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딸기의 하루하루

차 한 잔 하면서.

딸기21 2006. 2. 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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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를 참 좋아한다. 쓩쓩 차 말고, 마시는 말이다. 꽃꽂이나 난초 그리기 따위 배울 마음은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지만, '다도'라는 것이라면 해보고 싶다.

 

도쿄에서 일본어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은 기모노를 많이 갖고 있고(기모노를 넣는 옷장을 내게 보여주신 적이 있는데 정작 선생님께서 기모노를 입고 계신 모습은 볼 기회가 없었다), 아담한 체구에 지적인 분이었다.

벌써 언제적 일인가 싶지만, 선생님 집에 놀러갔다가 말차를 마셨다. 말차는 곱게 빻은 찻잎을 넣어 걸죽하다 싶을 정도로 진하게 타는데, 일본의 다도라고 하면 말차를 마시는 걸 말한다. 진한 말차를 마시면 잎 안이 파래 풀어놓은 듯 초록색으로 물이 들어요. 헤헤~ 하면서 파랗게 된 입을 선생님께 보여드렸더니, 다도에서도 말차 마시고 초록색 입이 된 것은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달디 단 와가시(和菓子·일본과자)를 그야말로 쪼끔, 선생님 하나 나 하나 먹으면서 말차와 센차(煎茶·잎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더랬다. 이상, 도쿄에서의 추억 한 토막.

 

본격적으로 차에 맛(이라기보다는 버릇)을 들인 것은, 2000년 무렵 쯤이었던 것 같다. 그땐 그냥 아무거나 주변에 있는 것을 마셔댔다. 2002년에 살이 많이 찔 일이 있었는데, 옆지기가 홍콩에 갔다가 보이차 한 통을 사다주었다. 말이 보이차일 뿐, 그런 고급차를 싼 가격에 사왔을리 만무하고, 아마도 다른 차가 아니었을까 싶다. 맛은 독특하고 씁쓰레하면서 싱거운 것이 우롱차 비슷하기도 했는데 그거 마시면 살이 빠진다나.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쪘던 살은 금방 빠졌다. 물처럼 그걸 마셔댔다(사실 나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 어릴적부터, 맹물을 마시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차나 우유, 음료의 형태로 되어있지 않은 맑은 물은 마시지 않는다).

 

보이차 이후에 나를 뿅 가게 만든 것은 얼그레이였다.

 

홍차에 조예가 깊은 것은 전혀 아니고, 종로 2가 티포투에서 파는 얼그레이에 홀딱 빠졌더랬다. 이대 근처 티앙팡(만화 '홍차왕자'에서 따온 상호라는데 난 그 만화는 몇권 보고 재미없어서 치웠더랬다)에서도 홍차를 마셔본 일이 있지만, 나는 처음에 먹어본 것이 얼그레이인 탓에, 티앙팡 얼그레이 맛이 맘에 안 든다는 이유로 아예 마음속에서 접어버렸다. 그렇게, 한번 가본 티앙팡은 다시 가지 않는다.

티포투에서 얼그레이를 사다가 집에서 혼자 우아한 분위기 내가며 마시곤 했었다. 한 친구는 내가 그 집 차를 좋아하는 걸 알고 다즐링을 사다줬는데 그것도 훌륭했다. 하지만 역시, 맛있는 얼그레이.

 

함께 일하던 이들과, 시간낭비 '부서 회식' 대신에 무언가 서로서로 배워볼 만한 것을 하자고 해서 딱 두 번 '배우고 가르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첫번째는 와인이었고 두번째는 차였다. 그때 티포투에서 여러 사람이 여러 종류의 차를 주문해서 먹어봤는데, 내가 시켰던 로즈는... 무려 립스틱 맛이 났다 .

역시나, 기본이 중요해...라는 것을 재확인. 하지만 티포투가 아닌 대부분의 커피숍 다방 까페 레스토랑 등등, 이런 곳들에서 얼그레이를 마시면 100이면 100 후회한다. 고로 얼그레이는, 평소의 내겐 '마음 속의 차'일 뿐이다.

마음 속 최고의 홍차로 기억하는 것은, '평범한' 영국산 잉글리시 브렉파스트.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친구가 영국 여행을 다녀오면서 조그만 까만 종이상자에 든 잉글리시 브렉파스트(티백)를 사왔다. 내가 어떤 수준이었냐면--- 짙은 홍차에 우유를 넣어 마시는 방법을 '스스로 고안'해내고 좋아한 적이 있었다. 이 세상엔, 벌써 수백년도 전에 '밀크티'라는 걸 마시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뒤늦게야 알고서 얼마나 아까워했는지.

아무튼 잉글리시 브렉파스트에 설탕 듬뿍, 우유 듬뿍 넣어 마시는 것이 내 '차 이력'의 최대 호사였다.

 

이렇게 수다를 떨게 된 이유--

 

사무실에서 녹차를 물처럼 대놓고 마신다. 정식으로 차를 우려내 마실 여유는 없고, 일본에 있을 때 수퍼마켓에서 구입한 전차를 티백(이것 너무 맘에 들어서 잔뜩 사가지고 왔다)에 넣어 마신다. 오차 특유의 고소하고 쌉싸름한 맛은 있지만 가히 좋은 맛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던 차에, 회사 선배님께서, 일본 출장길에 공항에서 사왔다는 반차(番茶)를 갖다주셨다. 집에 가져가서 티백에 넣으면서 어제 하나를 우려 마셨다. 다카시마야(高烏屋) 백화점 마크가 찍혀있는 걸로 보아 적어도 싸구려는 아니겠거니 하면서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다.

감로차 같다고 해야 하나, 맑으면서도 가볍게 달콤한 기운이 입안에 도는 것 같다. 기분이 개운해지고 즐거워졌다.

 

이번 설에 보성 녹차가 아주 쪼끔 들어왔다. 며칠 전에는, 재작년 터키 여행 때 사가지고 와서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애플티를 꺼내서 먹어보았다. 저가품;;이지만 상큼하고 맛있었다. 그리하여 요 며칠, 차 마시는 생각만 하고 있다. 며칠 뒤에는 일본 공보문화원에서 다도회를 여는데 선착순 150명 무료라고 하니 구경이나 가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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