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공감] 분노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

딸기21 2014. 5. 21. 10:19
728x90

어제는 오랜만에 MBC <무한도전> 재방송을 보며 웃었다. 유재석의 사생활을 모두 까발리겠다는 노홍철의 ‘똘끼충만’ 공약을 보며 중학생 딸아이와 깔깔거렸다. 한 달 만에야 TV 예능프로그램 앞에 앉은 건 세월호 때문이다. 나는 TV 시청자이자 시민이고 엄마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지난 한 달은 우울함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그동안 보이고 들리는 소식은 온통 슬펐다. 눈물과 분노를 자아냈다. 미디어가 중개하는 것들은 대개 슬프고 화나는 소식이다. 그게 저널리즘의 본질이다. 아름다운 소식, 권장할 만한 내용을 전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주를 이룬다면 ‘계도’이지 저널리즘이 아니다. 미디어가 전하는 소식들에 불편해하고, 마음 상하는 것. 그것이 연대의 출발점이며 이를 끄집어내는 게 저널리즘의 의무다.



세월호에서 죽어간 아이들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도망칠 곳이 없다. 아무리 <무한도전>을 보고 웃어도 가슴 한쪽이 서늘하다. 이 사건이 모른 척 해왔던 우리 사회의 민낯을 비춰주었기에, 이 재난이야말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일상이기에. 대체 이 사회에서 아이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이제 이것은 가치관이나 도덕률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가라앉는 배에서 이준석 선장처럼 행동하라고 할 것인가, 박지영 승무원처럼 하라고 할 것인가. 슬프고 두렵고 화가 나지만 “박지영 승무원처럼 행동하라”고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만이 우리 모두가 세월호의 탑승자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게 공감과 연대를 생각하고 용기를 내려 해본다. ‘여기가 로도스’라고.

 

한데 분노가 남는다. 이 분노는 왜 사그라질 기미가 없는 걸까. 이 재앙에 이토록 몰입하며 괴로워하는 내 마음속을 들여다본다. 이곳에서 아이를 키우는 40대 엄마라서? 마지막 순간의 동영상 속 “엄마 무서워”하는 여자아이의 음성이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돈다. 엄마들의 분노는 분명 다른 이들의 것과는 감도가 다를 터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다. 분노의 이유를 곱씹어 본다. 단죄가 없기 때문이다. 이 단죄는 화풀이를 위한 게 아니라 모두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단죄가 없는 한 우리는 불안하다. 재난이 언제고 나와 내 아이를 죽일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단죄가 곧 개혁이고 우리의 생존율을 높여주는 보장이다.

 

‘이것이 나라냐’고 외치고 싶지는 않다. 이런 국가, 이런 정부를 만든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아이들 앞에 자책하고 미안해한다. 이런 마음을 비집고 보수언론들은 “모두 함께 잘하자”는 기사들을 내보낸다. 하지만 다같이 속죄하자는 건 어이없는 수작이다. 단죄는 최종적으로 누구를 향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근혜는 물러나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 스스로 단죄의 대상이며, 모든 문제의 근원이자 결과물임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도 규제를 완화하고 이 사회를 돈 중심으로 몰아갔지만 그는 우리 사회의 천박한 욕망의 아이콘일 뿐이었다. 박근혜는 그걸 넘어 이 재난을 일으킨 구조 자체와 동일시되는 인물이다. 박근혜가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 체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주군’을 지키겠다고 나선 자들은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 이 재앙을 일으킨 사회구조의 육화된 존재가 박근혜라는 걸, 그를 지키는 것이 기득권 구조를 지키는 일이라는 걸.

 

몇주 동안 어떤 이들은 피눈물을 흘렸지만 쥐어짜낸 눈물로 ‘무슨무슨 즙’ ‘무슨무슨 액’ 소리를 들은 사람도 있다. 거짓눈물은 역겹다. 박근혜가 단죄를 한다고 한다. 해체와 정상화를 말한다. 유체이탈이라는 농담조차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가 구름 위의 올마이티 자리에서 내려오길 바란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