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황제 표트르3세는 1762년 1월에 즉위했지만 차르 자리에 앉아있었던 기간은 반년에 그쳤다. 황태자 시절부터 종교의 자유를 법으로 보장하는 것을 비롯해 서유럽식 자유화를 추진하고 싶어했던 그는 짧은 재위 기간에 220개가 넘는 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권력이 줄어드는 것에 반발한 근위병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6개월만에 폐위시켰고, 며칠 뒤 쫓겨난 차르는 암살당했다. 살인범의 정체는 미궁에 빠졌으나 후대 학자들은 표트르3세의 황후였고 뒤이어 즉위한 예카테리나 여제 쪽의 짓으로 본다.
표트르3세의 죽음 이후 250여년이 지난 또다시 ‘암살’이 러시아를 들쑤시고 있다. 제1부총리까지 지냈으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맞서며 야권 지도자로 변신했던 보리스 넴초프가 지난달 27일 피살됐고, 그 여파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
크렘린 바로 옆 사건, 범인은커녕 단서도 못찾아
푸틴 대통령은 내무부와 연방치안국(FSB)에 이 사건을 조사할 위원회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과거 벌어진 여러 암살사건의 조사를 맡은 경력이 있는 군 장성 출신의 이고르 크라스노프가 조사위원장을 맡아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데, 옛소련 시절 막강한 정보력을 자랑했던 KGB의 후신인 FSB도 아직 이렇다할 단서를 건진 게 없어 보인다.
표트르3세... 부인 예카테리나의 사주에 의해 쫓겨나고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안타깝게도 아들 또한 암살당하는... /WIKIPEDIA
인테르팍스 등은 크렘린이 지명한 조사관들이 이 사건을 ‘국가의 안정을 흔들려는 선동’이라 보고 있다고 전했다. 잔혹하게 분리주의자들을 고문·살해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체첸자치공화국의 람잔 카디로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에 “넴초프 살인은 서방 정보기구 소행”이라는 주장을 올리며 선두에서 음모론을 유포하고 있다.
아직도 수사는 안갯속이지만 러시아에서 최고위층 혹은 정적의 암살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2010년 괴한들에게 린치를 당한 적 있는 저널리스트 올레그 카신은 “누가 적을 죽이면, 피해자 쪽과 관련된 음모론이 나오는 것이 집단적 관행처럼 돼버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소련 시절 줄었던 암살, 푸틴 치하에서 늘어나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특히 암살이 횡행했다. 표트르3세뿐 아니라 그의 아들 파벨1세도 즉위 4년만에 살해됐다. 역시 개혁파였던 알렉산드르2세도 수차례 암살기도를 모면했으나 1881년 결국 피살됐다. 20세기 들어서도 모스크바의 로마노프 대공 등이 암살됐다. 차르와 차르 일가는 늘 암살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소련 시절에는 대규모 정치적 숙청이 반복되면서 정적 암살은 거의 사라졌다. 1948년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경찰관이 유대계 지도자를 살해한 적 있고 1969년 브레즈네프 암살 기도가 적발된 것이 거의 전부다. 하지만 소련이 무너진 뒤 암살을 이용한 공포정치가 부활했다.
차르 시절의 암살이 권력의 핵심부를 겨냥한 것이었던 반면, 1990년대 이후의 암살은 반체제 인사들이나 비판자들에게 재갈을 물리기 위한 행위라는 게 큰 차이다. 이런 살인의 대상은 정치인, 언론인, 인권변호사, 전직 스파이 등을 가리지 않는다. 이고르 탈코프라는 가수는 반소련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91년 살해됐다. 반러시아 게릴라 출신으로 뒤에 체첸자치공화국 대통령이 됐던 조하르 두다예프는 1996년 러시아 군인에게 사살됐다.
너무 무서워... 생각이 다르다고 죽이면 어떡해
2000년 푸틴 집권 이후에는 반체제 정치인이나 비판적인 언론인의 희생이 유독 늘었다. 체첸과 남오세티야, 다게스탄 등 러시아 중부 자치공화국의 분리주의 정치인 여러 명이 살해됐다. 푸틴에게 맹종하는 카디로프 현 체첸대통령의 아버지 아흐마디 카디로프는 반대로 2004년 분리주의 세력에게 암살당했다. 서구식 민주주의와 인권, 시장경제를 주창해온 정치인 세르게이 유셴코프는 2003년 12월 총선 때 후보등록을 하자마자 피살됐다.
아나톨리 트로피모프 FSB 부국장은 모스크바 시내에서 부인과 함께 총에 맞아 숨졌다. 영국으로 망명한 전직 FSB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는 트로피모프가 푸틴의 체첸 공격에 반대했다가 살해된 것이라 주장했는데, 리트비넨코 역시 2006년 독살당했다. 앞서 2002년에는 정보당국의 반대세력 암살작전들을 다룬 <러시아의 암살>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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