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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뉴스]‘100만 촛불’...세계의 100만명 집회들

딸기21 2016. 11. 13.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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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11일 프랑스 파리에서 시민들이 샤를리에브도 테러에 항의하는 행진을 하고 있다. _ Getty Images


‘백만 촛불’. 

 

12일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민중총궐기’에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찰은 약 25만명이 모였다고 했으나, 집회 참가자들은 “100만명은 족히 넘었을 것”이라며 ‘체감 참가자 수’를 추산하지요. 이날 서울시청과 광화문 부근 지하철 승하차객 숫자 등으로 미뤄봐도 100만명이 불가능한 수치가 아니라는 보도들이 나왔습니다.


이날 집회는 1987년 시민항쟁을 넘어서는 대규모 집회였습니다. 한국 인구의 2%가 서울 도심에 모였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입니다. 세계 언론들이 서울의 촛불집회에 관심을 가진 것도 당연합니다. 이런 규모의 시위가 이렇게 평화적으로 열린 것도 이례적이었고요. 

 

과거 세계에서 열린 100만명 이상이 참여한 평화집회들은 어떤 게 있을까요.


‘100만 군중’ 몰고 다닌 교황

 

2013년 2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알라하바드에서 열린 힌두교 행사에 3000만명이 참여했고, 2015년 12월 이라크 중부 시아파 성지 카르발라에서 열린 집회에 2600만명이 함께 했다는 현지 언론들 보도가 있었습니다만 이 행사들은 종교집회였다는 점에서 평화시위와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종교행사 다음으로 많은 이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는 것은 추앙받는 지도자의 장례식입니다. 1989년 6월 이란 이슬람혁명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타계했을 때 테헤란에는 추모 인파 1000만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1970년 10월 이집트 가말 압둘 나세르 대통령의 장례식에는 500만명이 집결했습니다. ‘아랍의 목소리’라 불렸던 이집트의 국민가수 움 쿨숨이 1975년 2월 사망했을 때에는 카이로에 400만명이 모였습니다. 

 

2005년 4월 8일 바티칸 성베드로광장에서 열린 교황 요한바오로2세의 장례식. Getty Images


2005년 4월 교황 요한바오로2세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 수는 200만~400만명 사이에서 추산치가 왔다갔다합니다. 요한바오로2세는 군중들을 몰고다녔지요. 교황이 타계한 뒤 교황의 고국인 폴란드의 크라쿠프에 250만명이 모였습니다. 1979년 9월 요한바오로2세가 아일랜드 더블린을 찾았을 때에는 피닉스파크에 125만명이 모여 교황을 지켜봤습니다. 2011년 5월 요한바오로2세 시성식 때에는 바티칸의 성베드로광장에 100만명이 모여 축하했습니다. 한국의 대규모 종교행사로는 120만명이 모였다고 하는 1975년 통일교 여의도 집회를 들 수 있겠네요.

 

2015년 1월 프랑스에서는 만평잡지 ‘샤를리에브도’를 노린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1월 10일과 11일 프랑스에서는 테러를 규탄하는 평화행진이 열렸습니다. 10일에 약 70만명, 11일에 370만명 등 이틀 동안 440만명이 참가했습니다. 프랑스 전국에서 이뤄진 평화행진 참석자 수를 합한 겁니다. 파리에 모인 사람들만 치면 120만~160만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프랑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였습니다.


동유럽 675km 인간띠잇기

 

이탈리아에서는 2002년 3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정권의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며 좌파 노조연합 CGIL 주도하에 대규모 시위가 열렸습니다. 로마의 막시무스광장에 300만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듬해 2월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기 위해 로마에 300만명이 다시 결집했습니다.

 

1986년 4월, 군사정권의 핍박을 피해 영국 등지에서 망명했던 파키스탄 민주화 지도자 베나지르 부토가 귀국했습니다. 북동부 펀자브주의 라호르에서 열린 환영 집회에 300만명이 나왔습니다. 시민들은 10시간 동안 라호르에서 미나르-이-파키스탄 공항까지 12km를 행진해 부토를 맞았습니다. 1988년 파키스탄 첫 여성 총리가 됐던 부토의 인생은 그 후에도 순탄치 않았고, 부패 스캔들에 시달리다가 다시 외국으로 떠나야 했지요. 2007년 다시 귀국했으나, 수도 이슬라마바드 부근 라왈핀디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 유세를 하던 중 암살됐습니다.

 

1989년 8월 23일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에서 동시에 열린 인간띠잇기 행사 ‘발트의 길’. Getty Images


영국에서는 1953년 6월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즉위할 때 300만명이 런던에 모인 게 최대 집회 기록입니다. 1981년 7월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가 결혼할 때에는 100만명이 모인 걸로 추산됩니다. 1997년 9월 다이애나비의 장례식 때에도 100만명이 모였습니다. 영국에서 100만 군중을 부르는 것은 늘 왕실이군요. 2002년 6월 엘리자베스2세 즉위 50년인 ‘골든주빌리’ 행사 때 버킹엄궁 주변에 100만명이 몰려들었고, 2011년 4월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이 결혼할 때에도 런던에서 100만명이 축하했습니다.


인구규모가 크지 않은 동유럽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1989년 역사적인 집회가 열렸습니다. 소련이 무너지면서 독립국가들이 탄생할 무렵이었지요. 그 해 8월 23일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 라트비아의 리가, 에스토니아의 탈린을 잇는 ‘발트의 길’이라는 인간띠잇기 행사가 열렸습니다. 675km에 걸쳐 200만명이 손에 손을 잡고 냉전 종식을 축하했습니다. 2010년 5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스페인 식민제국에 맞서 싸운 ‘5월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200만명이 참여했습니다.


인구 30% 시위 나온 레바논

 

‘민주화 혁명’의 대명사가 된 필리핀의 1986년 ‘피플파워’ 혁명. 올해로 벌써 30년이 됐습니다. 당시 시내로 나온 사람들은 몇 명이었을까요. 필리핀 정부의 시민혁명기념 웹사이트(EDSA)에 따르면 독재자 마르코스 퇴진을 외치며 마닐라에 200만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1983년 베니그노 아키노가 암살됐을 때, 장례식 추모 인파도 그와 비슷한 규모였습니다. 1989년 중국 톈안먼 사태 때에는 유혈진압에 항의해 홍콩 인구 약 550만명 중 150만~200만명이 시내로 나왔다고 합니다.

 

1986년 필리핀 민주화 혁명. 암살당한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의 부인으로 뒤에 대통령이 된 코라손 아키노가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필리핀 EDSA 웹사이트


지중해에 면한 중동의 소국 레바논은 오랫동안 시리아의 점령통치를 받았습니다. 2005년 3월, 인구 400만명 중 30%에 이르는 160만명이 베이루트의 거리로 몰려나와 시리아군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백향목 혁명’이라 불린 사건이었지요. 결국 시리아는 점령을 끝내고 물러가야 했습니다. 올해 3월 브라질 지우마 호세프 정부에 항의하는 집회에는 상파울루에서만 140만명이 모였다고 하지요.

 

올해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게릴라 반군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과의 평화협정을 주도한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이 선정됐습니다. 2008년 보고타에서 FARC의 폭력행위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을 때 거리로 나온 시민은 100만명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2004년 보스턴 레드삭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승리했을 때에 비슷한 규모의 팬들이 보스턴에 모였고요. 2013년 시카고 블랙호크스가 스탠리컵 결승전에서 이겼을 때에는 시카고 거리에 200만명이 뛰쳐나와 잔치를 벌였습니다. 1974년 같은 대회에서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가 이겼을 때에도 필라델피아에 200만명이 모였습니다.


베네수엘라, 지금도 ‘100만 집회’ 중

 

축구를 잘 하고 사랑하지만 늘 성적은 별로였던 스페인. 2010년 드디어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을 때 마드리드에 200만명이 모여서 축하했습니다. 스페인에서 그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2014년 9월입니다. 카탈루냐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시민 180만명이 바르셀로나에 집결했습니다. 그 2년 전인 2012년 9월에도 150만명이 바르셀로나에서 분리독립 주민투표를 요구했습니다.

 

성소수자 집회로는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2006년 6월 열린 게이 퍼레이드에는 250만명이 참석한 것이 최대 기록인 것 같습니다. 201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행진에는 150만명이 참가했습니다.

 

2009년 1월 20일 미국 워싱턴의 내셔널몰에서 열린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Getty Images


미국에서 한 자리에 가장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은 인물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입니다. 2009년 1월 20일 취임식 때 워싱턴에 180만명이 집결했습니다. 내년 이 날, 도널드 트럼프의 취임식에는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참석할까요. 

 

구호·환경단체 행사가 거대규모로 치러질 때도 있습니다. 2005년 7월, 당시 영국에서 열리고 있던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 맞춰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라이브8’이라는 공연이 열렸습니다. 밥 겔도프가 주도한 콘서트를 보기 위해 150만명이 모였습니다. 1990년 4월 22일 ‘지구의 날’에는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75만~150만명이 지구 환경을 고민했습니다. 센트럴파크에서는 1982년 6월에도 냉전을 끝내고 핵무기를 폐기하기 위한 시위가 열려 100만명이 모였지요.

 

최근 100만명 집회가 이어지는 곳은 베네수엘라입니다. 지난 9월 1일 카라카스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려 100만명이 참가했습니다. 10월 26일에는 120만명이 모였지요. 베네수엘라의 시위는 현재진행형입니다.


‘100만’을 늘어놓으면

 

100만명 집회의 규모는 12일 서울에서 확인했습니다만, 사실 ‘100만’은 매우 상징적인 숫자인데다가 쉽게 감이 오지 않는 큰 숫자입니다. 

 

100만이라는 숫자에 대해 살펴볼까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페이퍼백 판본이 약 600쪽인데, 거기 담긴 단어가 대략 100만 개라고 하고요. 자동차 타이어 100만개를 한 줄로 이으면 1900km 정도입니다. 위키피디아에는 이것 말고도 재미있는 ‘100만개’들이 나와 있네요. 사람 손가락 100만개를 합쳐놓은 길이는 약 22km라고 합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라는 책 제목은 사실 일본에서 붙인 겁니다. 감옥에 갇힌 마르코 폴로의 구술 기록을 루스티첼로 다 피사라는 인물이 받아적은 것이 이 책입니다만, 원제는 <세계의 기술(記述)>입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일 밀리오네(Il Milione)>라고 불립니다. ‘100만’이라는 뜻입니다. ‘100만’은 크고 많은 것을 상징하는 숫자이니까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적벽대전 당시 조조의 백만대군, 수(隋)나라 양제의 백만대군은 모두 숫자가 많았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일 뿐, 과장이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조조의 위(魏)나라 인구가 약 440만명으로 추정되니 100만대군이 있을 수 없었겠지요. 6세기 수나라 인구는 약 4600만명으로 추정됩니다만, 고구려와의 전쟁에 100만명의 젊은이들을 동원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봅니다.

 

12일 서울의 ‘백만대군’은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였던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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