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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죄 받지 않은 채…이집트 옛 독재자 무바라크 사망

딸기21 2020. 2. 25.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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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이집트 카이로의 법정에 나온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  카이로 로이터연합뉴스

 

이집트를 30년 동안 철권통치했던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25일 사망했다. AP통신은 이집트 국영TV 보도를 인용해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91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공군 장성 출신인 무바라크는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내다가, 사다트 대통령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하자 1981년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후 30년 간 장기 집권을 하다가 2011년 ‘아랍의 봄’ 혁명으로 쫓겨났다.

 

무바라크 집권 기간 이집트는 사다트 시절에 탈퇴했던 아랍연맹에 복귀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하는 등 ‘아랍 회귀’를 추진하면서 중동의 외교 맹주로 부상했다. 유엔 사무총장, 아랍연맹 사무총장,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을 모두 배출하면서 국제적 위상을 과시하기도 했다. 사다트가 쫓아낸 야세르 아라파트 등 팔레스타인 지도자들과 만나며 중재역을 자처했다. 동시에 이집트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군사·경제원조를 받고, 중동의 맏형 노릇을 했다.

 

국내 정치에서는 억압적이고 권위적이었다. 무슬림형제단 등 이슬람 세력을 억압했고 ‘마바히스 암 앗 다울라’라 불리는 정보기관을 이용해 철권통치를 펼쳤다. 공공부문이 비대해지고 국영기업이 전체 고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면서 경제는 정체됐다. 집권 말기에 무바라크의 둘째 아들 가말이 중심이 돼 정치·경제 분야에서 일부 개혁을 추진하기는 했으나 낙후성을 면치 못했다. 2005년 형식적인 선거제도를 도입했으나 불법·조작이 횡행했다는 비판이 나왔고, 가말에게 권력을 세습하려 한다는 분석도 많았다.

 

장기집권이 이어지면서 무바라크 측근들과 군부의 부패가 극심해졌으며, 반발을 막기 위한 감시도 더욱 심해졌다. 무바라크 일가가 축출되기 전 쌓아둔 재산이 400억~700억 달러에 이른다는 추산도 있었다.

 

안팎의 비난 속에서도 2011년 2월 1일 당시 집권당이던 민족민주당은 무바라크가 그해 치러질 대선에 단독 출마한다고 발표했다. 논란이 커지자 무바라크가 나서서 “집권을 연장할 계획은 없다”고 했으나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혁명이 이집트로도 넘어왔고, 시민들이 카이로의 타흐리르(해방) 광장을 메웠다.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무바라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다가 상황을 돌이킬 수 없게 되자 결국 등을 돌렸다. 당시 혁명 와중에 군과 경찰의 무력 진압으로 84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칠레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와 마찬가지로, 무바라크는 온갖 부패와 학살, 범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이집트에서는 무바라크가 축출된 이후 잠시 이슬람조직 ‘무슬림형제단’ 정권이 집권했으나 이슬람주의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시위와 뒤이은 사실상의 군부 쿠데타로 축출됐다. 그 이후에는 무바라크 잔당들에 동조적인 군 장성 출신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이 집권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혁명은 퇴색됐고 무바라크에 대한 단죄는 이뤄지지 않았다.

 

무바라크는 2011년 4월 두 아들과 함께 부패 및 권력 남용, 군경의 시위대 학살을 막지 못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2012년 6월 종신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 항소법원이 재심을 명령했다. 2015년 재심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고령과 건강 악화를 이유로 2015년 10월 석방됐다. 2017년 3월에는 아예 항소법원에서 사면을 받았으며, 지중해에 면한 샤름엘셰이크의 자택에서 지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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