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2억2000만명, 세계 5위 인구대국인 파키스탄에서는 2400만명이 일용직 노동자이거나 비공식 부문에서 일하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노동자’다. 지난 4월 코로나19로 전국 대부분 지역이 봉쇄되면서 이들 중 상당수가 생존의 위기를 맞았다. 시민의 불안이 커지고 폭동 우려까지 나왔다. 파키스탄 정부는 ‘에흐사(Ehsaas) 긴급자금’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봉쇄 열흘 만에 극빈층에게 현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인구 절반에게 혜택을 준 이 프로그램은 세계은행과 유엔 기구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재난 다발국이던 파키스탄의 대응은 팬데믹 시대의 모범사례로 떠올랐다.
이 프로그램은 임란 칸 총리가 지난해 출범시킨 빈곤퇴치기구 에흐사가 주도하고 있다. 2017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후보로도 나섰던 사니아 니슈타르 박사가 에흐사를 이끈다. 내과의사 출신으로 현재 총리의 빈곤경감·사회보호 특별보좌관을 맡고 있는 니슈타르는 19일 프로젝트신디케이트 기고에서 지금까지 12억달러를 1700만 가구에 전달했다고 공개했다.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1억900만명, 인구의 절반에 이른다.
일회성 보조금이고 액수는 가구 당 1만2000루피(약 8만원)에 불과하지만 일용직 노동자나 노점상, 문 닫을 판인 호텔과 식당 점원들, 일자리가 불안정한 경비원과 운전기사 등에게는 요긴한 돈이라고 니슈타르는 설명했다. 세계은행 추산치를 보면 2018년 기준으로 파키스탄의 1인당 연간 국내총생산(GDP)이 1800달러(약 210만원)임을 감안하면 이해가 되는 일이다.
에흐사는 코로나19 이전에도 여성 가장이 이끄는 빈곤층 700만 가구의 통장에 매달 2000루피를 넣어주는 ‘카팔라트(Kafaalat)’, 빈곤층 엄마와 2살 이하 아이들에게 영양공급을 해주는 ‘나쇼누마(Nashonuma)’ 시범계획 같은 정책들을 시행해왔다. 과거 브라질 노동자당 정부가 했던 ‘보우사 파밀리아’와 마찬가지로 정부가 영양 개선을 직접적으로 지원해 빈곤가정의 기초체력을 높이는 프로그램이다. 이밖에 여성 가구 등 빈곤층에 생산수단 20만개를 내주는 ‘암단’ 프로그램, 자영업자들을 대상으로 한 430억 루피 무이자 대출, 공공-민간 파트너십을 통한 일용직 일자리 연결 시범 프로그램 등을 추진해왔다. 대학생 20만명에게 장학금 200억루피를 지원하기도 했다.
코로나19가 번지면서 특히 에흐사의 현금지원 같은 긴급 구조 프로그램들이 눈길을 끌고 있다. 현지언론 더네이션에 따르면 지난달 말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ADB) 등이 에흐사의 성과를 공유하는 화상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니슈타르는 디지털인프라를 활용해 긴급지원 체계를 만든 과정을 설명했다. 파키스탄 통신국(PTA)에 따르면 이 나라의 인터넷 사용자는 지난해 기준 720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33%에 불과하지만 모바일 사용자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데이터의 효용을 높이기 위해 에흐사는 지난 8일에는 빈곤가정 개별 방문조사를 시작했다.
파키스탄은 코로나19 확진자가 23일 현재 30만명에 육박하며 사망자는 6200명이 넘는다. 인구에 비하면 감염자와 사망자가 상대적으로 적다. 영국 BBC방송은 21일 “젊은이들이 많은 파키스탄은 최악의 팬데믹을 피했다”며 인구구조를 중심으로 설명했다. 파키스탄은 주민 평균연령이 22세이고 65세 이상 고령층은 인구의 4%뿐이다. 한국의 경우 평균연령은 42.6세이고 65세 이상이 15.5%다.
물론 파키스탄 감염자 수가 실제보다 적게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인구 100만명 당 검사 수는 1만건에 불과하며, 이웃한 인도와 비교해도 감염자 수가 너무 적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코로나19에 따른 직접 사망자가 적다 해도 BBC에 따르면 라호르나 카라치 같은 대도시 주변에서 올들어 지난해보다 사망자가 크게 늘었다. 가뜩이나 열악한 의료 인프라에 코로나19 부담이 더해지고 주민들 빈곤이 가중되면서 다른 질병으로 숨지는 사람이 늘었을 수 있다.
2018년 집권한 칸 총리는 전염병 위기와 그로 인한 경제위기를 헤쳐나가는 숙제를 안고 있다. 올해 GDP 성장률을 2.3%로 예상했지만 세계은행은 1%에 그칠 것으로 봤고 그나마도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개발은행 2017년 자료를 보면 5300만명, 즉 파키스탄 인구 4명 중 1명이 빈곤선 이하에서 살아간다. 아사드 우마르 계획개발장관은 1800만명이 팬데믹으로 일자리를 잃을 수 있으며 올해 빈곤선 이하 인구가 2000만~7000만명이 더 늘어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또한 파키스탄은 대표적인 인력 송출국이다. 걸프 산유국들에 나가 일하며 고향에 송금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코로나19에 큰 타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파키스탄은 ‘백신 거부’ 때문에 세계보건기구(WHO)가 골머리를 앓게 만들었던 나라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백신 접종프로그램을 이용해 정보를 수집, 2014년 파키스탄에서 알카에다 우두머리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했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 북서변경주 등 이슬람주의가 많이 퍼진 지역들에서 백신 접종을 거부하고 국제기구 직원이나 보건인력을 공격하는 일들이 일어났고,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졌던 소아마비가 다시 퍼졌다.
국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파키스탄에서 ‘에흐사 현금’은 당장의 효과를 넘어 정부와 행정력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는 길이 될 수 있다. 니슈타르는 “이 프로그램은 정부의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분기점을 마련해줬다”며 “그 유산은 단기적인 구제 이상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구미의 부국들이 감염증 대응에 우왕좌왕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파키스탄은 개도국이라 해도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을 가지고 정책적 개입에 나설 수 있음을 보여줬다. 니슈타르는 “에흐사의 성공 사례는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저소득 국가들에 대규모 국가프로그램을 신속히 시행하는 귀중한 경험을 나눠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에흐사는 10월부터는 빈곤층에게 의료비를 지원하는 ‘타하푸즈’ 프로그램 등에 착수할 계획이다. 대규모 전염병 같은 긴급상황에서 타깃층을 지원하는 ‘충격 대응 정밀 안전망’이다.
중요한 것은 재정이다. 코로나19 이전에도 파키스탄은 재정적자가 GDP의 5.8%에 이르렀다. 안전망을 강화하려면 재정을 늘리는 동시에 공공부문의 부패를 막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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