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세이브더칠드런의 김희경 선배를 만나서 레바논과 요르단에 있는 시리아 난민촌의 비참한 실태를 들었습니다. 국제사회가 시리아 사태를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팔을 걷어부친 것도 아닙니다. 왜들 이렇게 꺼리는 걸까요.
다국적군 공습으로 제공권을 확보하고 독재정권을 단시간에 몰아낸 리비아와 달리 시리아는 주변국들과 지정학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데다 인구밀도도 높습니다. 그래서 ‘인도적 차원의 군사개입’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도적 차원의 군사개입이 필요한 때가 있지만, 자칫 민간인들이 더 많이 희생되게 만들 수 있죠. 1990년대 옛 유고연방 공습이 바로 그런 예였고요.
암만에 모인 '시리아의 친구들' 사진 www.naharnet.com
22일 미국 등 서방과 아랍권 11개국이 ‘시리아의 친구들’이란 이름으로 요르단 암만에서 머리를 맞댔지만 뾰족한 처방은 내놓지 못했습니다. ('시리아의 친구들'은 시리아 내전이 일어난 뒤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니콜라 사르코지 주도로 만들어진 국제적인 지원그룹입니다. 아무 기여는 않고 있지만 암튼 한국도 멤버로 들어가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대응은 아직까지는 ‘군사개입 반대, 정치협상으로 해결’쪽에 맞춰져 있습니다. 주변국들 중재로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과 반정부 진영이 협상을 벌여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민주정권으로 이행하게 한다는 것이죠.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암만 회의에서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향해 “협상에 계속 응하지 않는다면 반정부 진영에 대한 지원을 더욱 늘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은 반정부군에게 비군사적인 즉 '무기가 아닌' 것들만을 지원해줬습니다. 시리아 전역을 무기 금수대상으로 삼아 제재하고 있기 때문이죠. 케리가 지원을 확대한다고 했지만 금수조치를 풀고 무기까지 공급해줄 것인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지원에도 여러 '단계'가 있기 때문이겠죠.
회의 뒤 참가국들은 아사드 정권에 대화를 촉구하고 레바논 무장 정치조직 헤즈볼라의 개입에 반대한다는 코뮤니케(선언)을 내놨으나, 지금까지 미국과 아랍권이 보여온 행보에서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시리아의 친구들’은 다음달 스위스 제네바에서 아사드 정권과 밀접한 관계인 러시아까지 포함하는 국제회의를 열어 정치적 해법을 모색할 방침이지만, 아사드 쪽과 반정부군이 참여할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케리 장관은 특히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을 우려하며, 무력 충돌을 최대한 억누르는 데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시리아 반정부군의 주축 부대를 이끌고 있는 살림 이드리스 장군은 며칠 전 정부군과 쿠사이르 지역에서 교전하면서, 아사드 편에 선 헤즈볼라 병사들을 쫓아 레바논 국경 너머까지 군사들을 보냈습니다.
미국은 쿠사이르가 고향인 이드리스가 무리수를 둠으로써 분쟁을 레바논 쪽으로 더 확대시켰다고 보고 있습니다. 미국 등은 반정부군에 '레바논으로 넘어가서까지 헤즈볼라를 추적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어찌 보면 미국의 관심은(그리고 아마 시리아 주변국들의 관심도) 시리아 문제가 국경 너머까지 확산되는 걸 막는 데에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반면 영국과 프랑스는 시리아에 대한 무기 금수조치를 풀고 반정부군에 적극적으로 무기를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미국과 다른 유럽국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무기공급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자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 시리아를 방문한 미국 뉴욕타임스의 토머스 프리드먼은 21일 “반정부군 사령관을 만나보니, 자기 아들과 조카와 사촌들로 군대를 구성해놓고 있더라”면서 “이런 세력에게 어떤 지원을 해줘야 하는지, 미국은 시리아가 어떤 나라가 되길 원하는지부터 생각해야 한다”는 컬럼을 썼습니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이 반정부군에 대한 무기지원을 포함한 ‘강도높은 개입’을 주장하고 있으나, 폭스뉴스 등의 여론조사에서 미국민들의 60% 이상이 개입에 반대하는 걸로 나타났습니다.
시리아와 접경한 터키는 지난 11일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시리아계의 폭탄테러 이후 아예 국경 출입을 봉쇄해버렸네요. 미국이 시리아에 낮은 수준으로라도 군사개입을 하려면 터키 내 미군기지를 이용해야 합니다. 이라크전 때처럼 미국이 터키에 거액의 원조라도 약속해주지 않는 한, 터키가 무력충돌의 부담을 안으려 할 것같지는 않습니다.
사진 PRESS TV
■ 시리아와 이스라엘
유일하게 시리아와 '무력 공방'을 벌이고 있는 나라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미르 에셸 공군 참모총장은 22일 시리아가 러시아제 S300 대공무기를 배치하고 있다며 “여러가지 형태로 갑작스런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예루살렘포스트가 보도했습니다. 그는 시리아의 정권이 무너질 경우 산재한 무기들이 이스라엘을 겨냥할 수 있다면서 “(2006년) 레바논 전쟁 때는 우리의 화력을 전면 동원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전쟁이 나면 100% 활용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 헤즈볼라가 시리아로부터 정밀 무기를 입수하는 걸 막겠다며 이달 들어서면 두 차례 시리아를 공격했습니다. 21일에는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시리아 땅 골란고원에서 양국 병사들 간 총격전이 벌어져 시리아군 3명이 숨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엄포를 놓고는 있으나 함부로 움직일 처지는 아닙니다. 시리아와의 휴전협상 책임자였던 이스라엘의 이타마르 라비노비치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양국 간의 오랜 ‘교착 상태’가 깨지고 있다면서 “시리아, 이란, 헤즈볼라, 러시아가 모두 개입되면서 이전과 상황이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은 먼저 이들이 만들고 있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이해해야 한다”면서 “정보가 가장 중요할 것이며 (그 새로운 규칙에 대한) 대답은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는 것이야 개의치 않겠지만, 그 자리에 이슬람 과격세력이 들어서는 것은 이스라엘도 원치 않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군사적 의도는 없으며 우리의 공습 목표는 헤즈볼라”라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스라엘 안보전문가 기오라 에일란드도 뉴욕타임스에 “지금까지 우리(이스라엘)가 이웃나라들 문제에 영향을 미치려 했을 때마다 결과는 아주 좋지 않았다”면서 “때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사드 정권은 이스라엘이 다시 공격해온다면 보복할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아사드 역시 자유로운 처지는 아닙니다. 아랍 세계 안에서도 자국민을 학살하는 정권으로 비난받고 있는 아사드가 이스라엘과 맞붙음으로써 이미지를 쇄신하려 할 가능성도 있지만, 자칫 이스라엘의 보복에 맞부딪쳐 군사적 타격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무기로 맞붙으면 이스라엘이 압도적인 우위에 서겠지요. 반정부군과 교전을 계속하는 상황에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나설 여력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 헤즈볼라의 딜레마
이미 시리아 사태로 인해 주변국들로 유혈충돌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시리아 반정부군은 대부분 이슬람 수니파인 반면, 아사드 정권은 시아파 내에서도 소수 분파인 알라위파입니다. 시아파를 기반으로 하는 레바논 헤즈볼라는 아사드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시리아를 다리 삼아 이란산 무기를 공급받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참고] 이슬람의 종파들
[참고] 레바논에는 왜 종파가 많을까
헤즈볼라는 2년여 전 시리아 내전이 촉발된 뒤 줄곧 거리를 둬오다가 이달들어 아사드 정권 편에서 본격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반정부군에 밀리던 시리아 정부군은 최근 쿠사이르라는 요충지를 재점령하면서 판세를 유리하게 바꾸고 있습니다. 헤즈볼라 병력이 들어가 정부군의 쿠사이르 탈환을 도우면서, 시리아 사태는 지역전쟁의 양상을 띄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종파싸움 성격도 짙어졌습니다.
헤즈볼라가 이 상황을 어디로 끌고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 헤즈볼라로서는 무기·자금줄인 이란-시리아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으며, 아사드 정권이 무너질 경우 자기네 조직 자체가 존망 위기에 몰립니다. 하지만 레바논 민중들의 조직이자 반이스라엘 투쟁의 선봉으로 호응을 얻어온 헤즈볼라가 이번 일로 인해 정치적 곤경에 빠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사드 독재정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정당성이 없는데다, 남의 나라 정권지키기에 목숨을 던질 헤즈볼라 병사가 얼마나 될지도 의심스럽습니다. 또 아랍국들은 핵 개발 의혹 속에 주변국들로 영향을 키워가는 이란을 몹시 경계하면서, 이들과 연계된 헤즈볼라에도 의구심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랍 민중의 투사’였던 헤즈볼라가 ‘친이란계 독재 비호세력’으로 전락하는 듯합니다.
헤즈볼라(헤즈브 알라)는 ‘신의 당(黨)’이라는 뜻이지만, 최근 ‘헤즈브 알 샤이탄(악마의 당)’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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