론보다 낫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듯하다. 표현의 자유, 이주 노동자, 종교 갈등,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 한국 사회는 격렬한 논쟁에 부딪친 적도 없고 해법을 찾기 위해 사회 전체가 공동의 노력을 기울인 경험도 적다. 유럽에서 벌어진 문제들에 대해 한국인들도 ‘우리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고민을 해볼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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