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해외문화 산책

보드게임으로 되살아난 고대 앗시리아제국

딸기21 2019. 11. 6. 08:24

이라크인들은 게임을 좋아한다. 저녁마다 커피숍에 모여 카드게임이나 보드게임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 오래된 문화다. 젊은이들은 다르다. 어디서나 그렇듯, 바그다드에서도 젊은 층들은 온라인 게임을 훨씬 좋아한다. 게임중독이 늘면서 지난 4월 의회가 온라인게임 규제 결의안을 내놨을 정도다. 이런 결의가 통할 리가 없다. 젊은이들은 의회 ‘꼰대’들의 걱정에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이런 움직임은 오히려 게임의 인기만 더 끌어올렸을 뿐이다.

 

이라크 고고학자 라나 하다드가 개발한 보드게임 ‘우르빌룸’의 홍보 이미지. 우르빌룸 페이스북


라나 하다드는 쿠르드계 고고학자다. 가족 모두 게임을 즐기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환상에 기반을 둔’ 온라인게임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다. 그 대신 이라크의 풍부한 문화유산이 그의 흥미를 끌기 시작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이라크는 전국이 유적이나 다름없다. 하다드는 현장 발굴을 다니면서 보고 배운 것들을 게임으로 만들어 이슬람국가(IS)의 폭력에 지친 이들에게 보급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중동 온라인매체 알모니터는 지난달 29일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을 담은’ 보드게임을 만든 여성 고고학자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곧 시판 예정인 첫 버전의 이름은 ‘우르빌룸(Urbilum): 앗시리아 제국’이다. 성서에도 나오는 우르빌룸은 한국군 주둔지로도 잘 알려진 이라크 북부 쿠르드지역의 중심도시 아르빌의 옛이름이다. 게임은 두 사람이 하는데, 정착지들을 짓는 것으로 시작해 더 강력한 고대 제국을 건설하는 쪽이 이긴다. 플레이어들은 먼저 ‘세나체리브’와 ‘아슈르바니팔’이라는 두 캐릭터 중 하나씩을 고른다. 모두 고대 제국의 유명한 왕들 이름이다. 
 

요새와 사원을 짓고, 군락을 만들고, 왕궁도 건설한다. 게임의 모티프들은 고대 문명에서 따왔다. 전차와 정복군, 사냥과 노동, 사자와 제왕. 건축물에 새겨진 돋을새김 조각들과 점토판 속의 강력한 이미지가 게임으로 옮겨왔다. 현지 아티스트인 엡둘라 압둘라흐만이 디자인을 맡았다. 문명의 요람에서 자라난 그에게도 고대 문명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하는 것은 낯선 경험이었다. 그는 이 작업을 “특별한 도전”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완성된 제품은 아랍어, 앗시리아어, 쿠르드어, 영어판으로 제작됐다.
 

우르빌룸 페이스북

 

오늘날의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이어지는 지역에 있었던 앗시리아제국은 기원전 2500~609년 존속하다가 쇠락했다. 기원전 550년부터는 약 200년 동안 아케메네스 왕조가 이 일대를 지배했고 뒤이어 알렉산드로스에 정복됐다. 셀레우코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 로마 제국, 페르시아계 사산 왕조 등이 명멸해간 뒤 7세기에 아랍에서 발흥한 이슬람 세력이 정치·사회·문화를 모두 장악했다. 하지만 지금도 이라크와 시리아, 터키 일대에 65만~110만명의 앗시리아계가 살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지로 이주해간 이들까지 합치면 세계에 200만~350만명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전에 존재했던 제국들 중 하나이지만 앗시리아 제국의 역사는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이다. 무엇보다 고대 도서관의 장서들을 비롯해 남아 있는 유물과 유적이 많다. 점토로 된 유물들은 숱한 침략과 파괴 속에서도 상당수가 살아남았다. 하다드의 설명에 따르면 점토판들은 잇단 화재에도 파괴되지 않고 “구워졌을” 뿐이다. 또 19세기 중반부터 유럽 고고학자들이 이 지역에 들어가 유적을 워낙 많이 발굴했고, 이라크도 유적 발굴에 열심이었다. 
 

이라크 북부 니느웨(니네베)의 왕궁에 있던 기원전 7세기 앗시리아제국 아슈르바니팔 황제의 조각. 영국 고고학자들이 떼어가, 지금은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위키피디아
이라크 북부 니느웨(니네베)에서 발견된 고대 앗시리아제국 센나체리브 황제의 비석. 터키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위키피디아

 

고대 메소포타미아가 담긴 보드게임이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무려 5000년 전부터 이 지역 사람들이 즐겼던 ‘우르 게임’이라는 것이 있다. 고대 우르 제국으로부터 기원했다 해서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러 종류의 그림이 그려진 H자 모양의 나무판을 이용한 2인용 게임으로, 체스와 비슷하다. 중동은 물론 멀리 지중해의 크레타섬이나 인도양의 스리랑카까지 퍼졌다고 한다. 
 

1920년대 영국 고고학자가 우르 제국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이 게임의 유래를 찾아냈고, 지금은 온라인 게임으로도 나와 있다. 이라크 북부 술레이마니야주 라니야에 있는 라파린대학은 지난해 자원활동가들과 함께 이 게임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뒤 지역 주민들에게 보급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올초 두바이에서 열린 게임 관련 행사에서는 두라 알로마르라는 이라크 디자이너는 ‘임페리얼 레이스’라는 이름의 게임을 들고 나왔다. 유서 깊은 바그다드를 재건하는 게임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놀이문화에서 기원한 ‘우르 게임’의 도구들. regencychess.co.uk

 

시리아와 이라크의 정권들은 소수민족을 탄압했다.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한 뒤 시장과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카우보이 문화’를 이식하려 했다. IS는 이라크·시리아뿐 아니라 인류 모두의 유산인 유적과 유물들을 파괴했다. 그러나 수천년 역사는 없애려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유형·무형의 요소들이 어떤 형태로든 전달되고, 공동체에게 뿌리를 상기시켜주는 근원이 된다. 약탈과 점령과 박해는 그 자체로 역사에 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