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미군 공격을 사주했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이를 보고받았다.’ 뉴욕타임스가 이런 보도를 하면서 미국이 ‘제2의 러시아 스캔들’로 다시 시끄럽다. 트럼프 대통령은 늘 그랬듯 “가짜뉴스”라 맹비난하면서 국가정보국장(DNI) 대행으로 석달 간 일하다 물러난 리처드 그리넬(53) 전 독일 주재 대사의 트위터 글을 28일(현지시간) 리트윗했다. 그리넬은 트위터에서 러시아-탈레반 관련 보고를 “한번도 들은 적 없다”며 언론이 ‘정보를 정치화한다’고 주장했다.
그리넬은 트럼프 정부의 외교와 정보 분야 전문가처럼 여러 이슈에 말을 보태고 있지만 사실 두 분야 모두에 전문성이 없고 되레 숱한 논란만 일으켜온 인물이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과 꼭 닮은 행태, 트럼프 대통령을 무조건 옹호하고 나서는 태도로 눈도장을 찍어 최근 실세로 부상했다.
기독교 복음주의 가정에서 태어나 복음주의 대학을 나온 그리넬은 공화당 조지 W 부시 정부 때 유엔 주재 미국 대표부의 대변인을 지냈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유엔 대사일 때 함께 일하기도 했다. 국무부에서 나온 뒤에는 정치컨설팅회사를 운영하며 폭스뉴스 등 방송에 출연해 우파 논객으로 이름을 알렸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2년 수전 라이스를 유엔 주재 대사로 임명하자 낙마시키려고 흠잡기 공작에 나섰지만 결국 실패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라이스는 그리넬을 “내가 본 가장 거만하고 부정직한 인물”이라 평했다고 한다.
그리넬은 2016년까지 트위터에 트럼프 후보 비판글을 올리다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공식 지명되자 바로 태도를 바꿔 극찬 모드로 돌아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15개월간 공석이던 독일 주재 미국 대사로 2018년 그를 전격 임명했다. 그리넬은 그 해 5월 베를린에 부임하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미국 극우매체 브레이트바트와 인터뷰하면서 유럽 극우파들을 공개적으로 지지, 앙겔라 메르켈 정부를 경악하게 했다. 힘겹게 유럽연합(EU)을 이끌어온 독일을 비꼬듯 오스트리아 극우파 총리를 치켜올리며 유럽의 정치 흐름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관이 주재국 정치에서 중립을 지키도록 규정한 비엔나외교관계협정 위반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리넬은 독일 내 정치이슈에 대해서도 “어리석다”는 둥 수시로 품평을 해댔다. 미국 언론을 만나 메르켈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예사였다. 독일어는 한 마디도 못하면서 트위터에 영어로 독일 비난만 줄창 올렸다. 그가 “이란과 거래하는 독일 기업들을 제재할 수 있다”는 글을 올리자 룩셈부르크 외교장관이 “미국이 동맹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준다”고 비판했을 정도였다.
올해 2월 워싱턴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는 내내 독일과 갈등을 빚었다. 독일에게 국방비를 늘리라고 압박하고, 러시아 천연가스관 공사를 강행하면 독일 기업들을 제재하겠다고 위협했다. 중국 화웨이를 5G 통신망 사업에서 배제하라고 고압적으로 요구했다. 지난해 1월 독일 잡지 슈피겔은 정치인들과 전현직 외교관, 관리 등 30명을 인터뷰한 뒤 “독일측 인사들은 그의 극우적인 세계관에 질려 만나는 것도 싫어한다”고 보도했다. 볼프강 쿠비츠키 연방의회 부의장은 “자신이 점령지 총독이라고 생각하는 미국 외교관”, “아직도 미국이 독일을 점령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말까지 했다. 독일 정치권에서 그리넬을 추방하라거나 ‘기피인물(persona non grata)’로 지정하라는 요구가 나올 때마다 메르켈 총리가 억눌러야 했다고 미 CBS방송은 전했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그리넬에 힘을 실어줬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 주둔 미군 문제였다. 미군 규모를 줄여 ‘돈 안 내는 독일을 벌주자’는 것은 그리넬의 지론이었다. 미국 군사전문가들과 공화당 인사들의 반대 속에서도 백악관은 미군 감축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리넬은 베를린을 떠난 뒤에도 악담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달 24일 그는 독일을 겨냥해 “미국인들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미국의 압박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큰 실수”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그리넬은 대사 재임 중에도 트럼프 대통령의 ‘코소보 특사’ 자격으로 백악관을 오갔다. 대사 임기는 공식적으로 이달 1일 끝났지만 2월부터 5월까지는 정보기관들의 정보를 취합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DNI 대행을 했다. 지난 3월 하원이 올 대선 관리에 관해 묻겠다며 출석을 요구하자 그리넬은 “민감한 주제에 대해 얘기하면 대통령을 화나게 할 수 있다”며 거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송 인터뷰에서 “그리넬은 슈퍼스타다, 용감하다, 내가 본 중에 가장 일을 잘 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그리넬의 돈거래 스타일도 트럼프 대통령과 비슷하다. 그는 독일 대사를 하면서도 폭스뉴스나 우익미디어 뉴스맥스 등과 계약하고 고정 출연을 했다. 컨설팅업체를 운영할 적에는 중국, 콩고민주공화국, 이란, 카자흐스탄, 소말리아 등의 고객들과 거래하고 있다고 홍보했다가 뒤에 웹사이트를 동결시켰다. 이런 인물이 외교·안보와 관련된 일을 한 것 자체가 로비관련법(FARA) 위반이라고 민주당은 비판한다.
트럼프는 그리넬의 주장을 근거로 러시아-탈레반 거래설을 일축했으나, 그리넬 자체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의심받는 인물이다. 블라디미르 플라하뉵은 몰도바의 사업가 출신 정치인으로, 미국·유럽에서 러시아의 프로파간다를 퍼뜨려왔다. 부패혐의로 수사받다가 지난해 몰도바에서 도피했다. 지난해 초 미 국무부가 플라하뉵을 제재 대상에 올리자 그리넬은 이에 반대하는 글을 언론에 기고했고 둘의 관계에 시선이 쏠렸다. 그리넬의 컨설팅회사와 공화당 계열의 또 다른 로비회사가 중·동부 유럽에서 여러 정치사건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리넬은 관련 수입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리넬은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라는 점에서 트럼프 주변 인사로서는 예외적인 인물로 불린다. 미국 언론들은 그가 DNI 대행이 됐을 때 “미 정부 내 처음으로 동성애자가 각료급 직위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모든 면에서 기독교 극우파 성향을 드러내왔고, 최근에는 트럼프 대통령을 편들고 ‘좌파’를 비난하는 발언을 하루가 머다하고 쏟아내고 있다.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졌다는 언론보도는 ‘가짜뉴스’라 공격했고, 볼턴 전 보좌관의 회고록은 “저의가 의심스럽다”고 비난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그리넬이 트럼프 대선 캠프에 합류해 자금모금과 홍보전략에 관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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