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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베네수엘라로 간 유조선…자극하는 이란, 지켜보는 미국

딸기21 2020. 5. 24. 16:44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주재 이란 대사관이 24일(현지시간) 트위터에 올린 유조선 포춘호의 항해 동영상. 포춘호 선상에서 찍은 것이다. 베네수엘라 주재 이란 대사관 트위터 동영상 캡처

 

이란이 베네수엘라에 유조선들을 보냈다. 미국은 ‘제재 위반’이라며 엄포를 놓고 있고, 이란은 ‘유사시 보복’을 경고하고 나섰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유조선들을 둘러싸고 미국과 이란, 베네수엘라의 사이에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타레크 엘아이사미 베네수엘라 석유장관은 23일(현지시간) 이란을 출발한 5척의 유조선 중 첫번째 배인 포춘 호가 곧 도착할 것이라면서 “우리의 친구 이란이슬람공화국이 보낸 배가 배타적경제수역(EEZ)에 진입했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마린트래픽닷컴에 따르면 24일 오전 현재 포춘호는 베네수엘라 북동부 대서양 연안을 항해하고 있으며, 이날 중 목적지인 항구도시 푸에르토카베요의 엘팔리토 정유소에 도착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24일 걸프를 떠난지 한달 만이다.

 

이란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제재를 받고 있는 베네수엘라를 돕기 위해 포춘을 비롯한 유조선 5척에 휘발유 150만배럴을 실어보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적인 석유부국이지만 미국의 제재 때문에 정유시설을 제대로 가동하지 못해 정제유가 몹시 부족하다. 포춘호가 카리브해에 진입하자 지난 21일 미 국방부는 “두 나라가 국제사회의 제재를 어기고 있다는 걸 누차 지적해왔다”고 비난했다.

 

베네수엘라 측은 유조선이 영해에 들어가면 프리깃함과 전투기를 보내 호위할 것이라며 맞받았다. 이란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도 23일 “미국이 지구상 어디에서든 우리 유조선에 문제를 일으키면 우리도 그들에게 똑같은 문제가 생기도록 하겠다”고 경고했다. 카리브해에서 미국이 도발을 해오면 호르무즈에서 반격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는 강경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미 국방부 관리들은 유조선을 나포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고, 포춘이 베네수엘라에 근접한 이후 미군의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미국과 이란이 목소리를 높이고는 있지만 물리적 충돌로 갈 가능성은 현재로선 낮아 보인다.

 

휘발유를 싣고 베네수엘라로 향한 이란 유조선 포춘 호.

 

이란은 베네수엘라에 휘발유를 보내면서 금이나 유로화 등으로 수출대금을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석유와 금을 맞바꿔 미국의 제재를 피해간다는 실리적인 목적도 있지만, 미국의 압박을 무릅쓰고 이란이 베네수엘라와의 협력을 과시한 데에는 최근의 중남미 정치구도와 이란 내부 사정 등 여러 이유가 있다.

 

중남미 여러 국가들과의 외교관계와 비교해볼 때 이란이 베네수엘라와 친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베네수엘라에서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한 이듬해인 2000년부터 두 나라 관계가 긴밀해지기 시작했으며 2005년 이란에 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정부가 들어선 뒤 급격히 가까워졌다. 두 대통령은 미국의 조지 W 부시 정부를 맹공격하면서 국제무대에서 날을 세웠고, 테헤란과 카라카스에 고위인사들의 상호방문이 이어졌다. 2013~2014년 차베스 사망과 이란의 정권 교체 이후에도 양국의 우호관계는 계속됐다.

 

베네수엘라 입장에서 이란은 중동의 맹방이다. 두 나라의 ‘반미’ 성향이 크게 작용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움직임도 영향을 미쳤다. 차베스의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 정부가 들어선 뒤 경제가 흔들리자 서방에선 ‘차베스의 포퓰리즘 탓’이라 했지만 실은 사우디의 석유 증산이 적잖은 역할을 했다고 분석가들은 말한다. 마두로 취임 이듬해인 2014년만 해도 세계 1일 산유량은 9200만배럴 정도로 수요공급이 균형을 이뤘다. 그런데 2015년 사우디가 미국 셰일업계를 누르겠다며 500만배럴 증산을 결정해, 유가가 떨어지고 베네수엘라 경제는 추락했다. 미국은 환호하면서 고강도 제재로 베네수엘라에 치명타를 안겼다.

 

2015년 11월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오른쪽)이 테헤란을 방문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이란 대통령실·타스님통신

 

당시 사우디의 목표는 첫째 미국의 셰일업계에 타격을 입히고 세계 시장점유율을 지키는 것이었으며 두번째는 이란의 경제재건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핵합의가 성사되고 이란의 국제사회 복귀가 기정사실화되자 다급해진 사우디가 유가를 떨어뜨렸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러나 사우디의 정치적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고, 베네수엘라가 큰 피해를 입었다. 반면 이란은 베네수엘라의 친구임을 계속 강조해왔다. 이란이 이번에 보낸 휘발유는 베네수엘라가 2~4주 쓸 양이다. 유조선이 출발한 이후 베네수엘라 소셜미디어에서는 ‘이란에 감사를(#GraciasIran)’ 태그 달기 캠페인이 벌어졌다고 이란 프레스TV는 전했다.

 

이란 쪽에서 볼 때 베네수엘라가 경제적으로는 그리 중요한 파트너가 아니다. 연간 교역 규모가 20억달러를 웃도는 브라질에 비하면 베네수엘라와의 무역액은 한참 못 미친다. 게다가 이란도 정제유가 남아도는 상황은 아니다. 그럼에도 베네수엘라에 기름을 보낸 것은 베네수엘라를 넘어 중남미 전체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과거 브라질의 노동자당 정부 등은 이란과 관계가 좋았지만 몇 년 새 중남미의 좌파 색채가 퇴조했으며 특히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정부는 공공연히 이란을 적대시하고 있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정권마저 지난해 축출됐다. 미국 싱크탱크 애들랜틱카운슬은 지난 2월 “2000년대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이란이 중남미에서 영향력을 확대한 것은 역내 좌파정권들 덕이 컸다”고 지적했다. 이란과 중남미의 정치적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TBA라 불리는 아르헨티나-브라질-파라과이 3국 국경지점에 친이란계 레바논 무장조직 헤즈볼라의 훈련시설이 있었을 정도였다.

 

지난해 5월 베네수엘라 마라카이보의 주유소 앞에 기름을 넣으려는 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마라카이보 로이터연합뉴스

 

하지만 지난해 정권교체를 맞기 전 아르헨티나의 우파 정부는 미국에 발맞춰 헤즈볼라를 테러조직으로 지정하고 소탕작전에 들어갔으며 올들어 온두라스, 콜롬비아, 볼리비아 과테말라 등등이 줄줄이 아르헨티나를 따랐다.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헤즈볼라가 2018년에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주장까지 했다. 모두 이란을 겨냥한 움직임들이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과 헤즈볼라가 라틴아메리카의 ‘무법지대’, 특히 베네수엘라에서 미국을 향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에 유조선을 보냄으로써 이란은 중남미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정책을 중단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 셈이 됐다.

 

이란 내부적인 요인도 있다. 미국 트럼프 정부가 코로나19 방역 실패에 대한 비난 여론을 돌리기 위해 이란을 압박하는 것처럼, 이란 역시 신정(神政)의 위신이 떨어지자 미국을 자극하고 나선 것으로 분석된다. 이란 유조선의 움직임을 주시해온 미군 남부사령부의 크레이그 폴러 사령관은 “이란은 이웃들 사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 할 때면 미국을 건드린다”며 베네수엘라에 유조선을 보낸 것도 “그런 패턴의 일환”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