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21세기 사회주의

딸기21 2018. 3. 18. 20:05
728x90

21세기 사회주의 Civil Society and the State in Left-led Latin America (2012년)

배리 캐넌·피다 커비 엮음, 정진상 옮김. 삼천리


그동안 읽은 삼천리에서 나온 책들이 대략 2~20% 부족한 점이 있었기에, 이 책도 긴가민가 하는 마음을 가지고 펼쳐들었다. 역시 많이 부족했지만 또한 많이 충실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꽤나 재미있었고, 내게는 도움이 많이 됐다. 


혹시라도 이 책을 읽게될 독자들을 위해 먼저 알려주고 싶은 것은, 책(원서)가 나온 것이 2012년이라는 점이다. 국내에서 2017년에 한국어판을 번역출간하면서 보론을 곁들이기는커녕 ‘그 후의 상황’에 대해 옮긴이 주석으로조차 담지 않은 것은 책 읽는 사람 입장에서 용서하기 힘든 부분이다. 책에 나온 나라들의 정권은 사실 모두 교체됐고 책에 묘사된 상황과 현재의 라틴아메리카 상황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책은 주로 2000~2010년까지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한마디로 ‘룰라 시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옮긴이 각주 없이 집권자들 이름을 줄줄 나열해놨기 때문에 중남미 정세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제깍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차베스와 룰라의 이름 정도는 대체로 알겠지만 카를로스 메넴이나 알란 가르시아까지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같다. 



그런데도 책은 알차고 재미있었다. 좌파 지식인들이 차베스-룰라 시대의 21세기 사회주의 실험에 대해 쓴 것이고 동어반복이 적지 않지만 국가별 상세한 사정과 두루뭉실 떠오르는 여러 의문에 대한 답들을 제시해줬다고 할까. 엮은이들은 어느새 지나간 시대가 돼버린 그 시절 중남미 국가들에서 일어난 ‘포스트 신자유주의’ 움직임과 국가-시민사회 관계가 재구축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한다.


책은 1부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 2부 지구화 시대의 지역 갈등, 3부 참여의 확대인가 라는 3가지 부문으로 구성돼 있다. 1부에서는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브라질 칠레 좌파 정부 수립 뒤 시민들의 참여를 어떻게 일으키려고 애썼나, 시민들의 참여는 그래서 실제로 얼마나 이뤄졌고 어떤 한계가 있었나에 초점을 맞췄다. 챕터 하나하나가 다들 책 한권씩으로 읽어도 될법한 주제들이다. 


정부의 정책들보다는 참여민주주의를 모색한 과정을 들여다보는 내용인데 챕터들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요약에 그치는 측면이 있지만 그래도 모두 재미있었다. 좌파 학자들이 중남미 좌파 정부와 참여민주주의 실험을 무조건 예찬한 것이 아니라, 한창 진행중인 상황에서 한계와 문제점을 냉정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것도 눈에 띄었다. 그 덕에, 시간이 많이 지나 상황이 바뀐 뒤에 읽는데도 거부감이 들기보다는 오히려 ‘그래서 지금 이러저러한 상황이 됐구나’ 해석하게 해준다.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칠레의 좌파 정부와 ‘펭귄 혁명’을 다룬 부분이다. 피노체트 이후 칠레에 민주주의가 복원되고 중도-좌파 정부가 들어선 뒤에 어째서 교육개혁을 요구하는 최대 시위가 벌어졌을까. 억눌려왔던 것들이 터져나와서? 미첼 바첼레트는 그렇게 인기가 없었던 걸까? 하지만 그 뒤에 재선되고 계속 이름이 불리우는 걸 보면 심지도 있고 능력도 없지 않은 인물인 것 같은데. 이런 궁금증들에 대해 느슨하게나마 시사점들을 줘서 좋았다. 한국에서도 ‘숙의 민주주의’ 이야기가 나오고 참여예산제의 요소들이 서울시 등에서 시도되고 있고 원전 건설을 재개할지를 놓고 ‘공론화위원회’가 굴러갔는데, 그래서 그런지 바첼레트 시절 교육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만든 여론수렴 장치 얘기도 재미있었다. 


2부에서는 중남미의 ‘채굴경제’ 문제를 짚는다. 차베스 시절 우파 진영에서 줄기차게 비판해왔던 것이기도 하다. 이미 룰라 시대는 끝난 지 오래됐고 그 후 2번 연임한 호세프는 어처구니없는 탄핵으로 물러났다. 베네수엘라는 차베스 사후 5년 가까이 흐르면서 난장판이 됐다. 이들이 승승장구했던 2000년대는 이라크 전쟁 이후 유가가 폭등해 자원부국들의 수입이 팍팍 늘어났던 시기였다. 채굴하는 나라들은 그 수입으로 빈곤퇴치 프로그램을 펼치며 사회정책에 돈을 투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책은 신자유주의와 민영화의 시기가 지나가고 잠시 반짝 빛났던 그 시절, 석유 파내는 중남미 국가들이 자기 나라 서민·빈민을 위해 다시 채굴경제로 돌아간 상황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부작용들을 다룬다. 좌파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국가가 채굴에 목숨을 거는 이상 원주민들과는 갈등이 (오히려 더욱)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환경과 땅과 자원 문제에서뿐 아니라 좌파 정부들은 여러 사안에서 과거 배제됐던 세력들을 정부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했고, 그러면서 시민사회의 일부분은 포섭하고 일부분은 배제했다. 참여를 늘린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지만 각기 국내 정치적 역학관계 때문에, 혹은 지구화라는 외부 환경 때문에 취약점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자들은 좌파 정부의 시도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한계를 지적한다. ‘근본적 개혁이 아니었다’는 낡은 좌파적 관점에서 비판한다면 읽으나마나 한 책이 됐겠지만 이 책의 장점은 그런 래디컬 지상주의 관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나라, 지역, 그리고 지구적인 차원에서 어떤 사슬들이 좌파 정부들을 옭아매고 있었는지를 다층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썼다.


3부의 마지막 장인 ‘메르코수르와 신좌파 정부’도 재미있었다. 중남미 경제블럭이라고만 생각하기 쉬운 메르코수르는 좌파 정부 특히 키르치네르(아르헨티나)-룰라(브라질)의 양대 리더십 속에 지역블럭의 사회적 재구성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고, 그것이 나프타(NAFTA)같은 자유무역 블럭과는 다른 차별성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남미 채굴경제가 유가하락 이후 휘청거리면서 메르코수르 자체의 힘이 제대로 출발도 못 해본채 사그라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라마다 자연자원의 토대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세계경제 환경에서 정책을 펼 수 있는 전략적 공간이 저마다 달라진다. 각국은 저마다 다 독특하지만 크게 두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편에는 칠레, 브라질, 우루과이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가 있으며 아르헨티나는 이 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칠레와 우루과이, 브라질은 석유와 천연가스에서 확실한 비교우위가 있는 두 번째 집단과는 다르다. 이들 국가가 세계시장으로 편입되는 정도는 시장의 유리함을 유지하고 해외 시장에 일차 상품을 대규모로 판매할 수 있는 경쟁력을 창출하는 데 달려 있다(다만 브라질은 내수 시장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이 점이 우선시되지 않는다).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 에콰도르는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국제 수요 덕택에 취할 수 있는 전략적 공간이 전반적으로 크기 때문에 훨씬 더 개입주의 국가 형태를 띨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이런 단순한 유형화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부존자원은 대단하지 않지만 이들 세 나라와 비슷한 방식으로 국가의 권위를 시장보다 우위에 내세우려는 의지를 보여 왔다. (19쪽)



베네수엘라에서 참여민주주의의 제도화는 30가지가 넘는 필수적인 ‘미션들’로 구성돼 있다. 가장 기본적인 아이덴티다드(신분증) 미션은 과거 선거권이 없던 사람들에게 법적 시민권을 제공하는 것으로 2007년까지 5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혜택을 받았다 메르칼(시장) 미션을 통해서는 보조금이 붙은 식료품이 분배된다. 바리오 아덴트로(이웃공동체 속으로), 밀라그로(기적), 손리사(미소) 미션을 통해서는 치과 진료를 포함한 포괄적인 무상 의료 서비스가 주어진다. 노숙자나 에이즈 감염자처럼 사회에서 가장 심하게 배제된 사람들은 네그라 이폴리타(흑인 여성) 미션의 이동보호센터를 통해 지원을 받는다. 여성의 권리는 마드레스 델 바리오(이웃공동체 어머니들) 미션을 통해 전달되며 빈곤 아동은 무시카(음악) 미션을 통해 무료로 음악 교육을 받는다. 환경정책은 아르볼(나무) 미션과 레볼루시온 에네르헤티카(에너지혁명) 미션을 통해 실현된다. 모든 형태의 교육은 로빈슨 I·II·III, 리바스, 체게바라와 수크레 미션을 통해 실시된다. (38쪽)


2002년부터 2008년까지 빈곤층은 48.6%에서 27.6%로 감소했으며 극빈층은 22.2%에서 9.9%로 감소했다. 지니계수는 1999년의 0.498에서 2008년에는 0.412로 감소했는데 이는 라틴아메리카카리브 국가들 가운데 가장 낮은 수치이다. 고등교육 등록자 비율은 1999년 28%에서 2008년 79%로 상승했는데 이는 LAC에서 쿠바 다음으로 높은 수치이며 전 세계에서는 8번째로 높은 수치이다. (40쪽)



페론 재임기간의 수입대체 산업화 (ISI) 경제정책은 초기에 인상적인 성장을 기록했으며,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관대한 법 제정과 결합하면서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동시에 그러한 정책은 노동계급 내부의 급진적인 경쟁 상대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구실을 했다. “노동에 관한 페론 시대의 주요한 유산은 노동계급을 국민적 정치 공동체로 통합시켜 시민적·정치적 지위를 인정한 것”이었다. 노동조합과 같은 제도를 기반으로 한 도시 노동계급과, 정부의 수입대체 산업화 정책으로 이득을 본 민족 부르주아 부문들과의 연계를 통해 사회는 점점 더 국가와 통합되었다. 페론주의 정당은 아르헨티나 정치에서 여전히 지배 정당이다. 도시 노동계급에게 국가 안에서 일정한 지분을 주는 페론주의의 이념 또한 여전히 남아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정치에 스며들어 있다. (54쪽)


1983년 아르헨티나는 민주주의를 회복됐으나 독재 시절에 시작된 경제 위기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알폰신 치하의 초인플레이션은 카를로스 메넴이 등장하는 무대를 제공했다. 그는 페론주의적 공약을 내걸고 당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9년에 권력을 잡자마자 갑작스럽게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메넴은 경제에서 우파와 노동계급 사이의 강력한 동맹을 만들었는데, 그러한 동맹은 경제 위기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 담론을 강조함으로써 형성된 것이었다. (55쪽)


반대시위가 고조되었을 때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은 카사로사다(대통령궁)에서 대통령 전용 헬기를 타고 도망쳤다. 에두아르도 두알데 대통령이 등장하기 전 며칠 동안 몇 명의 대통령이 연이어 바뀌는 권력공백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어쨌든 민주주의는 살아남았는데, 그것은 군사 쿠데타와 독재라는 아르헨티나의 최근 역사를 고려하면 그래도 민주주의가 1970년대보다는 강해졌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애너 디너스틴은 2001년 12월 19~20일 ‘항쟁(El Argentinazo)’이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실천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아르헨티나에서 특정한 형태의 자본주의 축적 전략(1976년 독재 체제 출범 때 시작되고 물가안정 정책이 특징이었다)이 붕괴함으로써 정치과정에 대한 충성도가 낮아졌고, 저항이 결집되고 확장돼 여러 운동들이 출현했다. 실업자가 된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는 2001-2002년에 절정에 달했는데, 1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1000곳이 넘는 폐쇄된 기업을 가동했다. 실업자 운동은 ‘피케테로스’라는 행동 집단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공장 폐쇄로 점거할 공장이 없어지자 거리로 나와 피켓을 들었다. 대규모 민중 집회를 통해 의사결정이 이뤄졌으며 정달들로부터 독립돼 조직이 이뤄졌다. 물물교환 클럽인 ‘트루에케’가 다차원적 상호교환 클럽으로 광범위하게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전국 곳곳에서 이웃공동체회의(asamleas barriales)가 열렸는데, 심지어 중간계급이 거주하는 교외 지역에서도 예금인출을 요구하는 회의가 열렸다. ‘항쟁’은 이처럼 다양한 혁신적 저항운동과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 참여를 통해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실천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정치적 공간을 열었다. (58쪽)


인플레이션 억제의 필요성, 임금 인상을 억제할 필요성 때문에 조직노동 및 국내기업과의 체계적 협상과 협약은 키르치네르식 경제발전의 중요한 목표였다. 키르치네르주의에서 존재한 기업가 집단과 조직 노동자 사이의 진정한 협력과 협상은 메넴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키르치네르주의에서 나타난 분절된 신조합주의는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새로운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와 국제 자본의 관계도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불이행 채무의 재조정 협상에서 키르치네르가 IMF를 비롯한 채권자들에게 강경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아르헨티나는 국제자본시장에서 고립됐다. 이는 아르헨티나 경제사에서 부채라는 구조적 성격을 청산하려는 시도였다. 더욱이 아르헨티나가 IMF에 빚지고 있던 미지급액 98억달러 전부를 조기상환했는데, 이는 페론 집권 때부터 아르헨티나의 국제관계를 형성한 요인으로 작용해온 IMF의 영향력이 거의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키르치네르는 국제사회와 완전히 단절하지 않을 만큼은 신중했다. 이는 라틴아메리카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와 맞물려 있었다. 더 중요하게는 베네수엘라가 국제 자본시장에서 고립된 아르헨티나 채권을 구매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이런 사정으로 아르헨티나는 메르코수르를 통해 베네수엘라, 브라질, 칠레, 볼리비아와 긴밀한 관계를 추구했다. 

키르치네르는 국내에 투자하고자 하는 외국기업은 기꺼이 환영했지만 아르헨티나에서 이익을 얻으려 하는 다국적기업들에게는 적대적이었다. 그는 소비 호황 촉진을 위해 개인신용을 확대하려고 하는 자신의 계획에 부합하는 한 금융부문과 연계를 유지했고 특히 은행에는 어떤 적대감도 없었지만, 메넴 시기처럼 행정부 관료를 통한 국가와의 제도적 연계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69쪽)



1990년대 말까지 거의 대부분의 참여예산제 경험은 PT가 집권한 지방자치단체에서 이뤄졌다. PT는 가장 일관된 정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단체와 노동조합, 그리고 ‘계몽된’ 중간계급의 시민사회조직을 주된 기반으로 하면서 대학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여타 정당들과는 다른’ 정당으로 여겨졌다. 

브라질민주운동당(PMDB)은 독재에 반대한 중심 세력이었지만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하고 전국적으로 만연한 사회적 위기를 해결하는데 실패한 책임이 있었다. 특히 주요 대도시에서는 더 심했다. 공동체평의회를 창설하고 특히 포르투알레그레에서 참여예산제 실시와 같은 민중 참여는 PT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브랜드가 되었다. 나아가 ‘사회운동 정당’으로서 PT의 비전은 ‘민중참여 정당’이라는 비전으로 바뀌었으며, 이는 ‘PT식 통치’의 상징이 되었다. (124쪽)


참여예산제의 결정기구에서는 PT 활동가 또는 PT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활동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PT 활동가들만의 배타적인 영역은 분명히 아니었다. 바이엘레에 따르면 “참여예산제가 대중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모든 집단은 새로운 구성월을 모집할 수 있는 우선적인 공간으로 참여예산제에 관심을 가졌다.”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아마추어 정치가이지만 언제나 지역사회를 대표할 준비가 돼 있고 지역사회와 정부 사이의 관계를 중재할 수 있는 ‘전문적인 시민’이 출현했다. 평의원들은 평의회에서 통과된 투자를 법제화하라는 주민들의 압력과, 공무원들의 예산논리를 중재하는 기능도 수행했다. (130쪽)



1980년대 칠레 시민사회의 빈곤층에서 강력했던 저항은 경제위기가 닥친 1984년 정점에 도달했다.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변화는 1990년대 사회정치적 이행이라는 맥락에서 일어났다. 기독교민주당의 파트리시오 아일윈과 에두아르도 프레이가 이끈 두 차례의 콘세르타시온(중도좌파연합) 정부는 ‘칠레모델’을 개혁할 수 있는 여지가 제한돼 있다고 생각해 점진적이고 합의적인 접근방법을 선택했다. 뒤이은 중도좌파 콘세르타시온 정부들은 신자유주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바리오(이웃공동체) 프로그램과 같이 빈곤층에 예산을 지출하는 정책들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이미 칠레모델의 본질적인 부분이 돼버린 신자유주의 정책으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1990년대에 칠레 국가는 이중전략을 수립했다. 신자유주의 사회경제모델을 계속 유지하는 한편, 가장 긴급한 사회적 필요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 프로그램과 기구들을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의 요구들을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집권한 콘세르타시온은 여러 중도좌파와 중도파 정당들이 모여 구성됐다. 처음의 두 정부는 기독교민주당 대통령이 이끌었지만 나중에는 사회당의 리카르도 라고스와 미첼 바첼레트가 연이어 선출됨으로써 통치연합의 주축이 좌파로 이동했다. 하지만 두 사회당 대통령은 저마다 자신의 정부에 사회적 성격을 각인하려고 노력했지만 이행기 유산의 제약 탓에 번번이 한계에 부딪쳤다. 분석가들은 일반적으로 칠레에서 민주주의 회복이 시민사회 활동의 강화로 귀결되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한다. (144-145쪽)


라틴아메리카의 ‘이행기’ 민주화는 중요한 요소를 하나 더 갖고 있다. 마누엘 가레톤이 ‘권위주의 영지(authoritarian enclaves)’라고 부른 것인데, 독재가 설정한 규범을 새 민주주의 체제가 존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것은 새 정부를 합법적으로 구속함으로써 중요한 권위주의 유산을 실질적으로 개혁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임명직 상원의원’이나 (개정을 하기 위해선 특히 높은 정족수를 요구하는)‘의무법률’같은 규정과 양원제 선거제도는 시민사회조직들과 국가의 관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회운동은 오직 제도적 채널을 통해서만 자신의 요구에 대한 반응을 기대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러한 요구들이 좀 더 급진적으로 나아가거나 교육, 보건, 연금제도같은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면 콘세르타시온은 연합 안에서 충분한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반응을 반복했다. (147쪽)


바첼레트는 콘세르타시온의 정치적 프로그램이 결여된 상황에서 집권했다. 바첼레트 정부는 이행의 제도적 제약에 영향을 덜 받는 것으로 보였기에 사회적 행위자들은 좀 더 큰 자율성을 가지고 개혁의 심화를 요구했다. 2005년에 임명직 상원의원 제도가 폐지되고 의회에서 다수당이 되면서, 교육이나 보건같은 민감한 문제들에 대해 콘세르타시온이 보였던 극단적인 신중함은 점점 정당화되기 힘들게 됐다. 

어쨌든 대통령자문위원회를 통해 바첼레트는 공공정책 노의에 시민사회 행위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사회적, 기술적 메커니즘을 구축함으로써 자신이 정당들로부터 독립돼 있다는 점을 표명할 수 있었다. (148쪽)


민주주의 회복 후에도 공공지출을 제한하고 거시경제 균형을 관리하는 재정흑자 원칙이 알레한드로 폭스레이에서 안드레스 벨라스코에 이르는 재무부 장관들의 기본 신조가 되었다. 그와 함께 이들의 재임 기간 상품수출 모델이 변함없이 유지됐을 뿐 아니라 미국 및 유럽연합과 맺은 자유무역협정이 조인됨에 따라 더욱 완벽해졌다. ... 세계경제 상황은 콘세르타시온의 경제정책, 특히 바첼레트 시기 경제정책의 정당성을 입증했다. 재정흑자 기조를 확실히 유지한 덕분에 칠레 정부는 1997년과 2008년의 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넘길 수 있었으며 세계시장에서 구리 가격이 치솟자 고무되었다. 이런 유리한 상황 덕분에 바첼레트 정부는 초등교육과 연금개혁에 상당한 투자를 하는 등 정부의 야심찬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었다. (150쪽)


새로운 개혁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양질의 교육을 위한 대통령자문위원회(CAP)’다. 이는 중도좌파 정부가 ‘공공정책의 형성에 시민사회 참여’를 확장시키려 한 방식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정치적 게임에 새로운 행위자의 참여를 가로막아온 칠레 국가의 강고한 제도적 틀과 충돌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조건들로 인해 바첼레트 임기 동안 대규모 저항운동이 출현할 수 있었다. 주요한 주인공은 2006년 4월부터 6월까지 산티아고 중심가를 관통한 거대한 시위행진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고 학사일정을 무력화시킨 중고등학생들이었다. 흰색과 검은색 교복 때문에 붙여진 ‘펭귄 혁명’은 2001년의 ‘엘 모칠라소(책가방)’ 학생시위를 능가했다. 이 때문에 학생운동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집단운동이라기보다는 더 폭넓은 시민사회 운동으로 여겨졌다. 2006년 5월 30일과 6월 6일 동맹휴업에서 절정에 다한 대중시위는 1980년대 반독재 대중저항 이래로 없었던 규모였다. (151쪽)


학생운동 세력이 내건 주된 요구는 교육기본법 개정이었다. 이 법률은 의무법류의 하나였고 상원에서 3분의2 이상 의결정족수가 필요한 헌법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개정이 쉽지 않았다. 학생운동의 요구에 이 법률의 개정이 포함된 것은 이 법률을 독재정권이 수립한 교육시스템의 근본적인 뼈대라고 파악한 좌파 학생들과 교사협회의 오랜 소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피노체트는 교육현대화 계획의 일환으로 교육시스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학교를 공립, 사립, 반(半)사립으로 분류한 3층 시스템을 도입한 일이다. 반사립의 경우 교육비 대부분을 국가 보조금으로 보장하고 나머지 일부는 학부모들이 부담하게 했다. 다수 학생들이 사립과 반사립으로 전학을 가버리고 가난한 학생들만 공립학교에 남게 됐고 칠레는 초등학교 부문에서 사회계급에 따른 교육 분절이 가장 심한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대학 부문에서도 피노체트 시기의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수많은 사립대학이 설립됐다. 그래서 고등교육에 대한 접근권이 높아졌지만 학생과 학부모, 특히 중산층의 빚이 늘어났다. (153쪽)


2006년 바첼레트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CAP에는 다양한 부문들이 대표성을 띠고 폭넓게 참여했다. 학계, 대학, 공공정책 및 교육 연구자, 민간부문과 교회 등이 포함됐다. 정부는 이익집단 대표자들, 정치인들, 대학 총장들, 몇몇 의원들과 함께 8명의 학생 쿼터를 둬 학생운동권의 참여도 보장했다. 학부모 단체들과 교육기업들 등도 CAP에 참여했다.

CAP의 운영은 대통령한테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대통령은 정책적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위원회의 실패에 대한 비판에도 노출됐다. 한 가지 문제는 참여자 수가 81명으로 많았기 때문에 질높은 대화가 힘들었다는 점이다. CAP는 시민협의로 중요한 정책문제의 해답을 추구하는 하이브리드 포럼의 한 형태로 여겨지기도 하고, 갈등과 관련된 모든 행위자들이 대표성을 가진 확대 시민의회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정부가 시민사회의 행동범위를 제약하는 시간을 벌고 시민사회가 요구사항들에 타협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일종의 협상포럼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정부는 초등, 중등, 고등 세 수준이 교육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광범위한 집단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CAP를 구성했다. 이런 구성 탓에 학생 대표자들은 대표자들의 투명성과 책임성, 이해갈등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더욱이 국가가 대표권을 갖는다는 분명한 선언도 없이 정부와 가까운 몇몇 정치인들도 포함됐다. 그리하여 정부는 진행중인 논의와 쟁점에 대해 특권을 가지고 접근함으로써 민감한 분야에서 미리 준비된 정책으로 사전에 결정할 수 있었다. 우파와 관련된 싱크탱크 전문가들도 포함됐다. 이 전문가들은 중립적으로 보이면서 실제로는 정부와 엘리트들의 이해관계가 관철되도록 하고, 학생들의 영향을 희석시키는데 기여했다.

합의의 어려움은 숙의결과가 정책으로 옮겨질 때 분명하게 표현됐다. CAP의 한계라기보다는 칠레 이행모델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구체적으로 양원제가 변화에 대한 심각한 제동장치로 작동했다. 특히 독재정권이 민주주의 회복 불과 며칠 전에 공포한 교육기본법의 경우 특별한 정족수가 필요했다. 바첼레트 정부는 절대 다수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좌우 사이에 있었다기보다는 콘세르타시온 내부에 있었다. 개혁은 통치연합의 일부 구성원들, 예컨대 기독교민주당에 종교교육같은 민감한 쟁점을 건드린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157쪽)



라틴아메리카의 극단적인 사회경제적·정치적 불평등 속에서 광물자원을 둘러싼 갈등 또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세기 내내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민중의 혁명적 경향에 맞서 외국 회사와 국내 경제 엘리트들의 이익에 계속 봉사할 수 있었지만 20세기에 와서 사정이 바뀌었다. 국가 통제하의 점진적인 민주화와 근대화를 위해 많은 나라들이 일부 광물자원을 국유화하는 한편 광물자원의 탐사와 채굴, 정제를 위해 거대한 국가기업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볼리비아(1937년)에서, 다음에는 멕시코(1938년)와 베네수엘라(1943년)에서 석유가 국유화됐다. 브라질(1942년)에서 국영 광산회사 ‘콤파니아 발레두리오두세’가 설립됐고 볼리비아(1952년)에서 주석이 국유화됐으며 브라질(1953년)에서 국영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가 설립됐고 페루(1960년대 후반)와 칠레(1971년)에서 구리가 국유화됐으며 베네수엘라(1976년)에서는 석유가 다시 국유화됐다. 수입대체 산업화라는 발전모델의 일부로 추진된 국유화 조치는 노동자들을 착취하면서 세금을 거의 내지 않고 막대한 이윤을 가져간 외국 회사들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와 노동자들의 투쟁에 따른 것이었다.

1980~90년대에는 흐름이 바뀌어 라틴아메리카 정부들은 석유와 가스, 광산 부문의 전면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글로벌 신자유주의가 승리하자 외국 자본 권력에 맞서 국가주의적이고 사회적인 평형추 역할을 하던 시민사회 집단과 정당들이 약해지고 대신에 새로운 세대의 기술관료들이 등장해 국제금융기구들이나 국내 경제엘리트들이 선호하는 새로운 제도를 수립하는데 기여했다. 무엇보다도 채굴산업이 가장 심하게 재구조화됐다. 워싱턴컨센서스 아래에서 이 부문에 해외 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기존 시스템을 철저하게 해체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새로운 정책은 재정안정성 조항(칠레와 페루)뿐만 아니라 광산개발권에 대해 외국 투자자들에게 내국인 대우를 제공하고 그들의 투자가 미래의 정책으로 손해를 입을 경우 보상받는 권리를 부여하는 양자 간 투자협정에 묶여 있었다.

대다수 라틴아메리카 시민들에게 역사적으로 광물자원의 국유화는 독립적인 국가발전과 주권, 반제국주의, 애국주의의 표상으로 인식돼왔고 정치적으로 표현됐다. 이런 공기업들은 낮은 국내 에너지가격을 통해 값싼 상품을 공급했으며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고 노동조합이 강한 일자리를 제공했다. 따라서 채굴의 재민영화는 시민들에게는 ‘왕관 보석’의 상실로 여겨져 부당하다고 인식됐다. (170-171쪽)


베네수엘라에서는 1990년대에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와 라파엘 칼데라 정부의 석유개방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PDVSA)는 민영화되지 않았지만 대부분 다국적기업이었던 민간기업들은 PDVSA와 합작투자하는 과정에서 지배주주가 될 수 있도록 허용됐다. 그리하여 베네수엘라는 ‘카라카소’라 알려진 1989년의 대규모 폭동 이후 몇 년 동안 끊임없는 조직적 저항과 자생적 저항운동을 겪었다.

볼리비아에서는 산체스 데로사다 정부 첫 임기인 1993-97년 동안 2세대 개혁을 실시했는데 여기에는 민간기업에 극도로 관대한 새로운 탄화수소 관련 법률과 민영화가 포함됐다. 국영가스·석유회사(YPFB)가 민영화되면서 국가는 직영을 포기했으며 새 시스템은 시민 불만의 온상이 됐다.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이 나라에서 대규모 새로운 가스매장층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산체스 데로사다가 두번째 임기 때인 2003년 10월 발리비아의 액화천연가스를 칠레를 통해 미국으로 수출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자 광범한 사회적 저항이 거리를 메웠다. 가스전쟁 또는 ‘10월 전쟁’이라 알려진 이 전면적인 저항이 한달 동안 이어져 결국 산체스 데로사다가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브라질에서는 발레두리오두세(발레)의 지위를 놓고 시민들의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국민투표는 토지없는농민운동과 브라질노동총연맹(CUT)을 비롯한 200여 단체가 조직했다. 발레가 민영화된 지 10년이 지나 국민투표에 참여한 브라질인 370만명 가운데 94%가 재국유화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73쪽)


1990년대 후반부터 대규모 민영광산과 석유개발, 특히 초국적 기업이 발주한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지역 저항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채굴에 반대하는 수많은 동원이 관심을 집중한 문제는 토지와 물에 대한 권리, 영역다툼, 그리고 채굴산업의 악명 높은 환경영향 등이었다. 페루의 탐보그란데와 야나코차의 금광개발에 반대한 농민들과 지역민들의 저항, 과테말라의 금광과 은광 개발에 반대한 마야 원주민공동체, 세브론과 텍사코에 반대한 에콰도르의 오랜 역사를 가진 저항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한 지역적 저항은 대부분 강력해진 원주민운동과 신자유주의·지구화에 반대해 라틴아메리카에서 점점 커져 간 대중저항과 연결됐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 정책과 광물 채굴에 반대하는 지역적 저항과 국민적 동원은 참여정치와 탈신자유주의 발전모델을 추구하는 사회운동에 연결되는 성과를 거뒀다. (175쪽)


(인터넷을 통해) 국경을 넘나드는 협력과 초국적 NGO들의 도움으로 이런 저항은, 특히 페루의 바구아나 에콰도르의 야수니 같은 폭력적 갈등인 경우에 국제미디어를 통해 점점 더 눈에 띄게 되었다. 놀라운 점은 볼리비아의 모랄레스나 에콰도르의 코레아같은 좌파 대통령이 토지와 물, 보호생태계를 방어하려는 지역적 투쟁에 유치하고 반애국적이며 불법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부정적이고 공격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가 작동하는 새로운 세계경제 상황 탓에 갈등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좌파의 선거 승리를 가능하게 한 요인은 신자유주의 정책과 빈곤·불평등에 대한 광범한 대중적 저항이었는데 좌파가 대통령궁에 입성해 극단적 빈곤을 사회프로그램들로 얼마간 신속하게 교정하면서 그런 저항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좌파의 제도화는 전국적으로 어느 정도 탈동원화를 가져왔지만 다른 부담함에 대한 지역적 불만이 반드시 줄어든 것은 아니다. 광물 채굴이 확대되면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중국과 세계경제의 중심부로 막대한 자원이 유출됐을뿐 아니라 지역환경이 파괴되고 일상이 위협받는 일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좌파 지도자들은 선거운동에서 빈곤 퇴치와 정치참여, 포섭적인 민주주의와 원주민들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이런 것들은 중요한 해방적 요소들이지만 실제로는 좀 더 참여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로 나아가는데 몇 가지 장애가 있다. 채굴에 반대하는 원주민과 농민, 환경운동 단체들은 자신들의 관점에 열려 있는 진보적 대통령을 찾기가 힘들다. 선거에서 이들 대통령의 인기는 채굴을 기반으로 한 사회 프로그램과 경제성장, 전반적 발전모델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원이 풍부한 나라들은 계속 채굴에 의존했으며 석유와 가스, 광산 부문에서 외국 투자와 세계 상품시장에 계속 의존했다. 한편으로 진보적 정권들은 중도파와 우파 정당들의 저항을 받고 있을뿐 아니라 진보적 경제·사회정책에 의문을 제기하고 저항하는 시민들과 조직들의 반대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반대는 국내 경제엘리트와 외국자본 등의 지지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대중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진보적 통치에 장애가 될 수 있다. (183-1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