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

[퍼온 글]해질녁 소양강에서 허점분 교수님을 그리워하다.

딸기21 2016. 3. 18. 20:19
728x90

해질녁 소양강에서 허점분 교수님을 그리워하다



   

 

 

 

이학원: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허점분 은사님은 가난한 제자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잊을 수 없는 나의 영원한 은사님이시다. 은사님 곁을 떠나 43년의 교직생활을 하는 동안, 은사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내 제자들에게도 전해주려고 무진 애를 써보았지만, 은사님의 크신 사랑에 비하면鳥足之血 이었다. 70십대 중반 나이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모교 학창시절에 베풀어 주셨던 그 크신 사랑을 못 잊어 은사님이 무척 그립다.

 

우리 대부분은 유치원부터 대학원 교육과정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선생님과 만남의 인연을 맺고 헤어진다. 부모님을 운명적으로 만나듯, 선생님도 운명적으로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석사·박사 과정의 능력 있는 학생들은 교수님을 선택하여 진학하는 경우가 있지만,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는 선택할 수 있어도, 선생님은 부모님처럼 선택의 여지없이 운명적으로 만나서 인연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君師父一體란 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나는 모교 부산교육대학에 입학, 선택의 여지없이 허점분 은사님과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엄밀한 의미의 師弟之間이란 은사님의 전공 학문을 전수 받아 크게 발전시켜야 하고, 은사님의 높은 인격을 흠모 존경하여 스스로 인격을 닦고 깨우쳐 자신의 인격화로 발전시켜야 하며, 은사님의 학문적 정신을 이어 받아 계승 발전시키는 제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師弟之間이란 말을 부끄러움 없이 사용할 수 있다.

 

나는 허점분 은사님께서 한 평생 연구 강의하셨던 가정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은사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초등학교 전체 교육과정내용 중에서 가정과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중요하고, 광범위하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현실적으로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늘 은사님의 인격을 흠모 존경하였고,은사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을 통하여 교육은 사랑이다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체험함으로써 나도 교단생활 43년 동안에 은사님을 본 받으려 사랑을 화두로 애를 쓰며 지내왔으나 역부족 교육일생 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43년 동안, 내 교육일생의 화두였던 제자 사랑이 역부족이었던 것을 깨달으며, 마음 아픈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은사님의 교육철학의 바탕을 이루었던 교육은 사랑이다라는 그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고 애를 써 보았다. 나의 제자들 중에서도 나처럼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 처한 제자들이 참으로 많았다. 그들을 위해서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주려고 안간힘을 다해보았지만, 은사님이 내게 주신 크신 사랑에 비하면, 턱 없이 모자라는 제자 사랑이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허점분 은사님은 지금으로부터 97년 전 1909 2 5,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서 출생하셨다. 결혼을 하시어 4 1녀의 다복하신 어머님이 되셨지만, 6·25전쟁 때 국회의원 이셨던 부군 구중회 의원께서 북한 괴뢰군에게 강제로 납북되신 이후, 긴긴 세월 홀로 외롭고 쓸쓸한 피눈물 나는 세월을 보내고 계셨다. 나는 모교인 부산교육대학에서 처음으로 가정교육을 강의하시는 교수님을 만나 師弟之間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교수님께서는 1968년 의원면직으로 부산교육대학 모교를 떠나셨지만, 그 동안 수많은 제자들을 훌륭한 교육자로 길러 한국 초등교육 발전에 기여하셨고, 모교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셨던 훌륭한 교수님 이셨다.

 

1962년 내가 모교에 입학한 해에 은사님의 연세가 쉰셋 이셨다.

초로의 멋진 여자 교수님이셨다. 대학에 여자 교수님이 계신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신기했고 놀라운 일었다. 얼마나 똑똑하고 얼마나 공부를 많이, 잘 하셨기에 여자의 몸으로 교수가 될 수 있었을까? 그런데 남학생들에게 가정학을 강의하신다고 하니, 그 강의가 제대로 될 수 있을까 하는 기우와 염려가 앞섰다. 여학생들에게는 가정학 과목을 수강하게 하고, 남학생에게는 폭 넓은 실과 과목을 수강케 하는 것이 오히려 초등교육 발전을 위해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나, 전국 교육대학 교육과정 편성과 내용 결정에 미국 피바디교육고문단이 관여하여 만든 것이라, 전국 9개 교육대학의 어느 대학도 교육대학 교육프로그램 편성과 결정에 감 놓아라, 밤 놓아라할 형편이 못 된다고 하였다.

 

여하튼 남학생인 내가 가정학 과목을 수강해야 교육대학을 졸업할 수 있다니까, 억지 춘향으로 수강을 할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지만, 그렇게 썩 마음 내키는 수강은 아니었다. 그래서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가정 교과목 수강에 따른 강의를 담당하신 교수님으로 허점분 은사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가정학 강의 첫 시간에 기존의 가정학에 대한 내 선입견이 잘 못 되어 있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될 남학생들에게도 가정학 수강이 반드시 필요하고, 강의를 맡으신 허점분 교수님도 훌륭한 교수님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강의 시간 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교수님의 강의 속으로 푹 빠져 들어갔다.

 

허점분 은사님은 약간 곱슬머리에 눈 꼬리가 좀 밑으로 향해 나셔서 눈매가 좀 매서워 보였지만, 다정다감한 어머니 같은 인상을 주었고,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자녀들이나 제자들이 은사님 앞에서는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사님의 자태가 워낙 우아하신 데다, 단호한 성품을 가지신 것 같아서 존경스러웠으며, 주름이 약간 보이는 목에,목을 타고 내려오는 동전이나 원피스 목 파인 부분과 목선이 이루는 황금분할 공간이 선생님의 흰 피부와 잘 조화를 이루어, 멋진 어머니 상을 연상케 하는 멋있는 여자 교수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 시간 중에 저런 분이 내 어머니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강의 내용을 놓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강의 도중이나 제자와의 어떤 만남에서도 은사님의 그 서럽고 어려웠던 가정사를 입 밖에 내시는 법이 절대로 없었다. 대단한 성품의 은사님이셨다.

 

나에게는 은사님을 마음으로 진정 존경하게 되었던 계기가 있었다. 내 상식으로는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남학생 이무영 군이 여학생만 지망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던 가정반에 지망하여 가정반 학생이 된 사건이 일어났다. 단연 온 캠퍼스 안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여러 교수님들이 남학생의 가정반 지망이 불가하다고 반대를 하였으나, 정작 가정반 교수님이셨던 허점분 교수님께서는 흔쾌히 받아주시고, 이무영 군을 따로 불러 격려 말씀까지 해 주셨다는 소문이 온 캠파스 안을 떠들썩하게 떠돌아다녔다.


기존의 가치관과 룰을 벗어난 파격적인 제자의 도전적 선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신 그 넓으신 아량과 열리신 마음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모른다. 나도 그 당시 나를 옥죄고 얽어매고 있던 가난과 수많은 불편한 환경과 기존의 틀과 굴레를 깨부수며 벗어나고 싶었던 젊음의 욕망이,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자리 잡고 있었는데, 허점분 은사님의 그 파격적인 이무영 군 가정반 수용 결정이 창조적인 교육구조개혁이란 생각을 하면서 내심 쾌재를 불렀다.


강의 시간이 되면, 교수님에 대한 존경심이 내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모교 전체 교육과정에 더 큰 변화를 가져오실 여자 교수님이시라는 생각을 하면서, 막연했지만 큰 기대를 가지고 모교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아름답고 꿈 많은 학창시절이었고, 추억이 많이 쌓인 학창 시절이었다.


친구들 간에는 가정반을 선택한 이무영 군이 애브노멀한 친구라고 입방아를 찧었지만, 정작 내심으로는 용기 있는 이무영 친구를 부러워 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무영이는 좋겠네! 아름다운 꽃밭에서 청일점 호랑나비가 되어 이 꽃 저 꽃 기웃거리며, 훨훨 날아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맛있는 한식·양식도 만들어 먹고, 음식 간도 맨 처음 보면서 교수님의 학점도 특별히 후하게 받을 것이다. 꿩 먹고 알 먹고, 꿩 털로 눈 비비는 이무영이가 일거삼득을 한 행운아다


입학한지가 엊그제 같았는데, 한새벌 캠퍼스에 벌써 가을이 왔다. 캠퍼스 주변 언덕에는 코스모스 꽃이 예쁘게 피어, 푸른 가을 하늘을 비낀 살랑바람이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더욱 애처롭게 만들어 예쁘고 애잔한 가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본관 행정실 앞길을 지나다가 마주 오시는 허점분 교수님께 목례 인사를 하고 지나가려는데, 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시고 연구실에 잠간 들렀다 갔으면 한다고 말씀을 하셔서 교수님을 따라 갔다.


가정반 학생도 아닌데, 왜 나를 보자고 하시는지 자못 궁금했다.

그리고 교수님을 뒤따라가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강의시간에 마음속으로 교수님을 존경하면서 열심히 강의를 들은 죄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라, 혹시 나의 실수와 잘 못이 있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마음을 진정하려고 애를 쓰면서 교수님을 따라 갔다. 교수님 연구실은 은사님 풍모와 성품처럼 깔끔하고 정갈했다. 따뜻한 차를 내 오셨다.

 

자네 이름이 무언가?”

“1학년 5반 이학원입니다

자네가 그렇게 가난한 집안 출신인가?”


거두절미하고 저를 똑 바로 쳐다보시고 물으셨다. 나는 당황했다. 가난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집안 까지 들먹이시며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수학과 이충걸 교수님이 내 고향 출신이신데다, 내 집안을 환히 잘 알고 계시니 혹시, 이충걸 교수님께서 허점분 교수님께 내 이야기와 내 집안 이야기를 다 하신 것이 아닌가 하고, 엉뚱한 생각까지 하면서 많은 걱정을 하면서 사태의 진전을 기다렸다.

 

순간적으로 상한 자존심이 내 얼굴 표정에 역역히 나타났을 것이 분명하였다. 나의 가장 큰 약점 중의 하나가 내 마음 상태가 금방 얼굴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상대방에게 너무 쉽게 내 마음 상태를 읽혀지는 것이 탈이다. 솔직한 것은 좋다고 치더라도, 대인 관계를원만하게 이끌어 가는 데는 어려운 점이 많은 성격이다. 이런 나를 내 자신도 못 마땅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내도 한 평생 주의를 주었지만, 고칠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나에게 이익 될 것이 하나도 없는 버릇이라면 버릇이었고, 태생이라면 태생이었다. 교수님께서도 나를 쳐다보시고 좀 당황하신 표정을 지으시더니, 순식간에 어머니 같은 부드러운 표정과 따뜻한 말씀으로 나를 위로해 주셨다.


자네 바지 엉덩이를 보고 알았지! 군인 작업복을 염색한 바지 엉덩이가 낡았는데, 재봉틀로 다시 누벼 입고 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어. 양쪽 궁둥이를 누빈 바지를 입고 다니는 학생이 자네가 유일한 우리 대학 남학생이야. 이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이 많이 있지. 그러나 그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면 다 잘 살 수 있는 것이지 뭐

 

마치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는 허물없는 제자에게 말씀하시 듯, 교수님께서는 편안하게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을 듣는 나는 그렇지 않았다. 교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으로 내가 왜 교수님 연구실에 불려왔는지, 그 이유의 일부를 알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다 싶었다.

내가 가난하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교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나는 교수님께 당장 항변하고 싶었다. 가난은 참으로 불편하고 부끄러운 것이라고, 그리고 몇 세대에 걸쳐 열심히 일해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그것도 존경하는 교수님에께 부끄러운 그 가난을 들켰다는 생각에 나는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마음 뿐 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한마디 말씀도 드릴 수가 없었다.


방금 전, 나에게 말씀을 하실 때 얼굴표정과는 전연 다르게 갑자기 엄하고 냉정하신 얼굴 표정으로 변하시더니, 오른 쪽 팔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시고,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하시면서, 단호한 표정을 지으셨기 때문에, 교수님의 제스추어와 그 기품에 눌려 어떤 말씀도 한마디조차 여쭐 수 가 없었다.


산전수전 다 겪으신 교수님께서 내 얼굴을 보시고, 언짢게 생각하는 내 속 마음을 알아차리신 것 같아, 속으로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거처하는 곳이 어딘가?”

, 서구 보수동 세무서 부근 고모님 댁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고모부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동광초등학교 6학년 학년주임을 하시는 최수창 선생님 이십니다

, 그래요?” 하시면서 얼굴에 특유의 미소를 지으셨다.  


여기서 대화가 끝나고, 교수님과 나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씩 마셨다. “이 군, 사실은 내가 이 군에게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를 소개해 주려고 불렀네. 자네 의향은 어떤가? 아르바이트 경험은 있는가?”


그 당시 교대 학생들에게 아르바이트라 하면 당연히 가정교사 자리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요즘은 여대생들이 술집에서 서빙 하는 것도 알바 한다고 한다. 어려운 형편의 제자를 도우려면 더 자세하게 알바 종류를 물어 보아야 하는데, 참으로 어려운 점이 많은 세상이 되어버렸다.

 

나는 전연 생각지도 못한 은사님의 말씀에 당황감과 감사의 마음으로 심장이 뛰면서 얼굴이 화끈화끈해 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교수님의 진의도 잘 모르는 채, 가난은 불편하고,부끄러운 것이라고 항변하고 싶었던 마음을 일시적으로나마 가졌던 것을 죄책 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앞에 앉은 제자가 그런 얄팍한 마음을 가진 줄도 모르시고, 못 난 제자를 사랑해 주시는 은사님께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서 얼굴은 물론, 귀 속까지 속죄의 빨간 물이 들었을 것이다.

 

경험이 전연 없습니다. 그러나 교수님께서 추천해 주시면 최선을 다하여 해보겠습니다.”

응 그래요! 그렇게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입주를 하여 학생 생활까지 잘 지도를 해 주어야 하고, 내년 봄 부산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할 부산중학교 3학년 학생이라네. 아무래도 좀 부담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 학급학생 50여 명 중40~45등 정도의 석차를 하고 있다고 해요. 가정교사 집 위치는 마침 이 군의 고모님 댁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 부산여고 근처 신산부인과 의사님 댁이고, 산부인과 의사가 내 친구이고, 외아들이야, 남편 되시는 분은 부산시 수산협동조합 이사장으로 계시는 분이신데, 부부가 다 바쁜 나날을 보내다 보니, 자녀 교육을 자상하게 보살펴 주지 못할 형편이라, 나에게 부탁을 해 왔어요. 이 군이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확답을 안 해주어도 좋아요. 하루 동안 잘 생각해 보고, 나에게 곧 연락을 해 주면 좋겠어요.”


교수님 연구실을 나오면서 갑자기 세상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외롭고 쓸쓸한 내 인생에 어머님 같은 따뜻한 사랑으로 부족한 나를 지켜봐 주시는 존경하는 은사님이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내 삶이 그렇게 외롭지 만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적인 생각이 들면서 새파란 새싹 같은 희망이 내 앞에 돋아나는 것 같은 환상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은사님의 친구이신 신 산부인과 신 선생님은 참으로 친절하고 다정하고 따뜻한 분이셨다.부산 사회에서도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높은 명문가 집안으로 잘 알려져 있었고, 내외분이 다 인테리겐차 엘리트 계층에 속한 지성인들 이셨다. 친한 친구 허점분 교수가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인데다 직접 추천한 제자라며 나에게 특별한 대접을 해주셨다. 내가 입주해 거처할 방을 안내해 주시면서, 그 동안 여러 명의 가정교사가 우리 집을 드나들었지만, 이 방은 처음으로 방문을 여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방은 1950 6·25전쟁 발발로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을 왔을 때,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었던 성재 이시영 선생이 거처하시던 방이라고 하였다. 부산의 명문가였기 때문에 한 국가의 부통령을 댁에 모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나


이시영 초대 부통령은 조선시대 그 유명한 백사 이항복 선생의 직계 10대 자손이다. 이시영 선생은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침탈당하자 형제·가족 40여명 모두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헌을 한 애국지사이셨다.


해방 후 1947년 성재학원을 설립 신흥대학(현 경희대학)을 세우고, 조국의 청년 교육진흥에도 힘을 쏟았다. 1948 7 20,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1951 5 9, 이승만 독재 정권에 항의하여 국민에게 고함 이란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1953 4 17, 피난처인 부산 동래에서 85세를 일기로 서거하시자, 정부는 국민장 9일제 장례로 선생의 마지막을 예우하여 모셨다.


거처할 방 안내를 다 하시고 난 후, 신산부인과 신 선생님의 말씀이 참으로 고마웠다. “이 선생(필자 지칭)도 전에 이 방에 거처하셨던 이시영 부통령처럼 훌륭한 선생님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시면서 저녁을 같이 한 후, 집에 갔다가 내일부터 입주하여 같이 지내자고하셨다.


중압감이 밀려왔다. 허점분 은사님의 추천과 은사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 내가 거처하는 신 선생님 댁이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양옥집인데다, 전에 같은 방에 거처하셨던 분이 부통령이셨는데, 나 보고 훌륭한 애국지사이셨던 이시영 부통령처럼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훌륭한 선생님이 되라고 기대하시겠다는 신 선생님의 말씀,거기다 매우 친절하고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어머니처럼 대해주시는 신 선생님의 기대에 내가 부응할 수 있을 것인지, 그런 걱정과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운 기분으로 식탁에 앉아 저녁밥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 때까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양식이 나왔다. 바짝 긴장했다. 이걸 어쩌나? 낭패를 당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이솝 우화 중의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가 생각났다.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에서 그림과 말로만 듣고 보았지, 실제로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여 채소를 집고, 고기를 잘라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안 먹을 수도 없어서 보는 것이 배우는 것이란 진리를 믿고, 식구들이 먹는 것을 보고 천천히 따라 먹을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3 학생이 양식 먹는 어색한 내 모습을 보고, 시골 촌뜨기라고 제대로 알아버리면 어쩌나 하고 식사시간 내내 걱정을 많이 했다. 학습지도에 지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내 평생 그날 저녁 같이 긴 저녁은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던 같았다. 지금도 그 날 저녁 고기와 채소가 어떻게 입으로 들어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처음 먹어 본 음식인데도 참 맛 있었고, 정갈했다는 기억만이 날 뿐이다. 나도 무영이와 같이 가정반에 들어갔더라면 허점분 교수님께 직접 양식 만드는 법도 잘 배우고, 먹는 법도 잘 배워 이렇게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내가 입주해 가정교사를 하는 동안, 거의 3일에 한 번은 저녁에 양식을 먹은 덕택에 나도 금방 익숙해져서 가족들과 잘 어울려 양식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했는지 모른다. 입주해 며칠이 지나자, 신 산부인과 선생님은 내가 양식을 처음 먹었던 저녁에 나의 서툰 칼질과 포크질을 보시고, 금방 알아보았다고 하시면서 웃으셨다.


잘 먹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중3 내 제자는 체격도 좋고 미남이었다. 학습 진단 결과 중학교 각 과목의 1학년 교과서에서부터 3학년 교과서까지 교과서를 중심으로 읽고, 풀고, 정리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한 학생이었다. 허점분 은사님 말씀처럼 정말로 머리가 명석하여 이해력과 추리력이 뛰어나서 학습 진도가 빨랐다.


그런데, 3주일을 같이 지내면서 좀 더 친숙해 지자, 나 보고 연애편지를 써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내 제자의 문제점을 직감적으로 파악할 수 가 있었다. 나이에 비해 이성에 대해 너무 조숙한 생각과 태도를 보이면서, 그냥 보통 학생들처럼 생각만으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는 조숙한 이성관이 바로 학습 부진의 문제로 연결되었던 것 같았다.


바로 코앞이 고등학교 입학시험인데 어물 쩡 시간만 때우고,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 체면도 있고, 소개해 주신 허점분 교수님에 대한 교수님 체면도 걸린, 난제 중의 난제를 만난 셈이었다.

 

신 선생님 내외분을 찾아뵙고 상의를 드렸다. 내가 휘둘리지 않고 단호하게 대처해 나가면서,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의 지도와 도움도 받으며 마지막 골던 타임을 놓치지 않도록 부모님의 지원을 받기로 약속을 받았다. 여태까지 입주한 가정교사가 몇 사람 있었는데, 제자와의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진해서 나갔다는 이야기를 어머니께서 해 주셨다. 책임감 있게 상의도 하고, 지도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다.


나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앞둔 중3 제자를 매일 타 일렀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루고 난 바로 그날 저녁에,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약발 받는 연애편지를 써 줄 수 있으며, 이 연애편지를 받은 초등학교 동기인 중3 여학생은 백발백중 팔딱팔딱 뛰면서 그대를 졸졸 따라다니는 영원한 사랑의 포로가 될 것이라고 힘주어 약속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가 그러시던데, 가장 절친한 친구이신 허점분 교수님이 선생님을 추천하셨다면서 연애편지 쓰는데 달관해 있다는 말씀도 들었다는 것이다. 그 말씀이 정말이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그렇다. 부산교육대학에서 가장 연애도 잘 하고, 연애편지도 가장 잘 쓰는 학생이라고 소문이 나 있다. 그런 소문을 허점분 교수님도 들으시고 내 성적을 확인 한 후, 네 같이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 걱정하는 친구 아들인 자네를 잘 지도해 달라고 나를 가정교사로 추천해 주신 것이 아니겠느냐고 설득을 하였다.


내가 연애편지도 잘 쓰고, 연애를 잘 하는 데다, 공부도 잘 하여 교수님께서 추천까지 해주셔서 너를 가르치게 되었다고 몇 번이나 확인해 주는 동안에, 마치 내가 진짜 연애 대장인양 제자 앞에서 폼까지 잡게 되는 헤프닝이 일어난 것이다. 편애편지 쓰는데 달관한 선생님이란 말을, 어머니께서 직접 조용한 시간에 자기를 불러 이야기 해 주셨다는 것이다. “네 선생님 얼굴을 좀 보아라. 공부도 잘 하지만, 얼마나 연애를 잘 할 수 있는 얼굴이더냐? 부산고등학교에만 합격하면 연애편지 쓰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로 얼마든지프로 수준으로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불쌍하게도 큐피트가 쏜 사랑의 화살을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고민하는 제자였다. 어쩌면 나보다도 이성에 대한 문제 에 관한 한, 더 성숙한 제자라 다루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짐 보따리를 싸서 나간 가정교사들이 이해가 되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사랑의 근원을 고민하는 제자를 더 이상 공부라는 무거운 짐 보따리로 뒤집어 씌워 지도하기가 지난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연애편지 써 달라고 덤벼들었을 것이 분명하였다.


나는 철없는 제자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부산고등학교에 합격한 너를 위하여 괴테, 톨스토이, 헤밍웨이, 스탕달의 연애편지는 물론이려니와, 국내 유명 시인들이 그들의 첫 애인에게 써 보낸 연애편지 내용도 수집해 놓고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합격한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특히 스탕달의 연애편지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애편지라고 소개 하였다. 스탕달의 연애편지를 읽은 그의 짝사랑 여인은 그 편지를 읽는 순간 충격과 감동을 받아 격렬하게 흥분하였으며, 심한 어지러움증까지 느꼈다고 적혀있다고 부연하여 설명을 하였다. 먼 훗날 사랑하는 내 제자가 어른이 되기 전 어느 순간에, 이 가정교사가 그 당시 왜 그렇게 황당한 거짓말을 했는지, 이해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선생님, 지금 좀 그 연애편지를 읽어 볼 수는 없겠습니까?” 두 눈을 반짝이며 조르고 또 졸랐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끝날 때 까지는 하늘이 두 쪽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내가 그 때까지 그대의 연애편지를 써 주는 일은 지구가 5대륙으로 갈라지고 솟구쳐서 세상이 온통 불바다가 되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한 결심을 입과 눈과 제스추어로 못을 딱 박아 입을 막았다.


그러자 내 보고 하는 말이, 자기가 여태까지 만난 가정교사 중에서 내가 제일 뻑세고 완강한데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선생님 편만 들고, 아들인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면서,참 이상한 일이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고 구실렁거렸다.


신산부인과 의사 내외분은 나에게 참 자상하고 이해심이 많은 고마운 분들이었다. 가정교사를 하는 동안 월말에 주는 과외비 이외에도 생각지도 못한 많은 용돈을 종종 주셨으며, 공부하는 늦은 밤이면 꼭 신 선생님이 직접 만드신 간식을 갖다 주셨다. 내 제자는 부산고등학교에 겨우 턱걸이를 하여 들어갔다고 하였다.


가정교사 일이 끝나고 신 선생님 댁에서 나올 때, 신 선생님은 나에게 새 구두와 양복 한 벌을 맞추어 주셨고, 등록금에 보태라고 세 달 치 과외비를 더 얹어 주셨다. 허점분 교수님을 비롯하여 이 세상에는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과 마음이 서서히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거칠고 외로운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데, 이 일이 있고 난 후로는, 그래도 이 세상은 한 번 열심히 살아볼 만한 세상일 것 같다는 그런 긍정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고생을 하면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이 큰 소득이었다. 모두 허점분 은사님 덕분이었다. 사람은 사람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봐야만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절실히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신산부인과를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허점분 교수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은사님의 친구 되시는 신산부인과 선생님이 그 동안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하여 자상하게 말씀드리고, 교수님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교수님은 한 달이라도 가정교사 자리가 없으면 어떻게 지내겠는가? 등록금도 스스로 마련해야 힘드신 아버지를 좀 도와드리는 것이 아니겠나?” 그러시면서 메모장을 꺼내 펼쳐보시고, 교수님이 마련하신 또 다른 가정교사 자리를 소개해 주셨다.


이 번에는 서면에 있는 어느 큰 방직회사 회사 회장님 댁이었다. 지도할 대상 학생은 우리 부산교육대학교부속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이었다. 아주 똘똘하고 영리하여 공부도 잘 하는 학생인데다 초등학교 4학년이라 학업지도에도 큰 부담이 없어서 입주 가정교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조건을 다 갖춘 부잣집 가정교사 자리였다.


가정교사가 해야 할 일은, 입주를 해서 학생과 한 방에서 숙식을 하며, 숙제를 챙겨주고, 예습을 시키고, 전반적인 학생생활 태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었다. 학생의 아버지인 회사 회장님은 허점분 교수님의 친구 되시는 분의 동생이 된다고 하였다. 허점분 교수님께서 친구를 통하여 가정교사 자리를 또 다시 마련해 주신 것이다.


서구 신산부인과 의사 선생님 댁보다도 서면의 방직회사 회장님 댁이 경제적으로 훨씬 더 윤택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1963년 보통 가정에서는 흑백TV도 잘 보지 못하던 때였는데, 회장님 댁에서는 일제 칼라TV로 일본 방송을 시청취하고 있었다. 김일 레스링 선수가 출전하는 경기가 있는 시간이면, 온 가족들이 대형 컬러TV 앞에 모여앉아 박치기로 일본 선수 이노끼를 때려눕히는 김일 선수를 향해 박수를 치며 다 같이 응원을 하곤 하였다.

 

시골에 계신 내 고향 부모님의 일상생활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하늘과 땅 만큼의 큰 차이가 나는 의식주 생활을 영위하는 삶을 목격하고, 빈부 격차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가 편중된 사회구조를 목격하고 좌편향 교사가 되지 않았던 것은, 하늘만 쳐다보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시면서 한 평생 농부의 삶을 살아오신 내 부모님의 자식 사랑과 부족한 제자를 사랑으로 이끌어주신 은사님들 덕분이었다.


만약 서울대학교 출신으로 386세대의 정동영 의원이나, 서울지하철노조위원장을 지낸 정윤관 위원장(필자의 외갓집 집안 동생, 경남 고성군 회화면 치명리) 같은 천재들이 서울대학교에서 허점분 은사님과 같은 제자 사랑의 교수님을 만났더라면 좌편향의 운동권 학생들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자생한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공생(共生)을 통한 공분(共分)보다는, 있는 자의 재산을 탈취하여 착복하고 나누어 주는데 더 관심을 가진 사이비 용공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사랑의 교육이 목말랐던 과거를 갖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작금의 한국교육도 큰 걱정이다. 사회경제적 빈부 격차는 커져 가는데, 학교교육 환경이 사랑의 교육을 펼치기에는 너무나 황량한 사막 환경이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다음 세대가 거친 사회에 어떤 태도를 보이면서 적응해 나갈지 아찔한 생각이 든다. 각계각층의 학교교육에서 사랑의 교육을 펼칠 수 있는 교육환경 조성을 위한 교육혁신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고 주장하고 싶다.       

 

경남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인 회장님의 따님은 토요일 오후가 되면 김해 비행장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간다. 서울 일류 대학 교수님으로부터 바이올린 레슨을 받은 후, 일요일 오후에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다음 날 학교에 등교하는 생활을 몇 년 째 계속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직접 레슨을 받지 않으면 서울대학교 음대나 이화여대·숙명대 음악과 합격이 지난하다고 하였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 날까지도 이와 같은 현상이 마찬가지 형태로 벌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서울에 도착하면 장기간 주말에만 예약된 특급 호텔에 투숙한다고 자랑을 하였다. 금수저 부모를 만난 유복한 따님인데다 팔등신의 훤출한 키에,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새까만 말총머리에 귀밑머리 숱이 많고 길고 검었으며, 눈썹이 새까맣고 피부가 하얀데다 얼굴 모양이 달걀 모양으로 갸름하게 생긴 아주 뛰어난 미모의 아가씨였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정말 귀엽고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세월이 좀 지나 친근해 지면서 숙제 풀이나 문의사항이 있으면, 남동생의 가정교사란 명분으로 나와 남동생이 거처하는 공부방을 자주 찾아와 문제 풀이도 해 가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가기도 했다. 남동생이 방에 같이 있을 때는 문을 닫고 들어오게 했지만, 나 혼자 방에 있을 때나 숙제를 상의 하러 방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방문을 반쯤 열어놓고 들어오게 하였다.


어느 부모가 다 큰 말만한 딸이 근본도 잘 알지 못한데다, 가난해서 가정교사를 해가며 학교에 다니는 남자 대학생 방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좋아할 수 있겠는가? 잘못하면 오해를 사서 은사님이 소개해준 가정교사 자리를 물러나야 할 수도 있고, 그 보다도 은사님을 크게 실망시켜드릴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을 하면서 지냈다. 신사 에티켓을 잘 지키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하여, 소개해 주신 허점분 은사님의 제자 사랑 믿음에 누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고 다짐 하면서, 내 딴에는 애를 쓰며 지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딸이 혼자 있는 가정교사 방에 자주 드나드는 눈치를 보이자, 본채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공부방 근처를 사모님이 자주 지나다니는 인기척이 들리곤 했다. 그 때마다 번번이 방문이 반쯤 열려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하루 저녁에는 온 식구가 같이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늘 방문을 반쯤 열어놓고 딸과 같이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참 좋은 가정교사란 인상을 받았다고 이야기 하면서, 가능한 한 우리 집에 같이 오래 있으면서 아들·딸 공부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제는 늦은 가을이라 날씨가 서늘하니 앞으로는 문을 닫고 있어도 걱정을 하지 않겠다.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다. 우리 애가 아직 철이 없고 천방지축이라 늘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다. 오해가 없길 바란다.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 이렇게 올 곧은 청년을 소개해 주신 허점분 교수님이 정말 고맙다.” 이런 말을 듣고 기분이 안 좋을 가정교사가 어디 있겠는가?가정교사 점수를 많이 딴 것이 정말 기뻤다. 틀림없이 이 칭찬 말이 허점분 교수님 연구실까지 전해질 것이 뻔했다


그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려고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사모님이 봉투에 용돈을 넣어 건네주면서 얼마 안 되지만 용돈에 보태 쓰라고 주셨다. 나는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용돈이 두둑하게 생겨서 학교 가는 발걸음이 가볍고 신이 났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었다. 나는 운이 좋은 가정교사였다. 짧은 기간인 대학생활 2년 동안에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나름대로 의미 있게 대학시절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같이 다정다감하셨던 은사님의 사랑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금방 서늘한 늦가을이 가고 쌀쌀한 초겨울이 왔다.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아들 공부방이라 불을 충분히 지펴, 방 아랫목은 늘 따뜻하였고, 예쁜 색깔의 이불 거죽 천과 부드러운 솜을 넣은 이불이 아랫목에 깔려있어서 밖에서 들어와 찬 손발을 넣으면, 금방 따끈따끈 하여 기분이 좋았다. 이불을 덮고 잠시만 누워있어도 피곤이 풀렸다. 가난한 농촌 출신의 나는 은사님 덕분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방직공장 회장님 내외분은 신산부인과 신 선생님 내외분 보다는 덜 지성적이었지만, 서민적인데다 아주 소탈한 성품이었고, 인정이 더 많은 분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돈 많은 부자라고 다 인정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곤란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추운 겨울이라 방바닥에 깔린 따뜻한 이불 밑에 다리를 넣고 벽에 기대앉은 채, 책을 읽히거나 지도하는 4학년 학생의 학교 숙제를 돌봐주는 시간이 차츰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다 여고 2학년 누나가 자기 방 보다는 남동생 방이 훨씬 더 따뜻하고 깨끗해서 좋다며, 동생이 공부하는 방으로 영어교과서를 가져와 학교공부 예습을 위한 해석과 관련된 영어문법을 미리 자세하게 설명해 달라는 요구가 잦아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요구를 거절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내가 남동생만을 위한 가정교사지, 여고 2학년인 누나까지 지도하는 가정교사가 아니라고 딱 거절했을 경우, 그 아가씨가 부모님께 무슨 말을 어떻게 하여, 이 좋은 가정교사 자리를 날려 보낼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또 엉터리 영어 예습을 시켜 학교에 보내면, 그 날로 내 영어 실력이 들통이 나서, 실력 없는 가정교사라고 낙인을 찍힐 염려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약자의 서러움이란 것을 이 아름다운 여고 2학년 학생으로부터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야속한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영어 교과서 해석판을 사다가 사전에 학습준비를 해야 할 판국이었고, 내 공부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 잠자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는 형편이 되어갔다.


이불 밑에 발을 뻗고 벽에 기대앉으면 왼쪽에는 여고 2학년, 오른쪽에는 4학년 남동생이 앉아 책을 읽고 있거나, 영어 해석을 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 이 여고 2학년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를 시험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가져온 간식을 다 먹고 어머니가 방을 나가면, 이 아가씨가 내 옆으로 바싹 다가앉아 있다가 어떻게 움직이다 보면, 이불 밑에서 다리가 서로 닿는 경우가 자주 일어나는 것이었다. 20대 초반의 피가 펄펄 끓는 청년인 내가 감내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충격을 넘어선 것 이라고 생각했다.


비유하자면, 나는 2만 볼트 이상의 고압 전기에 감전 된 채, 홀로 사경을 헤매다 운이 좋아 구조를 받았으나 장기간의 요양이 필요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그 요염하고 아름다운 여고 2학년 아가씨가 나와 남동생 공부방 출입이 점점 잦아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십대 초반 피 끓는 청년이었던 내가 목석이 아닌 이상, 그 아름다운 열일곱 아가씨의 슬픈 제스추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예사스럽지 않은 눈치를 총각이었던 내가 모를 리 있었겠는가. 세상 물정에 어두워 두려움을 전연 모르는 그 여고 2학년의 예쁜 아가씨는 나에게 몇 번이나 물었다.

 

선생님의 진짜 꿈은 무엇인데 예?”

경상남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조그만 섬의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한 평생 육지로 나오지 않고, 그 섬에서 일생을 마치는 것인데, 나와 같이 그 섬에서 평생을 같이 지낼 예쁜 여자 교육 동지를 우리 대학 여자 동기 중에서 찾고 있는 중이야

 

참으로 동화 같은 아름다운 꿈이네 예! 제가 그 예쁜 교육 동지가 되어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호 호 호.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그러시던데요, 우리 학교 출신의 우수한 선배님들이 부산교대에 많이 진학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선생님 눈과 얼굴을 보면 거짓말이란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데요 뭐. 그리고 선생님은 교사 직업이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교육대학 졸업하시고, 법과대학 같은 곳에 편입학하여 다시 법학 공부를 하여, 검사나 판사를 하시는 것이 참 어울리겠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 예

아니야! 진짜 내 꿈이 아까 말한 그대로야, 자네 같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 뻔하네요

자네 꿈은 무엇인가?”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것이 저의 꿈인데 예, 서울에 왕래하면서 레슨 받기가 아주 힘듭니다

초지일관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 아니겠나. 부모님이 그렇게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 주시니 힘내서 열심히 하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야.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 유학도 갈 수 있겠구나!”


네가 부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왜 그랬던지, 얄팍한 내 자존심만이라도 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대화가 오간 후 3~4일 동안 그녀는 내 공부방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그 여고 2학년학생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 자신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 여학생이 내 옆에 앉았을 때 마다, 생전에 한 번도 맡아 본 적이 없던 그 향긋하고 싱그러운 비누 냄새를 다시 맡아보고 싶었고, 새까만 눈썹과 맑디맑은 그 눈동자가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것이 아닌가!


내 마음을 나도 통제하기 어려운 그 나이, 그 때의 내가, 무섭고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잘 못하면 은혜를 베풀어 준 회장님의 사위 자리를 훔치는 배은망덕한 도적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 날 저녁 잠자리에서 고등학교 리빙 영어 교과서에서 배운 데이비드 스완이라는 제목의 글이 생각났다. 가난하고 불행한 청년 데이비드 스완이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여행길을 떠났는데, 배가 고프고 피곤하여 길 가에 있는 큰 나무 밑 시원한 그늘에서 짧은 낮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데이비드 스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몇 차례나 찾아왔다가 그냥 지나간다.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운명적인 순간에도 그런 행운이 찾아 온 줄도 모르고, 데이비드는 낮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 터벅터벅 고달픈 여행길을 걸어간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행운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니 늘 준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그런 교훈을 일깨워 주는 교과서적인 이야기였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아름답고 무서운 이 백일몽에서 빨리 깨어나, 데디비드 스완 처럼 고달픈 여행길을 계속하는 것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시원한 나무 밑에서 너무 오랫동안 달콤한 잠을 잤던 데이비드 스완 같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님 사무실을 찾아가 회장님을 찾아뵙고, 본인 공부를 하기 위해서 가정교사를 그만두어야 할 형편이 되어 상의말씀을 드리려 왔다고 하였다. 과외비가 적어서 그만둔다는 생각을 했다면, 원하는 대로 더 줄 수 있다고 하시면서 그만두는 것을 적극 말리셨다.


장시간 진심으로 내 마음을 전한 끝에 이해를 해 주셨다. 내 손을 잡으시면서 참으로 아쉽다, 우리 내외 모두다 이 선생을 우리 가족 같이 생각하고 교사 발령을 받더라도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아이들 공부를 봐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우리 식구들과 만난 인연이 부처님의 크신 은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느냐? 부산에 교사발령을 받아 사법고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사법고시 합격을 하면 꼭 우리 가족과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떠나라고 채근을 하였다.


6개월 치 과외비를 더 보태 넣었다면서 누런 봉투를 바지 주머니에 넣어주셨다. 90도로 허리를 굽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미련도 다 떨쳐버리고 걸어 나올 수 있었던 힘은, 허점분 은사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크신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장님 댁에서 저녁을 대접 받고 짐을 챙겨 나온 날이 토요일 저녁이라, 레슨 받으러 서울에 간 그 아름다운 아가씨를 다시는 만나 볼 수 없었다.

 


2016 2 3, 춘천 이학원 배.



부산교육대학교 재경동문회 카페에서 퍼온 글이다. 강원대학교 이학원 명예교수께서 단편소설처럼 재미난 글을 올려주셨다.

어릴 적 할머니와 한 방을 썼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할머니와 함께 한 어린 시절에는 집에 방이 없어서 온 식구가 같은 방을 썼다. 새 집을 짓고 방이 늘었지만 나는 할머니와 같은 방에서 지냈다. 할머니는 말수가 적으셨고, 늘 fact만 말하셨다. 감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거나 힘겨운 인생 살아오신 이야기를 푸념하는 일은 통 없으셨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셨을까.

일본 식민통치를 받던 시절에 일본 유학을 다녀오신 신여성이셨다. 저 위의 글에는 좀 잘못 나와 있는데, 창녕의 영산은 할아버지의 고향이며 할머니 고향은 합천이다. 할머니의 큰오라버니는 이광수의 <흙>에 나오는 인물의 실제 모델이라는 얘기를 아버지에게서 들은 적 있다. 그 오라버니가 말하자면 내 할아버지의 선배 격이셨고, 그런 인연으로 일본 유학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만나셨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귀국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이와 결혼했다. 할머니의 남편, 얼굴도 뵌 적 없는 내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납북되셨고 할머니는 생과부가 되셨다. 여섯 자식을 끌어안고 얼마나 막막했을까. 할머니의 큰딸은 열 두어살 때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몇번이나 "갸가 참 이쁘고 착했다"고 하셨다. 세째 아들은 면사무소 직원이 돼서 참 좋았는데 연탄가스에 중독돼 젊은 나이에 숨졌다고 한다. 할머니는 "양복 한 벌 해달라는 것을 못 해줬는데 그만 죽어버렸다"며 뒤에 애통해하셨다. 그 시절 정말 보기 힘들었을 '여교수님'이셨고 돈 없는 제자를 안타까워하며 도와주는 분이셨지만, 할머니의 인생도 참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수 자리를 얻기 전에는 부산에서 피란살이를 하며 몹시 고달프게 사셨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 시절 그 정도 고생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고, 남들이 보기엔 부럽기만한 인텔리의 삶이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막내딸인 내 고모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래서 할머니가 미국에 다녀오셨는데, 가져오신 물건들은 어린 내게는 아주 신기했다. 연필 뒤꼭지에 끼우는 고무 지우개, 다리가 구부러지는 인형, 두꺼운 전기장판이 아닌 보들보들한 전기 담요. 여러가지 사정으로 해서 그 때 우리집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물건의 풍요를 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가져온 '미국 물건'들은 내게는 신비한 보물처럼 보였다.

더 신기한 것은 할머니가 보여주신 사진들이었다. 거대한 저택에 구경을 갔다고 하셨다. 팩트를 전달하는 우리 할머니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들어간 나이였을 내게 "이것은 신문재벌 허스트의 집이다. 방이 스물 몇 개나 된다"고 설명해주셨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서 허스트는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할머니와 아침마다 앞산 약수터에 산보를 다녔고, 할머니의 얼음사탕을 몰래 훔쳐먹었고, 할머니와 함께 잠을 잤다. 하지만 내가 할머니에 대해 아는 것은, 할머니 인생의 1000분의 1, 100만분의 1에도 못 미칠 것이다.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셨다. 할머니에 대한 글을 갑자기 만나고 보니 반갑고 눈물이 핑 돈다.


728x90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들  (1) 2016.10.23
귀여워 푸이안후이  (0) 2016.08.11
움베르토 에코가 남긴 말들  (0) 2016.02.21
마을 만들기  (0) 2015.12.17
응답하라 1988, 그리고 추억담.  (0) 2015.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