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뉴욕에서 걸프의 섬까지, 석유거래소와 국제정치

딸기21 2020. 4. 28.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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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의 뉴욕상업거래소(NYMEX). 사진 게티이미지

 

“출발부터 징조가 이상했다. 광적인 매도 주문이 밤새 쏟아졌다. 아침이 되자 누구든 피바다가 펼쳐진 걸 볼 수 있었다. 오전 7시, 이미 유가는 28%나 떨어진 상태였다. 같은 시각 중국 선전에서는 가진 돈을 선물 투자상품에 쏟아부은 20대 커플이 저축한 돈 절반이 날아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가격은 계속해서 기록을 갈아치웠다. 1990년대 아시아 금융위기 이래 최저, 1970년대 석유위기 이래 최저, 그리고 사상 첫 0달러 이하. 사우디 왕자들과 텍사스 채굴꾼들, 러시아 올리가르히들 모두 공포에 떨며 -37.63달러라는 가격을 지켜봤을 것이다.”

 

NYMEX를 뒤흔든 20분

 

미국 블룸버그통신이 지난 25일(현지시간) ‘시장 역사상 가장 이상했던 20분’에 대해 묘사한 내용이다. 앞서 20일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이 마이너스를 기록했을 때 세계가 그 이상한 숫자에 깜짝 놀랐다. 수치가 전광판에 기록된 곳은 뉴욕상업거래소(NYMEX)였으나 블룸버그가 쓴 대로 세계가 그 시장에 이어져 있었다. 뉴욕에 이어 세계의 선물시장이 줄줄이 요동을 쳤다. 28일에도 WTI 가격은 배럴당 10달러선에 그쳤고, 브렌트유는 20달러 아래로 다시 떨어졌다.

 

NYMEX는 영국 런던의 인터컨티넨탈 익스체인지(ICE)와 함께 석유 선물거래가 이뤄지는 양대 시장이다. ICE에서는 유럽 원유인 북해산 브렌트유가 주로 거래되지만 이례적으로 유로나 영국 파운드화가 아닌 달러로 결제된다. 브렌트유는 런던의 국제석유거래소에서 거래되다가 2005년부터 ICE 온라인거래시스템으로 넘어갔다. 계약은 1000배럴 단위로 이뤄지며, 런던이 중심이지만 NYMEX에서도 거래할 수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1월 8일(현지시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함께 이스탄불에서 열린 ‘투르크스트림’ 송유관 개통 기념식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이스탄불 타스연합뉴스

 

선물시장의 상품 목록에도 ‘국제정치’가 작동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러시아산 원유인 우랄스다. 러시아는 ‘러시아 수출원유 블렌드(REBCO)’라는 상품명으로 자국산 석유를 NYMEX에 집어넣으려 애썼다. 2007년 상트페테르스부르크 시장과 뉴욕 시장이 마침내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실제 거래가 이뤄진 적은 한 번도 없기 때문에 계약은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우랄스의 주생산자는 ‘크렘린의 돈줄’로 불리는 가스프롬의 자회사인 가스프롬네프트와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 로스네프트, 루코일 등이다. 이 기업들은 2014년부터는 우크라이나 문제로 미국의 제재까지 받고 있다. 우랄스는 송유관을 타고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수출되지만, 선물거래는 상트페테르스부르크상업거래소(SPIMEX)를 통해 사실상 러시아에서만 이뤄진다.

 

두바이가 오만과 손잡은 이유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통해 산유량을 결정한다. 그러나 석유가 주로 거래되는 곳은 리야드가 아닌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두바이다. 두바이상업거래소(DME)가 중동 석유 거래의 중심이다.

 

두바이는 뉴욕과 런던에 버금가는 시장을 열어 아시아권 벤치마크를 만들겠다며 2007년 상업거래소에서 석유 선물거래를 시작했다. 계산은 적중했다. WTI와 브렌트 중심으로 움직이던 선물시장에서 두바이유도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선물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석유 생산·수출을 위한 인프라 투자도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같은 중동 지역 산유국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한 것이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열쇠는 두바이 옆 오만이 쥐고 있었다. 두바이는 선물거래를 개시하면서 오만과 협정을 맺고 오만원유를 OQD라는 지수로 만든 뒤 두바이 거래소에 집어넣었다. 오만은 사우디의 입김을 받는 이웃들과 달리 이란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걸프의 균형추 역할을 해왔다. 무엇보다 오만은 OPEC 회원국이 아니다. 즉 사우디가 정해주는 생산쿼터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 중요한 것은 지리적 위치다. 사우디의 수출항들이나 두바이 항구는 걸프(페르시아만)에 위치해 있다. 유조선들은 오만만을 거쳐 인도양으로 나가려면 이란과 마주보는 좁은 수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반드시 지나가야 한다. 지정학적 불안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만 수도 무스카트의 석유수출항인 미나알파할은 호르무즈 바깥쪽에 있다. 이란과 아랍 간 긴장이 고조돼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거래망을 움직이는 ‘시카고의 힘’

 

미국의 증시는 뉴욕증권거래소로 대표된다. 원유 선물거래는 NYMEX에서 이뤄진다. 곡물과 원자재 거래는 시카고상업거래소(CME)가 중심이다. 브렌트유는 런던에서, 두바이유는 두바이에서 거래된다. 하지만 시스템의 주인은 결국 미국 기업들이다. 시카고상업거래소를 운영하는 CME그룹과 뉴욕증권거래소를 소유한 ICE가 이 거래소들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파생상품도, 농산물도, 에너지와 광물도 두 회사의 플랫폼을 거치지 않으면 세계시장에 나오기 힘들다는 얘기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카슨의 정유공장에 25일(현지시간)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다.  카슨 AFP연합뉴스

 

시카고상업거래소는 1848년 설립돼 172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금융상품은 물론이고 농산물과 외환, 귀금속 등 온갖 것들이 이 시장에서 거래된다. 1972년 세계 최초로 금융 선물상품을 상장했고 1992년에는 역시 세계 최초로 24시간 전자거래 플랫폼인 글로벡스를 만들었다. 2007년에는 시카고상품거래소와 합병해 세계 최대 선물거래소인 CME그룹으로 통합됐다. 시카고의 거래소들뿐 아니라 S&P·다우존스지수 등의 지분도 갖고 있다. 지난해 매출액은 49억달러였다. 이코노미스트는 CME를 “사람들이 모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거래망”이라고 불렀다. 두바이 석유 선물도 CME의 글로벡스를 통해 거래된다.

 

런던의 상업거래소를 운영하는 ICE는 뉴욕증권거래소를 소유한 회사다. 본사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으며 미국, 유럽, 캐나다, 싱가포르 등 세계 12곳에 금융·상품거래소를 두고 있다.

 

국제거래소 만들려다 실패한 이란

 

이란은 석유 매장량 세계 4위, 천연가스 매장량 3위인 자원부국이지만 미국의 경제제재에 발이 묶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 석유는 팔려나간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제재를 강화하면서 지금은 많이 줄었다지만 2018년의 산유량은 세계 6위였다. 국제사회와 핵합의를 했던 2015년에는 석유 수출량이 세계 16위로까지 올라갔다.

 

오랫동안 고립돼왔던 까닭에 이란은 독자적인 거래소를 만들었다. 걸프에 있는 키시라는 작은 섬에 2008년 이란석유거래소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2012년부터 유로나 이란 리알 등 ‘달러가 아닌’ 화폐로만 거래하겠다고 했고, 이 때문에 소규모 국내 시장으로 전락했다. 지난 1월 초 의회가 예산 지원을 거부해 키시 거래소를 국제적인 시장으로 키우기 위한 계획은 아예 취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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