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월 28일(현지시간) ‘중동평화구상’을 발표했다. 팔레스타인 땅인 요르단강 서안에 이스라엘이 불법적으로 지은 이른바 ‘정착촌’들을 모두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하겠다고 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모두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예루살렘에 대해선 ‘이스라엘의 수도’임을 인정해주겠다고 했다. 수차례의 유엔 결의 등을 통해 국제법 위반으로 지적된 이스라엘의 행위들을 미국이 공인해주겠다는 것이어서 거센 비판이 일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만났고, 이어 이런 내용의 중동평화구상을 발표했다고 AP통신 등이 보도했다. 불법 정착촌들에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해주는 대신에 앞으로 4년 동안은 이스라엘이 새 정착촌을 짓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이 잃는 것은 영토인 반면, 이스라엘이 손해를 본 것은 한시적인 ‘추가건설 중단’ 조치일 뿐이다.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을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존하는 ‘두 국가 해법’에 합의를 했고, 이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영토가 됐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불러들인 유대인 이주자들의 살 곳을 만들어주기 위해 요르단강 서안에 정착촌들을 짓고 자국민들이 살게 했으며 정착촌들을 잇는 콘크리트 분리장벽을 세워 영토를 굳히는 작업을 해왔다.
정착촌에 사는 이스라엘인은 최소 6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이 서안 전체 영토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름만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일 뿐, 사실상 이스라엘이 점유하면서 치안유지를 빌미로 병력을 주둔시키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통행을 수시로 통제하고, 심지어 우물을 팔 수조차 없게 막고 있다. 트럼프 정부 구상대로라면 팔레스타인은 영토의 절반 이상을 이스라엘에 내주는 셈이 된다. 그 대신 미국은 팔레스타인에게 “독립국가를 세우고 대사관을 개설하는 일에 500억달러의 국제금융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미국이 원조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국제금융기관에 돈을 빌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당근으로 제시한 것이다.
예루살렘의 경우 오슬로 협정 때 동예루살렘과 서예루살렘을 나눠, 서쪽은 이스라엘 영유권을 인정해주고 동쪽은 팔레스타인의 영유권을 보장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오슬로 협정 뒤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을 인정하고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점령한 땅들에서 공식 철수한 뒤에도 동예루살렘 불법 점령은 풀지 않았다. 현재의 이스라엘 수도 기능은 경제중심지인 텔아비브가 맡고 있지만, 네타냐후 정부와 이스라엘 우파들은 동서 예루살렘을 모두 장악해 수도로 삼고 싶어한다.
트럼프 정부는 2018년 5월 주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김으로써 네타냐후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이어 이번 발표를 통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땅으로 본다는 정책을 공식화했다. “동예루살렘에 팔레스타인이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한다”는 구절을 발표에 집어넣었으나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몰아낼 방법은 없다. 그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은 자주 국방권이 없으며 특히 가자지구 무장정파 하마스는 모든 무장을 해제하도록 하는 내용도 새 구상에 담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실적인 ‘두 국가 해법’”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임을 보여준 것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구상을 발표한 뒤 “세기의 딜”이라고 자화자찬했다. 전임 대통령들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하려고 수차례 시도했지만 “처절하게 실패했다”면서 “나는 큰 문제는 회피하고 자잘한 일이나 하려고 대통령에 뽑힌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발표에는 공화당 거액 기부자이자 유대인 카지노 재벌인 셸던 아델슨을 비롯해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이 초대됐다. 참석한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의 기본틀은 뒤집고 쟁점들은 더 악화시킨 이번 구상은 논란을 부를 수밖에 없다. 분쟁을 해결하고 이·팔 양국이 평화적으로 공존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정치 쇼라는 비판이 나온다. 올해 11월 대선을 앞두고 미국 내 유대계 표를 잡기 위해 이스라엘에 극도로 유리한 내용들을 묶어놨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전문가들은 평화를 위한 진지한 청사진이라기보다는 트럼프 대통령과 네타냐후 총리를 위한 정치적 문건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현재 상원에서 진행 중인 탄핵 심판에 쏠린 시선을 돌릴 수 있고, 오는 3월 총선을 앞둔 네타냐후 총리로서는 확실하게 승기를 잡을 수 있어 ‘윈윈’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구상이 발표된 날은 공교롭게도 이스라엘 의회가 부패와 권한남용 혐의로 기소된 네타냐후 총리에게 면책특권을 줄 것인지를 표결하는 날이었다. 이스라엘 언론들조차 정치적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대통령은 이날 “예루살렘은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민족은 미국의 구상을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보낼 것”이라고 비난했다.
트럼프 정부의 구상은 국제법을 무시하면서까지 이스라엘 편을 든 것이기 때문에, 아랍국들과도 갈등이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군이 연초부터 이라크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의 가셈 솔레이마니 장군을 살해해 중동을 들쑤셔놨는데, 역내 안정을 도모하기는커녕 다시 기름을 부은 꼴이다.
중동에서 미국의 최대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우디는 경제개발 드라이브를 걸면서 이란과도 화해를 모색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미국이 솔레이마니 암살로 분란을 일으키자 당혹감을 표시해왔다. 사우디 정부가 공개적으로 미국의 이번 구상에 반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우디 내 반미 정서가 고조될 수 있다.
미국 언론들은 이번 구상이 미국과 이집트의 관계에도 악재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집트는 1978년 미국 중재 하에 이스라엘과 독자적으로 평화협정을 맺었다.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후 아랍권에서 ‘배신자’라는 비난이 빗발쳤고,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암살되는 사태로 귀결됐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과 구경을 맞대고 있는 요르단도 볼멘 소리를 낼 것으로 보인다. 시사주간 타임은 요르단이 이번 발표로 인해 이스라엘에서 극우파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까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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