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쌓은 높다란 분리장벽에 뚫린 구멍, 런던의 길모퉁이에 앉아 풀 한 포기를 심는 소녀. 거리예술가 뱅크시가 그린 벽화들이다. 세상의 불의와 부정의에 벽화로 저항하는 뱅크시의 작품들은 언제나 화제를 넘어 감동을 준다.
언제 그렸는지 모르게 남겨진 그의 그림 속에서 팔레스타인의 핍박받는 이들은 풍선을 들고, 꽃 한 송이를 들고 이스라엘의 억압에 맞선다. 영국이 브렉시트를 추진하자 도버 항구의 건물에는 유럽연합(EU) 깃발의 별을 지우는 인부의 모습이 등장했다. 예루살렘의 ‘꽃 던지는 남자’ 그림은 아트상품으로도 만들어졌다. 뱅크시의 예술활동은 벽화를 넘어 2015년 디즈니랜드를 비꼰 ‘디즈멀랜드’라는 아트프로젝트 같은 것으로도 확대됐고, 그가 세계 곳곳에 남긴 그림들은 포스터와 판화작품 등으로 다시 제작돼 경매에서 높은 값에 팔리곤 한다.
남기는 흔적마다 이슈가 되는 뱅크시가 이번엔 런던 남쪽에 ‘가게’를 열었다. 붉은 벽지로 둘러싸인 상점 안에 만화 캐릭터 ‘호랑이 토니(Tony the Tiger)’의 양탄자가 깔려 있다. 소파는 낡아 너덜너덜하고, 지지직거리는 TV 화면에는 혀를 내민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영상 위에는 “위기는 일상”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영국 국기 유니온잭이 그려진 보호용 조끼도 눈에 띈다. 가수 스톰지가 공연에서 입었던 것이다.
쇼윈도 안의 물건들에는 오늘의 세계가 담겨 있다. 그리스의 난민캠프에서 시리아 난민들이 만든 구명조끼, 폭동진압 경찰의 헬멧으로 만든 디스코볼(미러볼), 나무로 만든 이주자 인형. 가게 곳곳에선 폐쇄회로TV 카메라들이 지켜본다. 상점의 이름은 ‘그로스 도메스틱 프로덕트(Gross Domestic Product)’ 즉 ‘GDP’다. “GDP는 뱅크시가 운영하는 생활용품 가게입니다”라는 안내문도 걸렸다.
뱅크시는 처칠스트리트에 이 가게를 만든 뒤 1일(현지시간) 인스타그램에 사진들을 올리고 ‘개점’을 알렸다. “오늘 가게를 열지만 문은 실제로는 열리지 않습니다.” 뱅크시가 올린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진짜로 물건을 파는 가게는 아니다. 쇼윈도로 들여다볼 수 있는 가짜 가게이고, 2주 뒤면 사라진다. 상점 이름을 딴 웹사이트(grossdomesticproduct.com)도 있지만 접속해보면 “곧 개점합니다”라는 메시지만 뜬다.
뱅크시가 이 상점을 전시하게 된 이유는 실용적인 것이었다. 한 기업이 버젓이 뱅크시의 이름을 집어넣은 연하장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이를 막으려고 가게를 연 것이다. 뱅크시의 작품들은 늘 거리에서 행인들을 만난다. 온·오프라인에서 상품으로 팔리기는 하지만,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작품들은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뱅크시는 자신의 이름과 작품으로 돈을 벌려는 기업을 향해 소비주의와 성장지상주의에 매몰된 세태를 풍자하는 설치미술로 맞선 셈이다.
특정 기업이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걸 막고 예술가로서의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이 설치작품을 만들었지만, 저작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뱅크시는 강조했다. “즐거움을 위해, 학술적 연구나 실천을 위해 누구든 내 작품을 복제하고 빌리고 훔쳐가길 바란다. 내 이름을 독점하길 바라지 않을 뿐이다.” BBC방송은 ‘너무나도 뱅크시다운’ 이 작품에 팬들이 열광하고 있다고 전했다.
'내맘대로 세계사 > 해외문화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넷플릭스에 항의한 폴란드, 씁쓸한 뒷맛 (0) | 2019.11.20 |
---|---|
보드게임으로 되살아난 고대 앗시리아제국 (0) | 2019.11.06 |
60여년 함께 해온 '아주 특별한 북클럽' (0) | 2019.10.30 |
중국 공산당의 무기, TF보이즈 (0) | 2019.10.23 |
'조커'가 문제일까 총기가 문제일까...영화가 되살린 미국의 악몽 (0) | 2019.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