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버려진, 남겨진, 잊혀진

이집트 카이로 모카탐의 ‘쓰레기 마을’ 사람들이 사는 법

딸기21 2014. 3. 2.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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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초입부터 여느 마을과는 달랐다. 먼지가 눈앞을 가리고, 쉴새 없이 차들이 골목으로 밀려들었다. 커다란 덤프트럭, 작은 트럭, 봉고차를 개조한 것 같은 짐차, 말이나 당나귀가 끄는 수레, 사람이 밀고 끄는 손수레까지. 이 온갖 탈것들에 실린 짐은 모두 똑같다. 쓰레기다. 시내 전역에서 모아온 쓰레기가 담긴 거대한 자루가 끊임없이 골목으로 실려온다. 

 

이집트 카이로 남동부의 모카탐 언덕 부근에는 아유브 왕조 시대의 요새가 서 있다 ‘시타델(성채)’이라 불리는 이곳은 기자의 피라미드와 함께 카이로 안팎의 대표적인 유적지다. 역사지구인 시타델 안에 들어서면 12세기 성곽에서부터 18~19세기에 단장된 모스크들까지, 아름다운 유적들이 관광객을 맞는다. 지금은 정정불안과 테러 때문에 이집트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거의 끊겼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방문자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시타델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는 좀 더 특별한 마을이 있다. ‘모카탐의 쓰레기 마을’이라 불리는 곳이다. 모카탐은 아랍어로 ‘잘려나갔다’는 뜻이다. 산이 잘려나간 기슭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행정구역 이름은 ‘만시야트 나세르’이지만 모두가 이곳을 쓰레기 마을이라 부른다. 카이로의 생활쓰레기 3분의 1 정도가 이곳으로 옮겨져 해체되고, 분리되고, 재활용되거나 태워진다.




가난 대물림에 온갖 질병 시달려

 

지난달 11일 모카탐을 찾았다. 벽에 시멘트를 바르지 않아 짓다만 듯 보이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쓰레기 자루를 실은 차들이 줄을 이어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동네 입구 빈터에는 흰 가루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쓰레기를 태우고 또 태워, 흰 재가 쌓여 석회암 지대처럼 보였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은 차량 두 대가 엇갈려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이다. 그 양 옆으로 2층, 3층짜리 집들이 늘어서 있다. 이곳 집들은 대부분 1층이 창고처럼 비어 있고, 그 위쪽에 주민들이 산다. 차들이 쓰레기를 실어오면 창고에 가져다 놓고 해체를 한다. 건물들 사이사이엔 더 좁다란 골목이 있다. 안으로 들어설수록 쓰레기에서 나오는 냄새가 점점 심해졌다. 


이런 작은 골목 안쪽에서 주민들이 부지런히 쓰레기를 풀어헤쳐 플라스틱류와 옷가지, 비닐 등을 분리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분리를 맡고, 남성들은 분리해 다시 묶은 쓰레기 더미를 나른다. 이곳 사람들은 대개 가족단위로 일하며, 몇 대에 걸쳐 가업처럼 이 일을 해오고 있다. 이렇게 해서 버는 돈은 한달에 500파운드, 우리 돈으로 7만5000원 정도다. 플라스틱 통을 쌓아놓고 있던 젊은 여성은 “여자들은 그 정도 벌지만 남자들은 그보다는 좀 더 번다”고 귀띔했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쓰레기 양은 하루 4200t 정도로 추산된다. 그 가운데 재활용되는 것이 80%에 이른다. 이곳 주민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카이로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다. ‘자발리엔(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이라는 말로 통칭되는 이 마을 주민들은 카이로 전역의 쓰레기를 모아 먹고 산다. 이곳 안에서도 빈부격차는 있다. 트럭이 있으면 쓰레기 수거를 해서 고정 소득을 얻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재활용품 분리로 돈을 번다.

 

쓰레기 마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부터로 알려져 있다. 전국에서 모여든 빈민들이 이곳에 정착을 해 돼지나 염소 따위를 키우기 시작했고, 1940년대에 이집트 남부에서 다시 빈민들의 물결이 밀려들면서 규모가 커졌다. 1970년대에는 기자에 살던 주민들이 재개발로 밀려나 이리로 옮겨왔다. 이런 이주 행렬들을 거치면서, 지금은 4만명 이상이 사는 큰 마을이 됐다. 


주거환경은 말할 수 없이 열악하다. 상하수도는 제대로 깔려 있지 않으며,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당연히 가난을 대물림하고, 질병도 많다. 2000년대 이후로는 이곳 사정이 외부로도 많이 알려졌다. 프록터앤드갬블(P&G) 같은 다국적 기업과 유네스코, 지역 비정부기구들이 협력해 ‘모카탐 재활용학교’를 비롯한 민간 교육시설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글조차 못 읽는 아이들이 많다. 시내의 다른 지역 아이들이 학교에 갈 나이에 이곳 아이들은 부모의 손을 잡고 쓰레기 더미에 뛰어들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궁여지책으로 국제기구와 자선단체 등이 생각해낸 것은, 쓰레기를 모으더라도 좀 더 잘 모아 돈을 더 벌게 해주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쓰레기더미 세는 법부터 시작해 효과적으로 재활용품을 분리하는 법을 가르치고, ‘중간상인’들에게 돈을 뜯기지 않도록 수거업체와 직접 계약을 할 수 있게 돕는다. 돈을 벌면서 다른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컴퓨터 사용법이나 기초적인 수학을 가르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마을을 벗어나 생계수단을 찾을 길은 별로 없다. 나라 전체의 경제가 침체돼 있고, 일자리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 마을을 카이로의 다른 지역과 구분짓는 특징은 더 있다. 모카탐 마을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방문자를 반긴 것은 집들 사이에 걸려 있는 콥트 교황의 사진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90% 이상이 콥트교도들이다. 콥트교는 주로 1~2세기 기독교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다. 수단과 미국, 캐나다에도 수십만명 규모의 콥트 공동체가 있기는 하지만 세계 콥트교도의 대부분이 이집트에 있다. 교리는 가톨릭과 비슷하나 로마교황청이 아닌 북부 알렉산드리아의 ‘콥트정교회’에 속한다. 신자 수는 500만명에서 1500만명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집트가 10세기에 이슬람화된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정치적으로 차별을 받아온 콥트교도 일부가 이집트 경제계의 한 축으로 성장한 반면, 가난한 콥트교도들은 쓰레기 마을을 차지하는 식으로 양분됐다. 이집트 콥트교도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을 꼽자면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를 들 수 있다.

 

콥트교도들은 무슬림이 지배적인 이집트 사회에서 숱한 핍박을 받아왔다. 1952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가말 압둘 나세르 정권은 세속주의를 내세우며 이집트에서 종교적 색채를 지우려 애썼지만, 특히 마이너리티인 콥트에 대한 압박은 심했다. 교회를 수리할 때마다 관공서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 법률은 2005년에야 고쳐졌을 정도다. 2009년 돼지에게서 옮겨온 ‘신종플루’가 유행하자 정부는 자국 내에 있는 돼지 35만마리의 살처분을 지시했다.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돼지고기 소비자는 거의 모두 콥트교도였다. 모카탐 마을 주민들 상당수는 쓰레기 처리와 함께 돼지 키우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당시 가장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이슬람 사회 속 '콥트 기독교' 소수파들

 

콥트교도를 향한 무슬림들의 물리적 공격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2000~2001년의 ‘엘코셰 공격’이 대표적이다. 이집트 중부 엘코셰에 살던 콥트교도와 무슬림 간의 개인적인 다툼에서 시작된 충돌이 격화돼 콥트교도 20명 이상이 살해됐다. 3년 전 호스니 무바라크를 몰아낸 시민혁명 뒤에도 콥트교도들은 유혈사태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었다. 폭도로 변한 군중들 일부가 카이로 등지의 콥트교회 여러 곳을 공격하고, 콥트교도들을 살해한 것이다. 


지난해 7월 ‘무슬림형제단’ 소속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이 군에 의해 축출된 뒤에도 콥트교도들에게 불똥이 튀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군부에 대한 불만을 애꿎은 콥트교도들에게 돌려, 교회에 불을 지르고 신자들을 공격했다. 지난달 통과된 이집트의 새 헌법은 모든 종교의 신자들이 차별을 받지 않고 종교적 자유를 보장받게 했다. 콥트 대표들은 쿠데타 뒤 군부 주도로 구성된 각 정당-종파·종교 연석회의에 참여했고, 새 헌법을 만든 ‘50인 위원회’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정정불안이 일어날 때마다 가장 큰 위협에 시달리는 것은 언제나 콥트교도들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와 함께 콥트 교회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 하나가 모카탐 마을에 있다. 구멍가게와 집들과 쓰레기더미가 뒤섞여 있는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올라가면 ‘동굴교회’로 유명한 성시몬 수도원이 나온다. 중동 최대의 기독교 교회라 불리는 곳이다. 10세기 기독교 성자 성시몬이 기적을 행한 곳에서 유래했다는 이 교회는 1970년대에 세워졌다. 주민들은 거대한 사암 절벽을 깎은 동굴에 기도할 곳을 만들고, 절벽에는 성경의 장면들을 새겨나갔다. 


핍박받는 콥트교도들, 쓰레기 마을 주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교회가 입소문을 타자 1980년대에는 정부도 관광상품으로서의 가능성에 눈을 돌렸다. 세계은행 등의 지원을 받아 1991년 400명 수용 규모의 노천 예배당이 만들어졌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2만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커졌다. 쓰레기 골목을 지나 언덕길을 거슬러 올라가 만나게 되는 거대한 동굴 교회는 장관이다. 1997년에는 무슬림들이 금식을 하는 한달간의 라마단(금식월) 동안 콥트교도 12만명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세계화 물결에 ‘한 줌의 안락함’마저 위협

 

이집트의 정치적 소요와 종교적 갈등 말고도 모카탐 주민들의 삶을 위협하는 요소는 많다. 쓰레기 산업에서조차 이들이 차지하는 몫은 줄고 있다. 쓰레기 처리마저 글로벌화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모카탐 주민들 이야기는 <자발리엔의 마리나> <개비지 드림스>(Garbage Dreams) 등의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졌다. 특히 2009년에 제작된 마이 이스칸데르 감독의 <개비지 드림스>는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미국 등 각국에서 방영됐다. 그 해 내슈빌국제영화제에서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직접 이 영화를 소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는 쓰레기 더미에서 살아가는 모카탐의 세 소년 이야기를 다룬다. 지구의 어느 구석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지만, 가족과 함께 쓰레기를 줍고 분리하며 살아가던 세 10대 소년에게도 글로벌화의 파도가 밀어닥친다. 쓰레기 처리를 하는 다국적 기업이 이곳에까지 들어온 것이다. 2003년 호스니 무바라크 정부는 경제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쓰레기 수거를 민영화한다며 외국 기업에 개방했다. 그 결과 모카탐 사람들은 쓰레기를 가져오면서도 일부 지역에선 다국적 기업의 허락을 받거나 수수료를 내거나 ‘고용노동자’로 일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산 중턱의 동굴교회를 방문하고 내려오는 길에, 쓰레기를 부리고 나가는 승합차를 얻어탔다. 가난과 설움에 시달려온 이들이지만 모카탐 주민들은 어느 곳 사람들보다도 친절하고 따뜻하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을을 나갈 때까지, 쓰레기를 이미 내린 빈 차들은 이방인에게 “태워주겠다”며 손짓을 한다. 아이들도 거리낌없이 낯선 이에게 웃음을 보낸다. 하지만 이들의 웃음을 보는 마음이 편치는 않다. 가난하지만 자신들이 믿는 종교에 기대어 가족끼리 뭉쳐 살아가는 이 한줌의 안락함마저도 언제 깨져나갈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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