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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흑인 레이서에게 '올가미'를…나스카와 인종주의의 오랜 결탁관계

딸기21 2020. 6. 23. 22:01

22일(현지시간) 미국 앨라배마주 탤라데가 자동차경주장에서 흑인 레이서인 부바 월리스가 차에 오르고 있다. 월리스의 동료들이 그를 바라보며 연대의 박수를 치고 있다. 전날 월리스의 차고에서는 백인들이 흑인을 린치·살해할 때 쓰던 올가미가 발견됐다.  탤라데가 AFP연합뉴스

 

올해 26세인 부바 월리스는 미국 자동차경주대회 나스카(NASCAR)에서 시보레 카마로 ZL1 1LE을 모는 흑인 레이서다. 앨라배마주 모빌에서 태어난 그는 12살 때 자동차경주에 발을 디뎠다. 10년 전 나스카 지역대회에서 시작해 X피니티시리즈, 트럭시리즈를 거쳐 2017년 ‘최고위급’ 경주인 컵시리즈에 진출했다. 7차례 나스카 챔피언을 따낸 리처드 페티가 운영하는 팀에 소속돼 4년간 89번 출전했다.

 

백인들이 지배적인 나스카에서 월리스는 ‘가장 성공적인 흑인 레이서’로 불린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컵시리즈에 모두 출전할 자격을 가진 흑인 레이서는 월리스 단 한 명이다. 컵시리즈에 풀타임으로 출전하는 흑인 선수가 나온 것은 1971년 웬델 스콧 이래 월리스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최근에는 자동차경주가 아닌 다른 일로 시선을 모았다. 지난달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에 의해 숨진 뒤 적극적으로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M)’ 운동을 지지하며 목소리를 낸 것이다. 플로이드 사건 뒤 나스카 측은 남부연합기 사용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 유지를 주장한 남부 주들의 깃발인 남부연합기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상징이다. 이 깃발이 경기장에서 쓰이지 못하게 금지해달라고 앞장서서 요구한 사람이 월리스였다.

 

지난 21일(현지시간) 그의 차고에서 ‘누스’가 발견됐다. 누스는 과거 백인들이 흑인들을 린치·살해할 때 쓰던 올가미다. 올가미에 걸린 흑인들이 나무에 매달린 모습은 미국의 잔혹한 인종주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과 그림으로 많이 남아 있다. 1862년 텍사스주 갱스빌에서는 남부연합 측이 흑인 41명을 린치하고 한번에 살해한 ‘갱스빌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지금도 텍사스,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등 여러 주에 과거 흑인 살해에 쓰인 ‘목매다는 나무(hanging tree)’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달 10일 캘리포니아 남부 팜데일에서는 나무에 목이 매여 숨진 흑인 남성 2명의 시신이 발견됐다. 당국은 곧바로 자살이라 발표했지만 거센 반발이 일자 번복하고 재수사에 나섰다. 흑인 주민들은 린치를 떠올리게 하는 이런 방식으로 흑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며 증오범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 등은 전했다.

 

탤라데가의 나스카 경기장 잔디밭에 22일(현지시간) ‘부바 월리스와 함께 하겠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탤라데가 AFP연합뉴스

 

월리스의 차고에서 발견된 올가미는 흑인들에게 악몽의 역사를 다시 한번 상기시켰고, 노예제가 무너진 지 100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백인들의 우월주의를 노골적으로 보여줬다. 월스트리트저널 등에 따르면 앨라배마주 링컨의 탤러데가 슈퍼스피드웨이 경주장에 있는 월리스의 차고는 소수의 직원들만 드나들 수 있다. 게다가 코로나19 이후로는 차고 출입이 제한돼 있었다. 따라서 나스카와 관련된 ‘내부인’의 소행이거나 내부인이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물결이 미국 전역을 휩쓴 가운데 이런 일이 벌어지자 주 경찰뿐 아니라 연방수사국(FBI)과 법무부도 ‘연방 차원의 범죄’로 규정할지 검토하고 있다.

 

플로이드 사건 뒤 나스카 측이 이미지를 바꾸려 노력하고 있지만 나스카의 인종주의는 해묵은 논란거리였다. 지난 10일 플로이드 사망 여파 속에 나스카 측이 남부연합기를 금지시키자 월리스는 “대단한, 획기적인 움직임”이라며 기뻐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15년 6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흑인 교회에서 백인 극우파의 총기난사로 9명이 숨진 뒤 대회 측이 남부연합기를 금지시키려 했으나 팬들이 반발해 철회했다. 하지만 사실 남부연합기를 대회에 끌어들인 것은 나스카 측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4년 전 대선 때부터 계속 인종주의를 선동해온 것에 대한 비판이 높지만 남부에서는 인종주의가 사라진 적이 없으며, 남부연합기는 금기가 아니었다. 나스카도 이 깃발을 ‘남부의 문화이자 유산’이라며 옹호했다. 앨라배마닷컴의 스포츠 전문가 조지프 굿먼 등에 따르면 지난 수십년 동안 나스카는 이 깃발을 이용하고 상품화했다.

 

경기장 밖에서는 팬들이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M)’ 운동에 적극 동참해온 부바 월리스를 응원했다.  탤라데가 AFP연합뉴스

 

1948년 나스카를 창립한 빌 프랑스는 널리 알려진 인종주의자였고 흑백 분리를 지지했다. 미국 의회 역사상 ‘최장시간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로 유명한 스트롬 서먼드 상원의원은 민권법에 반대하고 인종분리를 옹호하는 데에 나스카를 이용했다. 서몬드를 지지하는 남부의 백인 남성들, ‘딕시’들은 트랙을 에워싸고 남부연합기를 흔들었다. 1960년 나스카는 애틀랜타 경주장을 열면서 1등상으로 남부연합기가 새겨진 우승반지를 선물했다.

 

‘빅 빌’로 불린 프랑스의 장남 빌 프랑스 주니어와 손자인 브라이언 프랑스, 이어 빅 빌의 차남 짐 프랑스가 돌아가며 경영자 자리를 맡는 동안 나스카 경기장에서는 내내 인종적 혐오가 여과없이 터져나왔다. 2008년 나스카는 흑인 직원에 대한 인종차별로 소송에 걸려 2억2500만 달러를 배상했다. 지난 대선 때 나스카 경영자였던 브라이언 프랑스는 인종주의를 부추기는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올가미 사건이 일어난 앨라배마주도 ‘딕시 정서’가 뿌리 박힌 곳이다. 과거 백인 우월주의 정치인 조지 월리스 앨라배마 주지사는 1968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면서 빅 빌과 함께 달링턴의 경주장에서 나스카 레이스를 보며 지지자들을 규합했다. 대선후보가 되지는 못했지만 4번이나 주지사를 연임한 그는 빅 빌을 지원해 탤러데가 경주장을 만들 수 있게 도와줬다고 굿먼은 적었다.

 

그러나 같은 날 일부 나스카 팬들은 경기장 앞에서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인 남부연합기를 흔들었다. 탤라데가 AFP연합뉴스

 

조슈아 뉴먼 등은 <스포츠, 스펙타클, 나스카 네이션>이라는 책에서 나스카의 성장 자체가 미국 남부의 백인 우월주의 정서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고 적었다. 나스카 팬들 중엔 ‘여자 같은 환경주의자들’이나 평화주의자들을 비난하고 유색인종을 혐오하는 이들, ‘강한 미국’에 대한 자부심과 백인우월주의를 숨기지 않는 이들이 많다. 이들에게 나스카의 스피드와 힘은 백인의 육체적 우월성과 남성성을 과시하는 무대다. 1990년대 들어 광범위한 인종주의의 반동이 일어나면서 ‘남부화(Southernization)’가 진행되는 과정에 나스카는 문화적·사회적으로 깊이 결합돼 있다고 책은 지적한다.

 

플로이드의 죽음과 올가미 사건이 변화의 기폭제가 될 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변화의 움직임은 있다. 사건이 벌어진 이튿날인 22일 탤러데가에서는 예정대로 경주가 열렸다. 월리스가 늘 타던 43호 차에 오르자 나스카 챔피언 카일 부시와 절친한 동료 라이언 블래니가 양 옆에서 차를 밀어줬다. 소속사의 대표이자 나스카의 전설인 82세의 페티도 나와 월리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경기 결과 월리스는 14위에 그쳤지만, 그를 지지하는 팬들은 열띤 박수를 보냈다. 적잖은 팬들이 플로이드 사망 뒤 항의의 슬로건이 된 ‘숨을 쉴 수 없다’라는 글귀가 쓰인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하지만 이날도 경주장 밖에서는 극우파들이 남부연합기를 흔들었다. 월리스는 트위터에 “인종차별과 증오를 담은 비열한 행위 때문에 슬프다”면서도 “이번 사건으로 인종차별에 맞선 운동을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겠다”는 글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