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e).”
미국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에 9분 간 눌려 숨져가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이 말이 현재 미국 흑인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구호가 돼 미국 전역을 덮었다. 콜로라도주 덴버에서는 시민들이 9분 동안 바닥에 엎드려 ‘숨을 쉴 수 없다’고 외치는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백인 경찰의 흑인 살해 때마다 거리로 나선 시민들이 “흑인들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고 외쳤지만 또 다시 비극이 되풀이되자 분노는 극으로 치닫고 있다. 중국의 ‘홍콩 인권탄압’을 비난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무색해졌고, 주말 내내 미국 여러 도시는 시위와 약탈과 최루탄과 곤봉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미 전역 시위, 곳곳 통금령
30일(현지시간) 뉴욕과 워싱턴 등 미국 전역에서 경찰의 폭력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플로이드가 숨진 이후 닷새 째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위는 대부분 도시에서 평화로운 행진으로 시작됐지만 몇몇 지역에서는 무장경찰과의 물리적 충돌과 약탈, 방화로 격화됐다.
뉴욕에서는 트럼프타워 주변을 시위대가 에워쌌다. 워싱턴의 백악관에서는 시위대가 대통령을 경호하는 비밀경호국(SS) 차량들을 부수고 “정의 없이는 평화도 없다”는 구호를 외쳤다. 텍사스주 오스틴에서는 시위대가 주 의사당과 경찰서로 행진했다. 시카고와 필라델피아에서도 경찰차들이 불길에 휩싸였다.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는 시위 진압에 동원된 국토안보부 보안요원이 총에 맞아 숨지는 일도 있었다. 로스앤젤레스(LA)에서는 경찰이 시위대에 고무탄을 발사했다.
CNN에 따르면 30일 현재 미네소타를 비롯해 조지아, 오하이오, 콜로라도, 위스콘신, 켄터키, 유타, 텍사스 등 최소 8개 주와 수도인 워싱턴에 주방위군이 투입됐다. LA와 시애틀, 마이애미, 애틀랜타, 밀워키 등 여러 도시에 야간 통금령이 내려졌다. 국방부는 ‘군 투입’을 경고했다. 조너선 호프먼 국방부 대변인은 미니애폴리스에 ‘군대의 도움’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주지사가 요청할 경우 “신중한 계획” 하에 군이 투입될 수 있다고 했다. AP통신은 ‘4시간 내 출동’ 또는 ‘24시간 내 투입’에 대비해 몇몇 부대에 이미 대기령이 내려졌다고 보도했다.
펜타곤 “연방군 투입 준비 중”
미니애폴리스와 바로 옆 세인트폴은 며칠 째 마비된 상태다. 그러나 팀 월즈 주지사는 트럼프 대통령의 닦달과 비난 속에서도 연방군의 지원은 요청하지 않고 있다. 지난 28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두 도시에 예비군 성격인 주방위군만 투입했다.
민주당이나 공화당이 아니라 미네소타주 지역정당인 ‘민주농민노동당’ 소속인 월즈 주지사는 교사 출신으로 그 자신이 주방위군에 소속돼 오랫동안 복무했다. 진압병력이 더 큰 폭력을 부르는 걸 막기 위해 백악관의 압박 속에서 버티고 있지만, 사태가 더 격화되면 군이 나서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네소타 주방위군은 30일 트위터를 통해 “1만800명의 방위군 병력을 ‘올인’했다”고 밝히며 폭력을 자제해달라고 호소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1807년의 폭동법에 따라 약탈·방화 같은 소요에 군을 투입할 수 있다. 가장 최근 사례는 1992년 로드니 킹 사건 뒤 LA에서 일어난 흑인 시위 때였다. 그러나 국내 치안유지에 ‘현역’ 군인들을 동원하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에 한하며, 폭동법은 극히 엄격하게 적용돼야 한다고 AP는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총격’을 거론하며 사실상 폭력을 부추기는 상황에서 군까지 투입된다면 혼란과 갈등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 흑인들의 죽음과 시민들의 항의 시위는 몇년 새 계속 반복돼왔다. 2012년 플로리다주 샌포드에서 백인 자경단원 조지 짐머만이 트레이본 마틴이라는 17세 흑인 소년을 사살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듬해 짐머만은 무죄평결을 받았고, 배심원단 6명 중 5명이 백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거센 비판과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2014년 8월 미주리주 퍼거슨에서는 백인 경찰 대런 윌슨이 18세 흑인 소년 마이클 브라운을 사살했다. 윌슨은 기소되지도 않았고, 역시 시위가 벌어졌다. 그 해 내내 백인 경찰의 흑인 살해가 반복되고 시위가 이어졌다.
경찰 폭력, ‘구조적 인종주의’
퍼거슨 사건 당시 미국 언론들 보도에 따르면 백인 경찰에 의해 숨지는 흑인은 연평균 96명으로, 매주 2명씩 경찰에 살해당하는 셈이었다. “숨을 쉴 수 없다”는 구호도 처음이 아니다. 2014년 12월 흑인 노점상 에릭 가너가 뉴욕에서 경찰 6명에 둘러싸여 목 졸려 숨지기 전에 남긴 말도 똑같았다. 당시에도 시민들은 “내가 숨을 쉴 수 없으면 당신도 쉴 수 없다”며 거리로 나왔다.
그 후 6년이 지났어도 미국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음을 플로이드 사건이 보여주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미국의 인종차별 역사는 몇 백 년에 걸쳐 이어져왔다면서 “미니애폴리스의 폭력사건은 미국 경찰의 인종주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적었다. 플로이드가 숨지게 한 경찰관 데렉 쇼빈은 살인죄로 기소됐지만 사법 절차에 대한 흑인들의 불신은 백인 경찰들의 폭력만큼이나 뿌리 깊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흑인들이 느끼는 차별은 더욱 커진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갤럽 조사에서는 트럼프 집권 뒤 백인과 비백인의 행복도 격차가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백인 90%는 현재의 행복도에 만족을 표시했으나 비백인의 경우 수치가 77%로 줄었다. 오바마 집권 때보다 11%나 낮아진 것이었다. 백인들의 75%는 자녀가 미국 사회에서 편안한 삶을 누릴 기회를 갖가질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흑인들 중 같은 응답을 한 사람은 16%뿐이었다. 비슷한 시기 워싱턴포스트-입소스 흑인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5%는 지금이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가기에 ‘나쁜 시기’라고 답했다.
빌 드블라지오 뉴욕 시장은 미국의 현실을 ‘구조적인 인종주의’라고 분석했다. 그는 29일 연설에서 “이런 상황이 계속되게 할 수는 없다”면서 뉴욕을 강타한 코로나19 피해자들 중에도 흑인들이 더 많다는 현실을 지적했다. 최근 뉴욕에서는 백인 여성이 흑인 남성을 모욕하고 범죄 가해자인 양 덮어씌우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공개됐다. 드블라지오 시장은 “미국 백인들의 인종주의” “우리 사회에 침투해 있는 구조적 모순”이라고 했다.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오랜 과제인 사법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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