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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터키·그리스 '지중해 가스 싸움'에 UAE가 왜?

딸기21 2020. 8. 26.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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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동부 키프로스의 항구도시 파포스 외곽 공군기지에서 그리스 공군 F-16 전투기가 25일 이륙하고 있다. 키프로스는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와 함께 사흘 간의 합동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AP

 

최근 몇 주 사이에 지중해 동부에서 가스전 탐사와 개발을 놓고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갈등이 불거진 곳은 터키 남쪽 키프로스섬 부근 바다다. 역사적 악연이 겹친 두 나라 다툼에 프랑스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까지 가세해, 가뜩이나 복잡한 지중해의 지정학은 더 꼬이고 있다.

 

BBC방송 등은 터키 해군이 가스전 탐사를 지원한다며 이 해역에 전함을 보냈고 오랜 앙숙 그리스와 물리적 충돌이 우려된다고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긴장이 고조된 계기는 최근 터키의 탐사선이 키프로스와 가까운 그리스의 크레타섬 부근 해역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리스는 프리깃함들을 보내 탐사선을 호위 중인 터키 해군 함정과 대치했다. 지난 12일에는 터키 함정 카말라이스 호와 그리스 함정 림노스 호가 부딪치는 ‘작은 충돌’도 일어났다.

 

터키와 그리스는 키프로스를 놓고 반목해왔을 뿐 아니라, 오스만투르크 시절 그리스를 통치한 터키와 그로부터 독립한 그리스의 역사적 갈등까지 겹쳐 있다. 터키가 근래 전방위로 영향력을 확장하면서 그리스의 경계감은 극도로 높아져 있다.

 

프랑스는 그리스를 돕는다면서 전함 2척과 폭격기 2대를 보냈다. 멀리 걸프의 아랍에미리트연합(UAE)까지 그리스 편에 서서 크레타섬 공군기지에 배치돼 있던 F-16 전투기를 띄웠다. UAE 전투기가 배치된 것은 합동 군사훈련을 위한 연례적인 일이었지만, 최근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와 맞물려 파장을 부르고 있다. 터키는 앞서 UAE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자 “팔레스타인을 배반한 위선적인 합의”라는 외교부 성명을 내는 등 맹비난한 바 있다.

 

지중해 동부 가스전 탐사를 놓고 터키와 그리스의 해군 함정들이 대치하면서 최근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자료 BBC

 

그리스 진영에 맞서 터키는 25일부터 지중해 군사훈련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24일 그리스가 가스전 탐사에 “훼방을 놓고 있다”며 “해상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라 비난했다. 이 지역에서 좋지 않은 일들이 벌어진다면 “모두 그리스 탓”이라고 했다.

 

군사력 배치 이전부터 터키와 그리스는 으르렁거렸다. 지난달 독일이 중재에 나서면서 터키가 지질조사 작업을 잠시 중단했지만 협상은 이달 초 결렬됐다. 터키는 그리스가 이집트와 멋대로 해상 경계선을 정하는 바람에 협상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비난했다. 하이코 마스 독일 외교장관은 다시 두 나라를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 25일 앙카라와 아테네를 방문할 계획이지만 중재가 성사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갈등의 표면적인 이유는 가스전을 둘러싼 에너지 다툼이다. 지중해 동부에는 이스라엘이 보유한 레비아탄 가스전과 타마르 가스전, 키프로스 섬 남쪽의 아프로디테 가스전과 칼립소 가스전 등 여러 가스전이 있다. 터키가 탐사하는 곳은 키프로스 해역과 바로 붙어 있는 구역인데, 그리스와 이집트가 서로 영해라 주장하는 해역과 이어져 있다.

 

키프로스 섬은 1970년대 그리스계와 터키계가 내전을 벌인 뒤 둘로 갈라졌다. 남쪽의 그리스계 키프로스공화국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고 유럽연합(EU)에도 가입돼 있다. 그러나 ‘북키프로스터키공화국’은 터키만 인정하고 있으며 국제사회는 사실상 터키의 위성국가 혹은 역외 영토로 본다.

 

지중해 동부에서는 2006년부터 가스전 탐사가 크게 늘었다. 2010년 미국 지질조사국(USGS) 자료에 따르면 이 일대의 레반트 해저분지에는 원유 17억배럴과 천연가스 3조4500억㎥가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좁은 바다를 둘러싸고 유럽과 중동과 북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영유권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데다, 다국적 기업들의 개발권 경쟁도 치열하다.

 

15일 지중해의 그리스 섬 티노스의 항구에 그리스 군함이 정박해 있다.  AP

 

유럽외교관계협회(UCFR) 자료에 따르면 이집트 북쪽 조흐르 가스전은 이탈리아 에니(ENI)와 러시아 로스네프트, 영국 BP, UAE의 무바달라가 지분을 나눠갖고 있다. 서나일델타 가스전은 BP와 독일 DEA가 공동 운영한다. 남키프로스의 글라우쿠스 가스전은 미국 엑손과 카타르석유가, 커틀필드 가스전은 에니와 토탈과 한국가스공사가 투자했다. 레바논에서는 토탈, 에니와 러시아 노바텍이 가스전을 개발 중이다. 이스라엘 가스전들에는 미국 노블이 대거 투자했다. 팔레스타인 가자마린 가스전에는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 회사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

 

지난해 1월 7개국 에너지장관들이 갈등을 풀기 위해 ‘동지중해가스포럼’을 열었으나 레바논과 터키는 참여하지 않았다. 5개월 뒤 남키프로스는 미국 노블, 영국 셸, 이스라엘의 델렉에 아프로디테 가스전의 25년 운영권을 내줬다. 터키는 반발하며 주변 해역에서 시추선을 늘렸다. 유럽국들은 영국령 섬 몰타에서 회의를 열고 터키를 비난했다.

 

터키는 현실적으로 에너지를 확보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올초 열린 터키의 ‘투르크스트림’ 가스관 개통식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다. 가스 공급으로 주변국들을 길들여온 러시아는 동지중해 가스전 개발에도 적극 관여하려 하고 있으며 유럽은 이를 무엇보다 경계한다. 몇 년 새 터키에 LNG 판매를 늘렸던 미국도 러시아와의 밀착에 눈총을 보냈다.

 

니코스 덴디아스 그리스 외교장관(왼쪽)과 니코스 크리스토둘리데스 키프로스공화국 외교장관이 18일(현지시간) 키프로스의 니코시아에서 터키의 해상활동에 대해 논의한 뒤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신화

 

겉으로 봐서는 가스전 싸움이지만 이번 군사적 긴장 뒤에는 다른 지정학적 요인들도 많다. 지중해 서쪽부터 동쪽에 이르기까지 숱한 이슈들이 쌓여 있고 각국의 편가르기가 심하기 때문이다. 시리아 내전을 놓고도 아랍권 안에서, 그리고 아랍국들과 터키 사이에 입장이 엇갈린다. 터키는 또 아직도 계속되는 리비아의 정치적 갈등에 손을 뻗치고 있다. UAE는 이집트, 러시아와 함께 리비아 동부의 리비아국민군(LNA)을 지원하는 반면, 터키는 트리폴리의 통합정부(GNA) 세력을 밀어주고 있다. 지난해 터키는 통합정부 측과 해상경계선을 정했고 그리스가 배타적경제수역(EEZ)이라 주장하는 리비아 북부 바다의 가스탐사 계약을 갱신했다.

 

탐사선을 보내면 각국은 탐사활동을 보호한다며 해군력을 배치한다. 가스전 다툼은 기본적으로는 해상 영유권 갈등이지만 바다에 대한 지배를 굳히고 나면 거기서 나온 가스를 파이프라인으로 연결해 다른 나라로 보낼 수 있다. 가스공동체로 각국이 합종연횡하게 되고 결국 패권다툼과 이어지게 된다. 오스트리아 안보전문가 미하엘 탄춤은 CNN에 “프랑스와 UAE가 중동과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터키와 경쟁하고 있다”며 “지중해 동부는 터키의 국익에 결정적이고, 프랑스와 UAE가 터키를 압박하기 좋은 곳”이라고 분석했다.

 

BBC는 미국이 빠지면서 생긴 패권 공백을 틈타 갈등이 더 높아진 것으로도 해석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지중해의 지정학보다는 실리에 치중하는 경향이 짙다. 트럼프 대통령과 에르도안 대통령이 절친이라지만 시리아 사태 등 중동 문제를 놓고 미국과 터키의 균열은 점점 커지고 있다. 미국은 터키가 러시아 지대공 미사일을 사들이자 F-35 판매계획을 보류했다. 지난해 유럽국들이 몰타에서 터키를 비난할 때에도 말을 보탰다.

 

유럽도 분열돼 있다. 터키와 관계가 깊을 수밖에 없는 독일은 중재하려고 하지만 지중해에 면한 프랑스는 영향력을 키울 기회로 보고 노골적으로 그리스 편에 섰다. 터키와 그리스, 프랑스는 모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이어서 자칫 나토 내부갈등으로 비화할 수도 있다고 CNN은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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