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해함대.... 이름이 참 멋지다. 바다 이름 자체가 멋진 것이지 함대의 이름이 멋진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러시아의 흑해함대는 ‘전함 포템킨’으로 훗날 더 유명해진 그리고리 포템킨 대공이 1783년 만들었다. 흑해와 지중해를 넘나드는 이 함대는 19세기 러시아제국과 오토만제국의 싸움에서 주력부대 역할을 했다. 20세기에는 서방과 대치하는 옛소련 해군의 기둥이었다. 이 함대의 사령부는 창설 이래로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에 있다. 하지만 1991년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와 함께 떨어져나감으로써, 흑해함대는 러시아군의 주력 부대임에도 사령부를 외국에 두고 기지를 빌려 쓰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며칠 새 상황이 달라졌다. 세바스토폴이 다시 러시아 군사기지가 되고, 크림반도가 러시아 땅이 되는 게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떠오른 것이다.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귀속되면'이라는 걸 상상해야 하는 상황.
출처: Financial Times
우크라이나 친유럽 시위가 크림반도 귀속 문제로 변질된 뒤 크림반도를 둘러싼 상황은 LTE급으로 돌아가고 있다. 지난달 27일 친러시아계 새 총리와 내각을 뽑은 크림자치공화국 의회는 급기야 오는 16일 크림반도의 ‘지위’를 물을 주민투표를 하기로 결정했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서방은 일제히 크림자치정부 뒤에 숨은 ‘러시아의 공작’을 규탄하며 대러시아 제재를 운운하고 있지만, 상황이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다. 크림 자치정부와 러시아는 점점 더 밀착해가고 있다. 리아노보스티통신은 러시아 의회가 7일 크림 자치의회의 주민투표 결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외교부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요인” 때문에 크림반도 주민투표에 참관단을 보낼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서방의 개입으로 투표가 방해받을 수 있으니 러시아가 감시를 하겠다는 것이다. 크림 자치의회 대표단은 이날 모스크바를 방문해 주민투표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지아(그루지야)의 데자뷔를 얘기하는 이들이 많다. 사실 러시아는 전에도 몇번이나 우크라이나가 서방 쪽으로 향할 때마다 가스공급을 줄이는 식의 방법으로 ‘응징’을 했다. 2008년 조지아에 친서방 정권이 들어서 미국과의 군사협력을 강화하자, 조지아를 공격해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아 두 지역을 다시 러시아 영향권으로 끌어왔다. 분리움직임을 보이는 러시아 내 체첸자치공화국에서는 반군을 절멸시키다시피 하고 친크렘린 강경파 정권을 세웠다.
하지만 이번 크림반도 사태는 이전과는 다르다.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귀속되면 지정학적 파장이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정권 시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스티븐 해들리 등은 지난 4일자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 “푸틴이 크림반도를 장악한 것은 더 큰 전략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몇차례의 친서방 정권 손봐주기 속에서도 옛소련권의 이탈이 가속되자 푸틴이 전략적 이해관계 속에 작심하고 크림반도라는 약한 고리를 치러 나섰다는 것이다.
푸틴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장기적인 러시아의 득실을 떠나, 그가 불러오는 '공포효과'만큼은 확실한 듯. 크림반도를 군사적으로 장악함으로써 서방은 냉전 종식 이후 잊고 있던 ‘러시아의 위협’을 새로이 느끼게 됐다. 푸틴은 러시아 군대가 유럽의 복판으로 언제든 들어올 수 있음을 서방에 알렸다.
흑해는 러시아와 터키, 우크라이나, 조지아 등으로 둘러싸여 있고 지중해와 이어진다. 흑해에 군사기지를 둔다는 것은 동유럽은 물론이고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중동지역도 염두에 둘수 있다는 뜻이다. 러시아는 2010년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부와 협정을 맺어 세바스토폴 군사기지를 2042년까지 임대하기로 했지만, 자기네 땅이 아닌 까닭에 병력이동이나 훈련 등에서 제한이 있었다. 러시아군이 크림반도의 군사기지를 영구적으로 자유롭게 쓸수 있게 된다는 것은 “흑해 주변국들의 지역안보가 러시아에 종속된다는 뜻”이라고 파이낸셜타임스는 풀이했다.
크림반도 군사기지는 러시아의 지중해 전략과도 이어져 있다. 러시아는 지중해에서 시리아의 타르투스항구를 빌려 군항으로 써왔다. 하지만 시리아 정부가 내전으로 무력화되면서 타르투스 항구를 더이상 사용할수 없게 됐고, 이 때문에 흑해함대의 기지들이 더 중요해졌다는 분석도 있다. 크림반도 주변 해안 천연가스개발도 큰 이권이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탈리아 ENI를 비롯한 유럽 기업들과 천연가스전 개발협정을 맺었는데, 행여 크림반도가 러시아로 귀속되면 큰 손실을 입는다.
러시아군이 사실상 크림반도를 장악한 상태에서 주민투표가 실시되면 러시아 귀속을 외치는 이들이 승리할 것은 불보듯 뻔하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와 서방은 투표 계획 자체를 비난하고 있으나, 크림 자치의회가 투표를 밀어붙이면 막을 방법은 많지 않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등은 “우크라이나 전체와 크림반도에서 실시되는 모든 투표에 국제감시단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알수 없다.
러시아가 크림반도 문제를 어디까지 끌고갈지는 분명치 않다. 조지아 공격 때에도 친러시아 지역을 조지아 정부의 통제 밑에서 빼왔을 뿐, 직접 병합하지는 않았다. 해들리는 “크림반도에서 강수를 둠으로써 러시아는 최소한 서방 국제기구들의 동진을 억제하는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크리미아(크림) 반도 위기' 진행과정을 한눈에 보려면 여기로
푸틴의 압력이 아니더라도, 크림반도 내에서는 러시아로의 귀속을 바라는 이들의 목소리가 큰 것 같다. 크림반도의 친러시아 활동가 올가 티모페예바는 파이낸셜타임스에 “러시아 땅이 되지 않는 한 우리 러시아계는 실향민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크림반도 주민 78%가 2010년 대선에서 친러시아계 야누코비치를 지지했고, 이들은 친서방파에 의한 야누코비치 실각에 극도의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는데....
어느 땅에서건 거기 사는 사람들이 자기네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 땅의 단위가 '국가'인지 '자치공화국'인지 '동네'인지, 주민들의 결정이 민주적으로 투명하게 이뤄지는 지가 문제다. 국가가 무조건 우선순위라는 시각에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으며, 옛소련권이 갈갈이 찢길 때 좋아라 하다가 이제와서 "우크라이나의 국가적 통일성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서방'의 주장에도 당연히 동의하지 않는다. 세계는 우크라이나 편들어주는 척 말고, 크림반도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푸틴의 지정학적 야욕;; 따위와는 별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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