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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속의 첼리스트 카림 와스피, 그리고 '전쟁 속의 예술'

딸기21 2015. 5. 9.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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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불이 났는지 검게 그을려 있다. 무언가를 막 치운 듯 길 복판에 쓰레기 더미가 그대로 놓여 있다. 울퉁불퉁한 도로 가운데 첼로 박스가 보이고,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첼로를 연주한다. 기괴한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선율. 이제 막 테러가 휩쓸고 지나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풍경이다. 번화한 만수르 거리에서 지난달 말 폭탄테러가 일어났다. 10명이 목숨을 잃었고 27명이 다쳤다. 그 곳에서 남자는 첼로를 켠다.


거리로 나온 마에스트로

 

카림 와스피는 43세의 첼리스트다. 이라크국립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이라크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다. 20대에 미국으로 유학해 인디애나주립대학에서 헝가리 출신 첼리스트 야노스 슈타커를 사사했다. 보스턴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정치학도 출신이기도 하다. 


이라크국립교향악단의 지휘자 카림 와스피가 지난달 28일 바그다드 시내 만수르 거리에서 첼로를 연주하고 있다. 폭탄테러로 수십명이 죽거나 다친 이 곳에서, 와스피는 이날 하루 거리의 예술가가 되어 주민들을 위로했다. 사진 알자지라방송 웹사이트(www.aljazeera.com)


미국에 남아 음악가의 길을 걸었어도 됐을 그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뒤 2004년 바그다드로 돌아갔다. 미군이 ‘서지(Surge)’ 작전으로 대규모 파병을 했던 2008년 초에 그는 국립교향악단 지휘자를 맡았다. 


단원 상당수가 전란에 휩싸인 바그다드를 떠났거나 생업을 찾아 나간 바람에 70명의 오케스트라는 50명으로 줄어 있었다. 여전히 시내 곳곳에서 테러와 폭력사태가 벌어지고 있었고, 전기는 수시로 끊겼다. 재정은 모자랐고 악단 월급은 턱없이 적었다. 사무실과 연습장 시설은 형편없었다. 음향시스템은 망가졌고 악보들마저 도둑맞았다. 


그 곳에서 그는 레퍼토리를 만들고 단원들과 연습을 했다. 그 열악한 형편 속에서도 전국을 돌며 콘서트를 열었다. 3년만에 단원 수는 90명으로 늘어났다. 바그너와 그리그와 브람스를 연주했다. 포연과 테러가 계속되는 이라크에서 그는 국민들에게 ‘일상’을 되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라크국립교향악단을 이끌고 연주하는 카림 와스피의 모습. 사진 알자지라방송 웹사이트(www.aljazeera.com)


그가 거리로 나온 것은 지난달 28일이다. 폭탄테러가 일어난 곳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주민들의 이목을 끌었다. 음악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은 연주자가 다름아닌 마에스트로 와스피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 놀랐다. 행인들이 동영상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잇달아 올렸다. 


알자지라 방송이 이튿날 그를 인터뷰했다. 와스피는 이날의 공연에 대해 테러라는 ‘파괴’에 맞서 ‘삶의 창조’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라 설명했다. “지금의 이라크 상황을 불가피한 것이라며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다. 아니, 그 반대로 나는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는 이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일상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한다. 희망과 인내, 헌신, 그리고 삶의 동력을 보전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자극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부서진 거리에서 그의 음악을 듣던 군인들은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이 입을 맞추고 박수를 쳤다. 살아있다는 것,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느꼈고, 감사하고 존중하는 마음들을 서로 표현했다.” 


그날 밤 사람들은 테러 현장에 촛불과 꽃을 들고 나와 하나가 됐고, 와스피는 다시 한 차례 연주를 했다고 한다. 전쟁이 모든 것을 부수고 폭력이 휩쓸었으나 실상 이라크는 중동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교육수준이 높은 나라 중 한 곳이었다. 비록 연주만으로 폭탄에 맞설 수는 없을지라도, 그는 음악을 통해 사람들이 가진 본연의 힘을 일깨우고 싶었다고 했다. 


미사일에 그림을, 포탄에는 꽃을

 

와스피가 거리로 나오기 20여년 전, 1992년 내전이 시작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에 베드란 스마일로비치가 있었다. 5월 어느 날 세르비아계의 포탄이 빵집 주변에 떨어졌다. 빵을 사러 줄 섰던 주민 22명이 숨졌다. 사라예보현악4중주단에 소속된 첼리스트였던 스마일로비치는 포격 다음날 처참하게 변한 현장을 찾았다. 


1992년 5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의 폭격 현장에서 연주하는 첼리스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사진 sarajevo.co.ba


부서진 건물 터에 앉은 그가 가방을 여는 순간, 사방의 저격수들이 총구를 들이댔다. 가방에서 나온 것은 첼로였다.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가 흐르기 시작하자 저격수들은 총을 내렸다. 두려움에 질려 집 안으로 숨었던 사람들은 조금씩 커텐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그의 연주는 숨진 이들을 기리기 위해 22일 동안 계속됐다. 세계적인 음악가 요요마가 이 연주를 녹음해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라는 음반으로 만들었으며, 같은 제목의 소설로도 출간됐다.


전쟁과 테러는 사람들의 일상을 부순다.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힘들 것이라는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예술은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당장 먹을 것조차 모자라는 이들에게 예술은 사치가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와스피는 “밥과 물뿐 아니라 음악과 문화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폭력과 야만에 맞서 문명과 인간됨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문명성은 사람들이 누리고 달성해야 하는 것이다. 예술 특히 음악은 그런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도구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부레이지 난민촌에 사는 모하메드 알자마르(34)의 집 마당엔 알록달록 그림이 그려진 공예품들이 가득하다. 지난해 여름 이스라엘은 50여일 동안 손바닥만한 가자지구를 맹공격해 2200명 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알자마르의 집도 폭격을 받아 부서졌다. 그는 집을 고치면서 새로운 예술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포탄 껍데기와 미사일 잔해에 무늬를 넣어 꽃병이나 화분을 만든다. 


난민촌에서 나고 자란 아티스트에게 전쟁은 늘 곁에 있고 죽음은 일상이다. “우리는 삶을 사랑하지만 점령자(이스라엘)들은 우리에게 죽음과 파괴를 드리운다. 나는 이스라엘의 전쟁을, 팔레스타인의 꺾을 수 없는 삶의 의지로 변화시키고 싶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보여주며 AFP통신에 “이것이 나의 메시지”라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예술가 모하메드 알자마르가 지난해 9월 집 마당에 걸어놓은 ‘미사일 꽃병’ 뒤에 서 있다. 알자마르는 자기 집을 부순 이스라엘군의 미사일과 포탄 잔해에 그림을 그려 작품으로 되살리는 일을 한다. 가자지구/AFP연합뉴스


자발리야 난민촌의 호삼 알다부스(34)도 비슷한 작업을 한다. 그는 원래 양봉을 했지만 지난해 전쟁 뒤 알자마르와 마찬가지로 미사일·포탄 공예 전문가가 됐다. 주민들은 “저들이 우리를 죽이기 위해 만든 도구에 우리는 꽃을 심는다”며 그가 만든 포탄 화분을 사간다.


2009년초 이스라엘의 침공 뒤에도 가자지구 사람들은 전쟁의 흔적을 그림으로 남겼다. 미사일과 화학무기가 휩쓸고 간 폐허를 화폭 삼아, 팔레스타인인들의 눈물을 그림으로 그렸다. 쿠파체, 디완체, 나크시체 등 아랍어의 여러 서체들로 표현한 그래피티에서부터 이스라엘군에 살해된 이들을 추모하는 벽화까지, 다양한 그림들이 벽을 뒤덮었다.


그래피티를 통한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1980년대 1차 인티파다(반이스라엘 봉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인터넷도, 통신수단도 없던 시절 벽화를 통해 의사표현을 시작했다. 2000년 2차 인티파다와 2009년의 침공, 그리고 2014년의 침공을 거치면서 가자지구의 예술은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시와 노래를 그리는 아이들

 

가자의 벽화는 최근 다시 세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얼굴 없는 거리예술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뱅크시가 잇달아 그림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가자의 베이트하눈에 사는 아부 샤디 셴바리의 가족은 이스라엘 공격으로 집을 잃었다. 폐허가 된 집 벽에 어느날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나마 선 채로 남아 있는 화장실 벽에 그려진 3m 높이의 고양이 그림이다. 지난 2월 가자지구에 다녀간 영국 그래피티 예술가 뱅크시의 작품이다. 뱅크시는 가자지구에서 모두 3점의 그림을 남겼다. 그 중 하나는 울고 있는 그리스 여신의 모습이다. 이 그림은 라비에 다르두나라는 사람의 부서진 집 쇠문짝에 그려져 있었다. 




이 쇠문짝 그림은 세계의 언론에 소개됐다. 뱅크시의 이름도 몰랐던 다르두나가 벨랄 할레드(24)에게 헐값에 문짝을 넘긴 것이다. 뱅크시의 작품은 수천달러를 호가하지만 할레드는 고작 700셰켈(약 20만원)에 문짝을 사들였다. 이 사실이 알려져 비난이 일자 가자 자치정부를 이끄는 하마스 당국은 할레드에게서 문짝을 압수해버렸다. 


하지만 할레드 역시 가자의 슬픔을 알리는 현지 예술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할레드와 부슈라 샤난(25) 등 가자의 예술가들은 지난해 이스라엘 침공 때 미사일이 떨어지면서 치솟는 검은 구름 사진을 포토샵으로 재구성한 독특한 사진작품들을 만들어내 유명해졌다.


팔레스타인 예술가 부슈라 샤난이 지난해 8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때 찍힌 사진을 합성해 만든 작품. 사진 인터넷 캡처



요르단 북부는 시리아 난민 수십만명이 밀려들면서 최근 몇년 새 세계에서 가장 큰 난민촌이 돼버렸다. 12살 소녀 이브티하지는 난민촌에서 그림을 그린다. 시리아 서부 도시 홈스에서 태어나 자란 이브티하지는 2011년 내전의 포화를 피해 국경을 넘어 난민촌으로 왔다. 이브티하지의 꿈은 화가가 되는 것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집을 잃고 고향을 떠나 마음을 다친 아이들을 위해 유럽의 화가들을 불러 미술을 가르치곤 한다. 이브티하지를 비롯한 난민촌의 어린 화가들은 커다란 천막을 캔버스로 삼아 그림을 그린다. 


아이들이 주로 그리는 것은 두고 온 집이지만, 때로는 상상 못했던 멋진 작품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브티하지를 비롯한 난민촌 아이들은 시리아의 국민시인 격인 니자르 카바니의 시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역설적이지만 카바니는 전쟁과 억압이 어떻게 삶과 예술을 무너뜨리는지 노래했던 시인이다. 그는 ‘그림에서 얻는 교훈’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에는/숲 속의 나무들도 시민군이 되고/장미도 방탄복을 입는단다/무장한 밀의 시대엔/새들도 무장을 하고/문화도 무장을 하고/종교도 무장을 한단다.” 


그러나 그의 시를 그림으로 담는 아이들에게 미술은 ‘평범한 나날들’로 돌아가는 길이자, 상처받은 내면을 표현하고 치유하는 방법이다. 유엔난민기구는 다음달 20일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스위스 제네바에 아이들의 천막 그림을 전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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