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재난에서 살아남는 법
성상원 | 전명윤 (지은이) | 따비 | 2018-01-15
굳이 세월호 얘기는 할 필요가 없겠다.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엄청난 상처를 남긴 그 재난,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큰 재앙이었던 ‘재난 이후의 대응’에 대해 말을 덧붙여 무엇할까. 우리는 재난이 개인의 삶을 앗아갈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거대한 상흔을 남긴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몇 년 후 경주와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2017년 11월의 지진 때, 세월호와 촛불 혁명 이후 새로 바뀐 정부는 ‘수능 시험 연기’라는 대응을 했다. 재난에 대한 반성이 불러온 진전이라고 평가해도 좋을 것같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재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세계 곳곳에 여행을 다니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늘고, 머나먼 지구 반대편에서 근무하거나 취재를 하거나 구호활동을 하는 이들이 많이 생겨났지만 재난에 대처하는 법은 여전히 우리 머리 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내 경우에도, 오래 전 이라크 전쟁을 취재하러 가기 앞서 군부대를 방문해 방독면 쓰는 법, 지뢰를 피하는 법 등을 서너시간 배웠지만 그리 기억에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아프리카에 드나들 때에는 말라리아 약을 먹고 온갖 백신을 맞았지만 사실 세상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재난이 대개 닥쳐올 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준비해본 적은 없다.
이 책의 저자는 재난이 일어났거나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곳을 다니며 경험을 쌓은 사람이다. 물론 글도 잘 쓴다. 하지만 이 책이 더 반가운 것은 저자의 경험과 글솜씨를 보고배울 수 있다는 표면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세계가 하나로 이어져 있고 한국인들의 생활무대가 지구 전체로 넓어졌을뿐 아니라 ‘일상 속의 재난’이 도처에 숨어 있는 시대에, 충실하고도 재미있는 ‘재난 대응 매뉴얼’이 나왔다. 서점에 가보면 여행기들은 넘쳐나지만 이런 매뉴얼은 찾아보기 힘들다. 독자들은 뒤늦게나마 이제야 처음으로 한글로 적힌 재난 대응 책자를 갖게 된 셈이다.
우스운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꽤나 여러 곳을 돌아다녀본 편인 내게는 ‘회전문 공포증’이 있다. 보폭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회전문에 부딪치거나 혹은 센서를 작동시켜 멈춰버린 회전문 안에 갇힌 기억들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화산이 폭발하는 스페인의 섬과 ‘세계 살인의 수도’라고 불리는 멕시코의 티후아나 등 여러 곳에서 살았던 경험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안전하게 살아가는 법’은 그렇게 먼 나라들을 돌아다니는 방랑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찹쌀떡과 전기장판, 빙판길과 기생충같은 생활 속의 위험들에서부터 미세먼지와 독성 식물같은 환경요소들의 위험을 짚어주고 대처법을 알려준다.
책은 얼핏 보기엔 안전 상식을 요약한 매뉴얼같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지진이나 건물 붕괴, 지하철의 남성 승객과 아동 대상 성범죄, 선박 침몰, 태풍과 전염병처럼 우리가 보고들어온 것들을 위험 관리라는 틀을 통해 보여준다. 책장을 넘기며 쭉 훑어가다 보면 이런저런 위험한 사건들이 일어났을 때에 반짝 흥분했다가 금세 잊어버리곤 하는 한국 사회의 건망증, 내 안의 무사안일함을 곱씹게 된다.
전쟁과 테러, 총격전과 쓰나미, 그리고 뒷부분에 이어지는 ‘재난과 정치’에 이르면 그제서야 저자가 진심으로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개개인이 재난을 걱정하고 미리 준비하고 일이 터졌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재난은 사회적인 것이고 정치적인 것이다. 시민들의 힘으로 정부를 움직이지 못하면 사회 전체의 안전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전도 평화도, 제대로 알고 요구해야만 가질 수 있는 것들이다. 저자의 말처럼 “재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회가 무엇을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자연 재해가 재난이 되었는가, 이 재난을 어떻게 극복해 다음에는 같은 재해에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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