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한국 사회, 안과 밖

빨치산 장기수 출신 구연철 선생이 말하는 ‘군함도의 기억’  

딸기21 2017. 7. 27.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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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열일곱, 이런 사람들이 끌려왔어요. 나중엔 쌀도 없어서 콩기름 찌꺼기를 만주서 가져오면 그걸 삶아 먹었지. 그러다 배탈나서 일 못하면 얻어맞고.”

 

25일 서울 왕십리 CGV 영화관에서 일제 강제징용 문제를 다룬 영화 <군함도> 시사회가 열렸다.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우기 앞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마련한 시사회였다. 이 자리에는 부산에서 올라온 손님이 있었다. ‘군함도’로 불리는 일본 하시마(端島)의 탄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빨치산 장기수 출신의 구연철 선생(86·사진)이다. 군함도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해방을 맞은 구 선생은 영화를 보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군함도의 탄광에 끌려간 노동자들의 지옥같은 삶,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일제의 잔혹상, 극적인 탈출 시도 등을 그렸다. 후반부로 갈수록 하시마의 역사적 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액션 탈출극’으로 향해간다. 구 선생은 “상황이 비슷한 것도 있고 영화적으로 각색하자니 다른 것도 있지만, 좋은 영화”라면서 하시마에서 보낸 시절을 돌아봤다. 1931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그는 만 8살 때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하시마로 갔다. 부친은 먹고 살기 힘들어 만주로, 일본으로 돌아다녔던 노무자였다고 했다. 그러다가 하시마에까지 흘러가게 됐고 가족을 그 섬으로 불러들였다. 

 

말하자면 그의 부친은 징용자가 아닌 이주노동자였던 셈이다. “징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거든. 내가 거기 갈 때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성기였어. 일본군이 남양군도와 만주를 점령하고….” 영화에선 식민지 경성(서울)에서 악단을 이끌던 ‘강옥(황정민 분)’이 어린 딸까지 데리고 하시마에 끌려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구 선생의 설명은 달랐다. 전쟁 말기에 징용돼온 노동자들은 그저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많아야 스물다섯 살의 젊은이들이었다”고 했다. 

 

“농사를 짓다가 막 끌려온 거지. 지하로 1000m 넘게 파고들어간 갱도가 있는데, 거기 노동자들이 드나드는 승강탑이 있었어. 수십m 짜리 승강탑으로, 헬멧을 쓰고 머리에 전조등을 단 노동자들이 아침저녁으로 오르내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곡괭이 하나씩 들고서.”

 


하시마에서 지낸 6년 동안 그는 아래위층에 방이 한 칸씩 있는 목조건물에 살았고, 탄광 마을의 학교에 다녔다. 높이가 20~30m에 폭이 1m 정도 되는 방파제 위에서 그곳 학생들은 매일 구보를 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만 14세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에게 하시마의 기억은 너무나 깊이 박혀 있었다. “그 섬이 동서로 320m, 남북은 640m, 넓이는 6.3ha 밖에 안 돼.” 구 선생은 그 섬에 대한 자료들을 늘 찾아보고, 확인을 한다고 했다. 

 

하시마는 나가사키(長崎) 남서쪽에 있는 섬이다. 1890년에 미쓰비시가 섬을 사들인 뒤 해저탄광 채굴기지로 삼고 주변을 매립해, 암벽을 둘러쳤다. 그 안에 건물이 생기고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마치 외관이 군함처럼 보이게 돼 생긴 별명이 군함도, 일본식으로는 ‘군칸지마’다. 

 

영화에서처럼 패전을 앞둔 일본인 광산 관리자들이 조선인 노동자들을 대량 매몰시키려 한 정황은 없지만 징용으로 끌려간 이들이 혹독한 노동에 고통받은 것은 분명하다. 1986년 일본 시민단체들이 공개한 사료에 따르면 1925~45년 이 섬에서 숨진 노동자 1295명 중 조선인이 122명에 이르렀다. 재일조선인 인권단체는 무리한 전시 증산계획에 동원됐다 숨진 것으로 본다. 살해되거나 폭행·학대를 당하고 숨진 조선인도 2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배탈이 나거나 몸이 아파 일하러 못 간 노동자들은 노무사무실 입구에서 구타를 당했어요.” 구 선생은 학교를 오며가며 매일같이 노동자들이 얻어맞는 걸 봤다고 증언했다. 

 

징용자가 아니더라도 섬에서의 삶은 누구에게나 힘들었다. 물부터 먹을 것까지 모든 것이 배급제였다. “처음엔 콩이랑 쌀을 나눠주니까 그걸 먹었어요. 나중엔 먹을 게 없어서 노동자들이 배가 고팠지. 만주에서 일제가 군용 콩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를 가마니에 담아 배로 옮겨왔어. ‘대두박’이라고 불렀는데, 며칠씩 걸려 만주에서 온 것이니 가장자리쪽은 다 썩었어. 안쪽 멀쩡한 것만 꺼내서 삶아먹으며 버텼어요.” 관리자들이 장부를 빼돌리고, 노동자들의 임금을 빼앗아갔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하시마에서 해방을 맞았고,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역설적이지만 돌아온 고국에서도 그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서울에서 중학교에 편입했고, 동국대에 진학했다. 대학생활 1년만에 이승만 반대 투쟁을 하다가 제적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구 선생은 울산과 양산 일대에 걸쳐져 있는 신불산으로 들어갔다. ‘영남알프스 빨치산’으로 불린 선생의 일대기는 안재성 작가의 <신불산>이라는 책으로도 소개돼 있다. 그러다 체포돼 감옥에 간 것이 1954년. 무려 20년 8개월 간 옥살이를 했다. 하시마, 빨치산, 장기수. 그렇게 이어진 선생의 삶은 그 자체가 ‘한국 현대사’다. 하지만 선생은 투옥 이후의 삶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폐광이 된 뒤 버려진 섬 하시마. _ 위키피디아


세월을 거치며 선생의 인생에 숱한 곡절이 새겨지는 사이, 하시마도 변했다. 일본의 전쟁에 동력을 대주던 이 섬의 석탄 생산량은 시간이 흐르며 계속 줄었고 1974년에는 아예 채굴이 중단됐다. 한때 체류자가 5000명이 넘던 섬은 폐광과 함께 무인도로 변했다. 방치된 섬은 비극적인 역사보다는 기괴한 외양으로 전후 세대에게 인기를 끌었다. 하시마 징용자들의 아픔이 아닌 ‘배틀 로얄’ 소설과 영화의 배경으로 더 유명해졌다. 출입은 통제돼 있으나 ‘군칸지마 크루즈’ 관광상품이 있어 주변을 돌며 구경할 수 있다. 이곳을 배경으로 한 사진작품이나 다큐멘터리도 많다.

 

구 선생은 지난해 10월 이제는 관광지처럼 돼버린 하시마를 방문했다.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얼마나 변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갔는데 정작 살았던 곳과 학교, 징용자 합숙소같은 곳들은 출입이 통제돼 보지를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배에서 내리면 섬의 유일한 출입구인 터널이 있어요. 빗물 떨어지는 그 터널을 지나가야 해. 거기 ‘영광의 문’이라는 글이 써 있었는데 그건 없어졌습디다.”

 

일본은 하시마의 아픈 역사를 지운 채 ‘메이지 시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이 섬과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 등을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켰다. 징용자들의 역사가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양대 노총은 다음달 12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운다. 이들 또한 한반도의 ‘노동의 역사’에서 지워져선 안 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상은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김운성 부부 작가가 제작했다. 용산역은 일본 점령기 때 징용자들을 임시로 집결시키는 ‘인간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 한국에서 하시마의 노동자들을 기억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부인과 함께 부산 해운대구에 살고 있다는 구 선생은 혹시나 젊은 노동자들이 많이 왔을까 해서 이날 시사회에 왔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지만 노동환경이나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만이 많다고 그는 말했다. “내가 목격자니까 당시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많은 사람들과 얘기해보고 싶은 거지요. 그런데 우리 테두리 안에서의 노동만 얘기하면 그건 모순이야. 다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거 아닙니까. 그게 가장 뚜렷한 목표지.” 선생의 이야기는 하시마와 70여년 세월을 넘어 ‘통일’ 쪽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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