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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WTI는 오클라호마에 있다…‘석유의 교차로’ 쿠싱

딸기21 2020. 4. 26. 20:18

미국 오클라호마주 쿠싱에 21일(현지시간) 원유탱크들이 늘어서 있다. 총 8000만 배럴 이상의 원유를 저장할 수 있는 탱크 350여개를 보유한 쿠싱은 서부텍사스산원유(WTI)의 거래가 이뤄지는 곳이어서 ‘석유의 교차로’로 불린다.  쿠싱 로이터연합뉴스

 

최근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거래가가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 가격’을 기록했다. 근본 원인은 산업생산의 침체와 코로나19 확산이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원유를 저장할 곳이 부족해진 거래자들이 다음달 가져가야 할 상품의 인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송유관들 교차하는 오클라호마

 

시장을 강타한 WTI의 저장소가 있는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쿠싱은 주민 7200명의 작은 마을이다. 1891년 인디언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기 위해 만든 ‘랜드런법’에 따라 백인 정착민들의 땅이 됐다. 쿠싱이라는 이름은 유통 재벌로 유명했던 존 워너메이커의 비서 마샬 쿠싱에서 나왔다. 20세기 초반 오일붐이 일기 시작했을 때 마샬이 이곳에 정유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쿠싱이라는 지명은 일반인들에겐 덜 유명하지만, 미국의 벤치마크(기준) 유종인 WTI가 거래되는 곳이기 때문에 ‘석유의 교차로’라고 불린다. 원유생산업체와 트레이더들이 쿠싱에서 거래를 하면 그 가격이 먼 뉴욕의 NYMEX에서 지표로 표현되는 것이다.

 

쿠싱은 작은 마일이지만 미국 복판에 있다는 이점이 있다. 세계에 노출된 것은 엑손모빌이나 텍사코 같은 석유회사들이지만 저장시설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업체와 파이프라인 운영업체도 그 못잖게 중요하다. 미 전역을 연결하는 송유관의 허브인 오클라호마에는 베이슨오일, 센투리온, 호손, 글래스마운틴, 그레이트솔트플레인스 등등 수십 개의 기업이 운영하는 파이프라인들이 텍사스, 뉴멕시코, 노스다코타 등의 유전들을 쿠싱과 잇고 있다.

 

미 오클라호마주 쿠싱의 거대한 원유 저장탱크.  쿠싱 AFP연합뉴스

 

파이프라인과 함께 쿠싱의 위상을 떠받치는 것은 플레인올어메리칸파이프라인(PAAP), 엔브리지, 엑스플로러, 제이호크, 마젤란미드스트림파트너스 등 8개 기업이 운영하는 총 8000만 배럴 용량의 저장탱크들이다. PAAP와 엔브리지가 각각 2000만배럴, 마젤란이 780만배럴 정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래 시한이 되면 원유 생산업체들은 쿠싱의 탱크에 있던 원유를 계약상대에게 전달한다.

 

5000에이커(20㎢) 면적의 드넓은 땅에 펼쳐진 쿠싱의 저장소들은 ‘탱크 팜(tank farm)’이라 불린다. 석유가 들어찬 원기둥 350여개가 줄줄이 늘어서 있는데, RBN에너지닷컴에 따르면 지름 90m에 높이가 14m에 이르는 탱크들도 있다.

 

남은 석유량은 위성으로 측정

 

이 거대한 탱크들에 기름이 얼마나 차 있는지는 인공위성으로 측정한다. 유럽우주국(ESA)이 운영하는 센티널-1 인공위성이 정기적으로 저장돼 있는 양을 계산해 지구로 전송한다. 2016년 10월에는 5850만배럴이 있었다. 2018년에는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면서 저장량이 줄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다 찼다”고 미국 언론들은 전한다.

 

뉴욕타임스는 석유컨설팅업체 리스타드에너지 자료를 인용해 쿠싱의 저장용량이 2100만배럴 정도 남아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남은 용량 즉 빈 공간들도 여러 업체가 이미 선점해 임대했다. 올 2월에는 절반도 안 찼는데, 지금 추세대로라면 5월 중으로 탱크들이 꽉 차는 ‘탱크톱(tank top)’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선물거래된 원유 5월물을 약속대로 받아갈 것이냐를 결정하는 시한이 지난 21일이었다. 그 전날 트레이더들이 대거 인수를 포기함으로써 가격이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트레이더들이 인수를 미룬 것은 쿠싱만이 아니라 미국 전역의 탱크들 저장용량이 다 채워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에너지학자들이 피크(peak) 즉 ‘생산의 정점’에 다가가고 있다고 경고할 때마다 석유업계는 “기술이 발전하고 있고 파낼 석유는 아직 많다”며 맞받았다. 그런데 생산의 피크가 아닌 ‘피크 스토리지(저장의 정점)’가 업계를 덮쳤다고 미국 언론들은 썼다.

 

‘석유의 섬’ 한 곳만 넘쳐도

 

석유전문가들에 따르면 전 세계의 원유 저장용량은 68억배럴 규모다. 현재 그 중 60% 가까이가 채워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대형 저장시설이 몰려 있는 곳들은 쿠싱과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싱가포르와 카리브해의 섬들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세계 석유시장은 글로벌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서로 떨어진 섬들이 가느다란 선으로 연결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 섬들(시장)의 중요한 저장소들이 있고, 그 중 한 곳만 넘쳐나도 세계 유가는 바닥으로 추락한다는 것이다. 저장 문제로 WTI가 마이너스 가격을 찍자 북해산 브렌트유는 물론이고 아프리카와 중남미 유가까지 줄줄이 떨어진 게 그런 예다.

 

인도 당국은 인도의 정유회사들이 보유한 탱크들이 95% 찼다고 했다. 나이지리아 국영석유회사(NNPC)는 현지 언론에 “저장공간이 모자라 산유량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카리브해 섬들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앙골라, 브라질의 저장용량도 거의 찼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하지만 채굴을 중단할 경우 유정이 아예 막혀버릴 위험이 있다. 또한 부채가 많은 기업들로선 배럴당 1달러라도 받는 게 낫기 때문에 산유업체들에게 생산중단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원유를 실은 수송열차가 24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오데사 주변을 지나고 있다.  오데사 AFP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비회원국 러시아 등을 포괄하는 ‘OPEC+’는 유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일일 산유량의 10%에 해당하는 970만배럴을 줄이기로 지난 12일 합의했다. 그러나 산업수요도, 수송용 가솔린 수요도 크게 줄면서 매주 5000만배럴의 석유가 세계에 쌓이고 있다. 그래서 석유업계는 ‘탱크 확보 전쟁’에 돌입했다. 슈퍼탱커(초대형 유조선)에 넣어 바다에 띄우는 것이 그나마 돈이 적게 드는 선택이다. 그렇게 떠도는 ‘바다 위의 석유’가 1억6000만배럴이라고 최근 로이터는 보도했다.

 

“안 사려면 돈 내라”

 

사실 미국에는 쿠싱의 탱크팜보다 훨씬 더 큰 저장소들이 있다. 1975년 ‘에너지정책보호법(EPCA)’에 따라 만들어진 전략비축유(SPR) 저장소들이다. 멕시코만에 면한 텍사스주 브라이언마운드와 빅힐, 루이지애나주 웨스트해크베리와 베이유촉토 4곳에 암염층을 뚫고 지하저장고를 만들어 원유를 쟁여둔다. 4개 저장소의 총 용량은 무려 8억배럴이다. 미 에너지부의 표현을 빌면 “제일 큰 저장소는 시카고 윌리스타워(높이 443m)가 들어가고도 남는 크기”다.

 

미국 루이지애나주 웨스트해크베리에 있는 에너지부 전략비축유(SPR) 저장소 터널.  게티이미지

 

미 에너지정보국(EIA) 웹사이트를 보면 지난 1월 기준으로 이 저장소들에 6억3500만배럴이 비축돼 있다. 에너지부는 시장 가격을 봐가며 이곳 원유를 정기적으로 팔고 새 원유를 사들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유가가 곤두박질치자 “전략비축유를 더 사들이겠다”고 발표했다. 가격 충격을 흡수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민간 시설의 원유를 정부 저장고로 옮겨가는 효과도 있다. 7500만배럴 정도를 더 사들이겠다고 했으니, 역대 가장 많이 찼을 때인 2010년의 7억2600만배럴에 육박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걸로 지금의 저장소 부족사태를 해소할 수는 없다.

 

쿠싱의 WTI를 사기로 계약한 트레이더들은 거래 시한이 닥치면 원유를 빼내가야 한다. 바다에 버릴 수도, 땅에 다시 묻을 수도 없는 석유가 애물단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거래소 전광판 수치상의 마이너스가 아닌 진짜 ‘네거티브(-) 거래’도 벌어지고 있다. 탱크를 보유한 PAAP는 석유회사 이스턴캔자스커먼에 “원유를 팔려면 배럴당 55.05달러씩 내라”고 했다. 선물거래한 원유를 가져가는 걸 미루려면 중개상들은 배럴당 40달러씩을 저장업체에 물어줘야 할 판이라고 블룸버그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