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봄 이후 튀니지 민주주의 건설에 결정적 역할을 한 대화체인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가 201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깜짝 선정됐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9일 이 기구가 “2011년 자스민 혁명 이후 튀니지에 다원적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며 “내전 직전까지 몰렸던 튀니지는 (아랍의 봄 이후) 수년만에 헌법 시스템에 기반한 정부를 구축하고 성별과 종교, 정치신념에 관계없이 모두의 기본권을 보장할 수 있게 됐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튀니지는 2011년 봄 세계를 흔든 ‘아랍의 봄’의 시발점인 ‘자스민 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한 노점상 청년의 분신으로 시작된 시위는 민주주의를 향한 전국적인 저항으로 번졌고, 지네 벤 알리 독재정권이 끝내 무너졌다. 혁명은 이웃한 이집트와 리비아, 뒤이어 시리아로도 전파됐다. 그러나 이집트에서는 이슬람 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이 집권한 뒤 2013년 7월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군 장성 출신이 다시 집권했다. 리비아에서는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시작됐으나 석유 이권 등을 둘러싸고 동부와 서부가 갈려 내전에 가까운 분쟁이 벌어졌으며, 지금도 2개의 정부가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다. 시리아에서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로 시작된 반정부 투쟁이 내전으로 비화돼 참상이 이어지고 있다.
반면 튀니지는 곡절은 있지만 차근차근 민주화 이행절차를 밟아가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총선을 치렀고, 12월에는 역사상 첫 자유경선으로 대선이 실시됐다. 이 대선에서 베지 카이드 에셉시(89)가 당선돼 벤 알리 축출 후 4년만에 첫 민선 대통령이 됐다. 에셉시는 옛 독재정권 시절의 정치인이기는 하지만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튀니지가 ‘아랍의 봄’의 유일한 승자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권력의 공백을 틈타 이슬람주의가 득세한 다른 지역들과 달리 국민들이 세속주의를 선택했다는 것도 뚜렷한 특징이다.
올해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대화기구’는 노동단체들이 중심이 돼 2013년 만들어진 국민 협의체다. 이 기구는 튀니지노동연맹(UGTT), 튀니지산업·무역·수공업연합(UTICA), 튀니지인권연맹(LTDH), 튀니지변호사협회(ONAT) 등 4개 조직이 연합해 결성했다. 노벨위원회는 특정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이 아닌 ‘아랍의 봄’ 4년만에 정권교체를 일궈낸 국민들에게 상을 준 셈이다. 특히 이슬람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의 대립, 이슬람 진영들 간의 싸움, 무장세력의 할거로 분란이 가시지 않는 중동-북아프리카에서 국민이 주도하는 대화와 타협의 기구가 민주주의에 이바지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노벨위원회는 “국민4자대화기구는 정치적 암살과 광범위한 사회적 소요로 민주화 절차가 위기에 몰려있던 2013년 여름에 결성돼 다원적인 민주주의를 세우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국가가 내전의 위기에 놓였을 때 평화적이고 대안적인 정치 과정을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또 아랍의 봄이 퍼졌던 여러 나라에서 민주주의와 기본권을 위한 싸움이 여전히 정체 상태에 있거나 후퇴됐다는 점을 들면서 “튀니지는 기본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요구에 맞춰 활발한 시민사회에 기반을 둔 민주적인 이행 과정을 보여줬다”고 치하했다.
2011년 자스민 혁명 이후로 줄곧 노벨평화상이 중동-북아프리카 민주화를 이끈 인물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으나, 노벨위원회는 라이베리아 여성인권에 기여한 인물들이나 유럽연합, 화학무기금지기구같은 기구들에 상을 줬다. 지난해에는 파키스탄 여성교육운동가인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역대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 평화상의 유력 후보로 아랍의 봄과 관련된 기구·인물들은 별로 거론되지도 않았다. 노벨상 수상자들을 맞추는 베팅사이트들과 외신들은 프란치스코 교황, 유엔난민기구(UNHCR)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이란 핵협상을 이뤄낸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 등을 유력 후보로 거론했었다. 그러나 노벨위원회는 이번 선정으로 결국 4년 만에 ‘아랍의 봄’에 영예를 안긴 셈이 됐다.
■ 2000년 이후 노벨평화상 수상자
2014년: 말랄라 유사프자이(파키스탄), 카일라시 사티야티(인도)
2013년: 화학무기금지기구(OPCW)
2012년: 유럽연합(EU)
2011년: 엘런 존슨-설리프, 리머 보위(이상 라이베리아), 타우왁쿨 카르만(예멘)
2010년: 류샤오보(중국)
2009년: 버락 오바마(미국)
2008년: 마르티 아티사리(핀란드)
2007년: 유엔 기후변화 정부간 협의체(IPCC), 앨 고어(미국)
2006년: 그라민은행, 무하마드 유누스(방글라데시)
2005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모하마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
2004년: 왕가리 마타이(케냐)
2003년: 시린 에바디(이란)
2002년: 지미 카터(미국)
2001년: 유엔, 코피 아난 사무총장
2000년: 김대중(한국)
세계가 ‘깜짝’, 메르켈은 ‘쿨’
2011년 자스민 혁명 이후 뒤 노벨평화상이 중동-북아프리카 민주화를 이끈 인물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으나, 노벨위원회는 그해 라이베리아와 시리아의 여성인권에 기여한 인물들에게 상을 줬다. 그후 줄곧 노벨상은 아랍 민주화운동가들을 빗겨갔고, 올해에는 중동 민주화와 관련된 기구·인물들은 별로 거론되지도 않았다. 노벨위원회의 이번 ‘깜짝 발표’는 세계를 놀라게 했며, 곳곳에서 예상을 뒤엎은 결과에 놀라움과 축하의 반응이 쏟아졌다.
유엔은 트위터에 “민주주주의에 기여한 국민4자대화기구에 축하를 보낸다”는 글을 올렸다. 페데리코 모게리니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도 “이번 결정은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의 위기에 대한 해법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통합과 민주주의”라고 평했다.
올해 평화상 후보는 개인 205명, 기구·단체 68개였다. 당초 수상자들을 맞추는 베팅사이트들은 유엔난민기구(UNHCR)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프란치스코 교황, 이란 핵협상을 이뤄낸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 등을 유력 후보로 꼽았다. 메르켈의 경우 난민 문제에서 포용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게 주된 평이었으나, 실제 수상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난민 문제야말로 ‘현재 진행형’인데다 후보추천이 대개 그 해 2월에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그리스 채무위기에 대한 강경자세로 비난을 받았다는 점도 지적됐다.
메르켈 스스로도 후보로 거론되는 것에 대해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난 7일(현지시간) 독일 방송 인터뷰에서 평화상 가능성에 대해 “다른 할 일이 많다”고만 밝혔다. 9일 결과가 발표된 뒤 슈테펜 자이버트 총리대변인은 이번 선정은 “탁월한 결정”이라고 논평했다고 DPA통신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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