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7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일본 히로시마(廣島)의 평화기념공원을 찾아, 1945년 8월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무너진 ‘원폭돔’ 앞에 섰다. 원폭 투하 뒤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를 찾은 희생자들을 위해 헌화하면서 ‘적에서 동맹으로’ 바뀐 미·일 관계를 강조했다.
그리고 7개월 지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방문한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에 대한 답방이자, 70여년 전 악연을 매듭짓고 ‘미래를 위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방문이다. 아베는 오는 26~27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함께 진주만을 방문, 옛 일본군에 의한 진주만 공격의 희생자를 추도하는 행사를 열기로 했다고 5일 밝혔다.
아베는 “두번 다시 전쟁의 참화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미래를 위한 결의를 나타내고 싶으며, 미·일 화해의 가치를 발신하는 기회로 삼고 싶다”며 진주만 방문의 의미를 설명했다. 백악관은 5일 두 정상의 진주만 방문 계획을 확인하면서 “이전의 적이 이익과 가치를 공유하는 가장 가까운 동맹으로 바뀌게 해준 화해의 힘을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다.
5일 일본 도쿄의 한 사무실 TV에 아베 신조 총리가 미국 하와이 진주만 방문 계획을 발표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도쿄 _ 지지연합뉴스
일본 함대는 1941년 11월 8일(미국시간 7일)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했다. 그 직전까지도 미국은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와 확전을 막기 위한 협상을 진행중이었으나, 일본군은 항공모함 6척과 폭격기 183대, 어뢰를 동원해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미군 태평양함대 대규모 전함 12척이 파괴됐고 애리조나 호에 타고 있던 해군 병사 1177명 등 미군 약 2400명이 숨졌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당시 미 대통령은 곧바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유럽에서 시작된 2차 대전은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됐다. 미국은 당시 가라앉은 배들 일부를 기념관으로 만들어 ‘치욕의 날’을 기리고 있다.
아베가 진주만을 방문하면, 일본 현직 총리로서는 진주만 공습 이후 첫 방문이다. 지난 8월 아베의 부인 아키에가 진주만을 깜짝 방문해 희생자를 위로한 적이 있다. 일본 정부는 “아키에의 개인적인 방문”이라고 밝혔지만, 아베가 공식 방문을 할지 모른다는 관측이 나왔다.
아베의 진주만 방문 결정에는 여러 정치적 함의가 들어 있다. 오바마가 히로시마를 찾았을 때 일본에서는 원폭 투하를 ‘사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2차 대전 참전군인 단체와 공화당 등에서 오바마의 행보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태평양전쟁 가해국인 일본이 전쟁범죄를 사죄하지 않는데, 미국이 사과하는 것으로 비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도 오바마를 비난했다.
오바마 정부는 히로시마 방문 전 아베에게 진주만 방문을 제안했으나 일본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트럼프는 미국의 안보우산 밑에서 평화를 누리는 일본이 안보비용을 더 부담해야 된다며 강경발언을 계속해왔다. 아베는 지난달 이례적으로 ‘당선자 신분’인 트럼프를 찾아가 뉴욕에서 만나기까지 했다. 트럼프 집권 뒤에도 동맹관계에 변함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진주만의 미군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계산을 했을 수 있다. NHK방송은 아베의 하와이 방문 배경에 “미국 새 정권 출범 뒤에도 강고한 동맹관계를 견지하려는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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