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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도르코프스키 사면, 소치 동계올림픽 앞둔 푸틴의 '깜짝 카드'

딸기21 2013. 12. 20.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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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재판에서 형량이 선고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50)에게 모스크바타임스 기자가 다가가 ‘10?’이라 적힌 공책을 내밀었다. 징역 10년형 이상을 선고받을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이었다. 창살 안의 호도르코프스키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무한대를 가리키는 수학기호를 그려보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밉보여 체포된지 2년이 지난 그는 자신이 평생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2003년 체포되기 직전까지, 러시아의 대표적인 올리가르히(신흥재벌)였던 호도르코프스키 앞에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소련 시절 공산당원으로 활동했고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시기를 거치며 20대에 신흥기업가로 성장한 그는 국영 에너지기업 유코스를 불하받아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로 키웠다. 


Mikhail Khodorkovsky in a courtroom in 2010. The longtime foe of President Vladimir Putin may be released before the end of his 10-year prison term. (Ivan Sekretarev, Associated Press / December 19, 2013)


이 회사는 한때 러시아 전체 석유생산량의 20%를 생산했고, 호도르코프스키는 나이 마흔이 채 못돼 러시아 최대 부호가 됐다. 당시 집권 3년을 맞은 푸틴은 점점 권위주의적인 색채를 강화하고 있었다. 호도르코프스키는 푸틴을 비난하고, 푸틴의 정적이던 야당지도자 보리스 넴초프에게 정치자금을 건넸다.

 

푸틴은 올리가르히의 횡포에 대한 국민들 불안을 잠재우고 에너지산업을 다시 국유화하기 위해 호도르코프스키를 타깃으로 삼았다. 탈세와 사기 등의 혐의로 감옥에 가두고 유코스를 공중분해한 뒤 가스프롬에 넘겼다. 최대 기업을 해체해 다시 국영기업에 넘긴 것이다. 가스프롬은 유코스를 삼킨 뒤 러시아 최대 기업이자 ‘푸틴의 돈줄’이 됐다. 


2010년 호도르코프스키에게는 여러 혐의가 덧붙여졌고 징역 기간은 더 늘어났다. 유코스 사태 이후 다른 올리가르히들도 차례로 쫓겨났다. 그 중 한명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는 끝내 크렘린의 용서를 받지 못한 채 지난 3월 망명중이던 영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호도르코프스키와 ‘유코스 사건’의 진행과정


1987년 호도르코프스키, 메나테프 은행 설립

1995년 에너지회사 유코스 매입

2000년 푸틴 대통령 1기 집권 시작

2003년 세금 회피와 사기 등의 혐의로 체포

2004년 푸틴 대통령 2기 집권 시작

2005년 징역 8년형 선고

2007년 유코스 파산, 가스프롬 등으로 자산 매각

2010년 돈세탁 등의 혐의로 기 수감기간 포함, 징역 13년형 선고

2012년 징역 2년 감형(2014년 석방 예정)

2012년 푸틴 대통령 3기 집권 시작

2013년 12월19일 푸틴 대통령, 호도르코프스키 사면계획 발표


그린피스 활동가들과 반정부 펑크록그룹을 체포하고 동성애자들을 핍박하는 법안을 만들어 서방의 지탄을 받던 푸틴이 19일 러시아 헌법제정 2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사면계획을 발표했다. 푸틴은 이날 모스크바 시내 국제무역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호도르코프스키를 석방하겠다”고 말했다. 


“그(호도르코프스키)는 10년 넘게 감옥에서 보냈다. 긴 시간이었다. 이제는 누군가가 결정을 해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는 법에 따라 적절한 문서를 제출해 내게 사면을 청원했다.” 


푸틴은 “그의 어머니가 병을 앓고 있다”며 호도르코프스키 사면에 대해 ‘인도적인 이유’를 덧붙였다. 하지만 일간 코메르산트는 크렘린이 추가 기소 위협을 해서 호도르코프스키로부터 ‘반성’의 뜻을 담은 사면 청원서를 받아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호도르코프스키는 이튿날인 20일 곧바로 석방됐다.

 

이 사면은 푸틴이 서방에 유화 제스처를 표하기 위해 내놓은 ‘깜짝 카드’로 풀이된다. 이날 발표된 사면에는 그린피스 활동가들과 펑크록그룹 ‘푸시라이엇’ 멤버 등 서방의 관심을 끌어온 이들이 포함됐지만, 어차피 이들은 오래 갇혀있을 처지는 아니었다. 이보다 좀더 비중있는 인물을 풀어줘야 했던 푸틴이 형기를 거의 다 채워가던 호도르코프스키를 택했다는 것이다. 


사건 당시의 파장이 워낙 컸기에 호도르코프스키의 이름은 서방에도 깊이 각인돼 있다. 하지만 이미 자산을 다 빼앗기고 날개가 꺾여, 푸틴에게 절절한 ‘반성문’을 쓰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처지다. 어차피 호도르코프스키는 올리가르히의 대표 격으로 투옥됐을 뿐, 정계의 거물도 아니었다.

 

검찰은 그를 좀더 가둬두기 위해 최근 100억달러 이상 규모의 횡령 혐의를 추가로 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과 프랑스, 독일 등 각국 정상들의 소치올림픽 보이콧 움직임이 일자 다급해진 푸틴은 호도르코프스키 카드를 꺼냈다. 정치분석가 스타니슬라프 벨코프스키는 모스크바타임스에 “푸틴은 이 사면으로 러시아에 대한 우호적인 보도가 나오길 바랄 것”이라며 “푸틴은 더이상 호도르코프스키를 두려운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 또한 확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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