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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그 후 10년 (이라크 전쟁 10주년)

딸기21 2013. 5. 2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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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황해문화'에 이라크 전쟁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10년 후, 다시 황해문화(2013년 여름호)에 보낸 글입니다.


2003년 1월 18일, 영하의 추위 속에서 미국 워싱턴의 의사당 앞에 수만 명이 모여 ‘전쟁 반대’를 외쳤다. 미국을 ‘깡패 국가’라 부른 것은 북한도 이라크도 이란도 아닌, 미국의 시민들이었다. 시위대의 피켓 중에는 ‘정권 교체(Regime Change)’라 적힌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위대가 원하는 정권 교체의 대상은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악마 취급을 하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아니라 부시 자신이었다. 시민들은 부시가 말한 ‘악의 축’이라는 발언을 부시에게로 돌리면서 “이 악이 우리 아이들 머리위에 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날 프랑스에서는 파리를 비롯한 40개 도시에서 반전 평화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국을 맡고 있었다. 시위대는 프랑스가 거부권을 행사해 이라크에 대한 군사공격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에선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수천 명이 반전 집회를 열었으며 노팅엄, 맨체스터, 벨파스트 등지에서 밤새 촛불 시위가 벌어졌다.


러시아, 일본,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독일, 스웨덴, 그리고 한국.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평화집회가 열렸다. 베트남전 이래 수십 년 만에 전 세계의 시민들이 미국의 무모한 전쟁 계획에 항의했다. 베트남전 때의 시위가 주로 미국과 유럽에 국한됐던 것과 달리 이때의 반전 행동은 ‘지구적’이었다. 곳곳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이라크 전쟁에 대한 우울한 예언이기도 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지 3월 20일로 10년이 됐다. 그 10년 동안 이라크 사람들은 공습과 테러와 내전에 죽어나갔고, 미국은 빚더미에 앉았다. 세계는 분열됐고, 석유지정학의 핵심인 중동엔 격변이 왔다. 호평을 받는 전쟁이 있을까마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특히나 냉혹하다. 인도적인 측면에서는 물론이고, 국제정치와 지정학적인 측면, 경제적인 측면, 모든 면에서 이 전쟁은 실패였다. 미국이 ‘이라크 자유작전(Operation Iraq Freedom)’이라는 위선적인 이름을 붙였던 이라크전은 ‘해서는 안 되었던 전쟁’이었다.

이라크에 대한 조지 W 부시의 거짓말들

이라크 공격은 애초부터 거짓말로 시작됐다. 미국은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한 뒤 테러조직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2011년 사살)이 은신해 있던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그런데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아프간 침공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부시는 집권 첫해에 시작한 아프간 전쟁에 이어, 2년 뒤인 2003년 또 다른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공격 대상은 12년 전 아버지 조지 H. 부시 집권 시절 한 차례 공격했던 이라크였다. 이전까지 미국은 중동과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반미 성향의 정권이 쿠데타 등에 의해 전복되도록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전략을 써왔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는 ‘직접 개입’ 즉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 정권을 교체해버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른바 ‘정권 교체(regime change)’ 전략이었다.

An IAEA inspector is taking smear samples at a machine factory in Iraq during weapons inspections in 2002. 사진 IAEA 웹사이트



목표는 미리 정해놓은 것이고, 명분은 멋대로 붙이면 되는 것이었다. 부시 행정부 안팎에 포진한 신보수주의자들(네오컨)들은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제거해야 한다는 명분을 찾으려 애썼다. 알카에다 연계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다음에 내놓은 것은 ‘대량살상무기(WMD)’ 문제였다. 이라크가 핵무기·생물무기·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제조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부시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손에 쥔 사담은 이미 화학무기로 수천 명을 숨지게 한 살인마 독재자”라고 주장했다.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끝 무렵인 1980년대 말 북부 쿠르드 지역의 할라브자에서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쿠르드족 수천 명을 화학무기로 학살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이라크를 공격해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유엔은 할라브자 학살이 알려지자 1990년부터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지역을 비행금지구역으로 정해 이라크 남북의 제공권을 차단했으며 쿠르드족이 자치정부를 구성하도록 지원했다. 이때부터 사실상 북부 쿠르드지역은 사담 정권의 통제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이라크와 알카에다 관련설 역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뒤에 드러났다. 사담 후세인 정권은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인 알카에다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세속주의 독재정권이었고, 오히려 이슬람 극단주의를 억누르기 위해 애썼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웃한 이란에 이슬람 근본주의 쉬아파 혁명이 일어나자 미국 못잖게 경계를 한 것이 사담 후세인이었다. 부시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이라크가 알카에다의 무대가 된 것은 미국의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뒤였다. 극단주의 테러집단을 억제할 독재정권의 물리력이 사라지고 반미감정이 극에 이르자 미군 점령 하 이라크에서는 외부에서 유입된 테러조직원들이 ‘이라크 알카에다’ 지부를 만들어 기승을 부렸다. 이 시기의 상처는 지금도 계속 이라크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다. 최근에도 이라크에서는 관공서를 겨냥한 무장집단의 테러가 일어났고, 전쟁 전까지 공존하던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 간 유혈충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라크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에 대해 부시가 얘기한 내용들 또한 대부분 과장됐거나 사실이 아니었다. 미국은 이라크를 점령한 뒤 유엔 사찰단이 아닌 자체 사찰단 성격의 ‘이라크조사그룹(Iraq Survey Group)’을 만들어 이라크 전역을 샅샅이 뒤졌으나 핵 관련시설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계획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를 찾아내는 데에 실패했다. 

이라크 ‘핵 계획’에 대한 정보왜곡은 뒤에 미국 내에서도 엄청난 논란거리가 됐다. 2008년 미국 언론들은 9·11 테러 때부터 이라크 침공 때까지 1년 반 동안 부시 대통령과 최측근 7명이 공개적으로 발언한 내용들을 분석한 결과 935건이 거짓 발표나 진술들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부시가 이라크 공격을 옹호하기 위해 했던 말들은 거짓과 왜곡이 어떻게 세상을 전란에 몰아넣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분열로 시작돼 분열로 끝난 전쟁

물론 부시의 거짓말에 세계가 모두 속았을 리는 없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세계는 갈라졌다. 네오컨 집단 외에는 아무도 이유를 찾지 못했던 전쟁이었다. 국제사회의 원로인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당시 교황 요한바오로2세도 나서서 반대했다. 

이라크전은 ‘국제적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다. 미국의 치열한 외교전에도 불구하고 유엔 안보리에서 러시아, 중국, 프랑스가 끝내 무력사용 결의를 지지하지 않았다. 아프간 전쟁 개전 뒤에는 뒷수습을 위해 유엔 안보리 결의로 다국적 국제치안유지군(ISAF)이 결성됐지만, 이라크에 대해서는 군사행동을 안보리가 허용하지 않았으며 뒷수습을 위해서조차 유엔 차원의 파병을 허용하거나 독려하는 결의를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몹시 비판적인 입장이었고, 미국이 유엔과 국제사회를 무시하고 마침내 침공을 감행하자 격렬히 비판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입김을 강하게 받는 영국, 캐나다, 일본, 한국, 그리고 동유럽과 중남미의 일부 소국들만이 이라크 전쟁에 파병했다. 

독불장군 미국은 끝내 공격을 시작했고 3월 20일 바그다드 상공엔 화염이 솟아올랐다. 40만 명이나 된다던 이라크 정규군과 사담의 특공대, 정예부대인 공화국 수비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사담 후세인은 개전 직후 축출됐고 2003년 12월 미군에 붙잡혔다. 그는 2006년 말 이라크 새 정부 산하에 세워진 특별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절대 권력의 한 축이던 사담의 두 아들, 우다이와 쿠사이는 미군에 사살됐다.

President George Bush introduces the en:Joint Resolution to Authorize the Use of United States Armed Forces Against Iraq, October 2, 2002. _ www.whitehouse.gov



숨진 것이 사담과 그 잔당뿐이었을까. 거센 반대 여론을 의식한 미군은 ‘외과수술 같은 정밀 폭격으로 민간인 피해를 줄이겠다’고 했지만 고가의 무기들을 쏟아 부은 전면전에서는 공허한 약속에 불과했다. 개전 2주 만인 2003년 4월 3일, 영국 인디펜던트 기자 로버트 피스크는 “(이라크 중남부) 힐라의 병원에는 갈기갈기 찢긴 시신들이 즐비했다”고 보도했다. 이라크전의 맨 얼굴을 그대로 보여준 ‘힐라 병원 오폭사건’이었다.

미군의 작전 중 가장 격렬한 비난을 산 것은 2004년 바그다드 부근 팔루자에서 벌인 저항세력 색출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사실상 인종청소에 가까운 학살로 드러났다. 2006년 3월엔 미군들이 마흐무디야의 민가에 들이닥쳐 한 소녀를 성폭행하고 가족들을 불태워 죽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참상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계속됐다. 2007년 민간군사회사인 블랙워터 직원들이 비무장 주민들에게 총기를 난사해 17명을 살해하면서 ‘민영화된 전쟁’의 실상을 폭로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미국의 이미지에 치명타를 안긴 것은 2004년 세계를 달군 ‘아부그라이브 수용소 인권유린’이었다.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전쟁의 여파는 컸다. 국제사회와 안보리의 분열은 미국이 자초한 것이었다. 개전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콜린 파월이 유엔 회의석상에서 직접 브리핑을 하며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숨기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파월 자신마저도 속았던’ 부시 행정부 주전파들의 농간으로 드러났다(부질없는 후일담이지만 뒤에 파월은 자서전에서 스스로 속았음을 인정하며 부시의 측근들에게 격분했던 사실을 털어놨다). 

안보리는 미국·영국과 그 나머지 나라들의 싸움장이 됐고 미국의 위상은 떨어졌다. 이후 리비아·시리아 사태 등 이슈가 있을 때마다 국제사회의 분열이 반복됐다. dpa통신은 얼마 전 이라크전쟁을 돌아보며 “당시 미국이 보여준 ‘나홀로(go-it-alone) 노선’ 때문에 안보리에 균열이 생겼다”면서 “시리아 문제에 공동 대응을 못하게 된 것도 그 때부터의 마비상태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동 정세도, 세계 경제도 ‘흔들’

중동 정치지도는 이라크 전쟁 이후 크게 바뀌었다. 미국의 바람과는 반대로, 최대 정치적 승자는 이란으로 판명됐다. 민주화 혁명을 거치며 이집트의 군사독재정권이 쫓겨났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친미 왕정은 궁지에 몰렸다. 반면 이란은 이웃한 이라크가 무너지면서 중동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지역패권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의 거센 압력 속에서도 이라크-시리아-레바논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시아파 벨트’를 형성하며 세력을 넓히고 있다. 

전쟁은 세계경제의 암초이기도 했다. 올라갈 눈치만 보던 유가의 고삐를 풀어버린 것이다. 전쟁 전 중동 원유는 배럴당 22~25달러였으나 바그다드 폭격과 동시에 뛰어올라 100달러를 넘어섰고 지금도 초고유가가 계속되고 있다. 미국 재정압박은 또 다른 문제다. 전임 행정부 시절 흑자로 돌아선 미 연방 재정은 부시의 두 차례 전쟁으로 인해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뒤이은 금융위기로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경제의 기관차가 돼야 할 미국은 재정난에 발목을 잡힌 상태다.

워싱턴의 네오컨들은 “이라크의 막대한 에너지 자원을 팔아 전쟁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이라크 개발’은 봉이 김선달의 약속으로 드러났다. 이라크는 전쟁 전 10년 넘게 미국과 유엔의 경제제재를 받았다. 금수조치 때문에 묶여 있는 와중에도 사담 후세인 정권은 유엔을 설득해 최소한의 인도적 수요를 충당시켜줄 ‘석유-식량 교환계획’이라는 걸 얻어냈고, 그 덕에 이라크는 석유를 일부 수출할 수 있었다. 

전쟁 직전 이라크의 하루 원유 수출량은 250만 배럴 정도로 추정된다.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난 지금 이라크의 원유 수출량은 하루 290만 배럴 정도다. 금수조치 전 이라크의 최대 수출량은 하루 800만 배럴에 이를 때도 있었다. 이라크의 기간시설은 무너졌고, 피해는 국민들이 고스란히 받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 재건에 돈을 들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게 문제다. 이라크 재건계획을 조사한 미 정부 회계감독관 스튜어트 보언은 3월 초 내놓은 보고서에서 “지금까지 미국은 60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이라크에 퍼부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미국이 세워주다시피 한 이라크 새 정부의 누리 알 말리키 현 총리조차도 보언과의 면담에서 “미국이 돈을 잘못 썼다”고 지적했을 정도였다. 보언은 “최소 80억 달러는 불필요하게 낭비됐다”고 지적했다.

Banners on STW march, September 2002. Taken by William M. Connolley. _ Wikipedia



‘민영화된 전쟁’, 막대한 전쟁비용, 미국인들도 등 돌려

재건이 부실했던 것은 서둘러 전쟁을 일으키느라 재건 계획을 제대로 짜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이 쓴 돈은 대부분 민간 군사회사들이나 미군 하청업체들에게 들어갔고 일부는 이라크의 부패한 관리들 주머니로 흘러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3월 “이라크전쟁 뒤 경호·재건사업 등에 뛰어든 민간 기업들이 지난 10년간 138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고 보도했다. 무려 153조원에 이르는 돈이다. 파이낸셜타임스 자체 분석 결과 재건 사업에 참여한 상위 10대 기업이 전쟁으로부터 벌어들인 수익은 최소 720억 달러에 달했다. 그중 독보적인 존재는 미국 에너지기업 핼리버튼의 자회사였던 켈로그브라운&루트(KBR)다. 이 회사는 지난 10년간 395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따낸 것으로 추정된다. 

핼리버튼은 이라크 전쟁의 마스터마인드(총 기획자)라 불렸던 딕 체니 부통령이 경영자로 있었던 회사다. 체니는 부통령이 된 뒤에도 이 회사로부터 보너스 등을 지급받은 사실이 드러나 구설수에 올랐다. 쿠웨이트의 어질리티 로지스틱스(Agility Logistics)와 쿠웨이트 석유공사가 각각 72억 달러와 63억 달러로 뒤를 이었다. 

업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름을 숨기기 때문에 실제 챙겨간 액수는 더 클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전은 극도로 민영화된 전쟁, ‘군인보다 민간업자들이 더 많았던 전쟁’으로 불린다. 미국은 ‘재건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업무를 민간 기업들에 넘겼다. 현대판 용병 격인 민간회사 직원들이 미국 대사관 경비와 발전소 건설에서부터 화장지 공급까지 도맡았다. 이들이 금액을 부풀려 받아 챙기다가 유엔 차원의 스캔들이 된 적도 있었다. 

미국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시계약위원회가 2011년 낸 보고서에 따르면 10년간 미 국방부의 계약 체결과정에서 낭비되거나 사기당한 금액이 600억 달러였다. 앞서 언급한 총기난사사건의 주범 블랙워터는 회사 이름만 ‘지(Xe)’로 바꾼 채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다. 미 국무부는 바그다드의 미국대사관 경비에만 연간 6억 달러를 쓰고 있다.  

미군은 2003년 3월부터 2011년 12월말 철군할 때까지 8년 9개월간 이라크에 주둔했다. 전쟁에 직접적으로 들어간 돈과 이라크 재건에 투입한 비용, 미국 내 전역병·부상병 복지비용 등을 모두 합치면 미국은 지금까지 2조 달러 이상을 들인 것으로 추산된다. 이라크에서 숨진 미군과 다국적군 사망자 수는 4800명이 넘는다. 미 브라운대 왓슨국제문제연구소는 “미국은 앞으로 40년에 걸쳐 6조 달러가 넘는 돈을 이라크 전쟁 비용으로 지불하게 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미국은 이라크에 최대 동시 15만 명을 파병했고, 병력을 충원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라크전서 다치고 장애인이 돼 돌아온 전역병들은 재정적자와 함께 미국 사회가 앞으로 수십 년 간 져야 할 짐이다. 이미 미 정부는 참전군인 보상금으로만 4900억 달러 이상을 썼다. 수퍼파워로서 미국의 자존심, ‘선한 강대국’이라는 이미지, 경제력, 모든 것이 한 차례 전쟁으로 타격을 입었다. 이 모든 게 부시의 전쟁을 승인해주고 그에게 연임까지 안겨준 ‘못난 유권자들’에게 지워진 부담인 셈이다.

‘군중심리의 마법’에서 풀려나 현실을 직시하게 된 미국인들은 10년 전의 전쟁을 어떻게 평가할까. 

미국 여론조사기관 ‘랭어 리서치’(Langer Research) 최근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8%가 전쟁비용 대비 효과 면에서 이라크전이 “치를만한 가치가 없는 전쟁”이었다고 답했다. 이라크전이 장기적으로 미국의 안보에 기여할 것이라 믿는 사람은 10명 중 2명에 그쳤다. 미국 공화당은 여전히 “이라크 공격으로 테러조직들을 약화시켰다”고 강변하지만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를 펴내는 미국외교협회의 리처드 하스 회장은 지난 14일 “미국인들의 피와 재산을 가치 없는 전쟁에 쏟아 부었다”고 평가했다.

언론의 평가도 차갑다. 영국 BBC방송과 가디언은 미국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이라크 정보기관이 고문 등 인권유린을 자행하고 있음을 고발하는 방송프로그램을 공동제작하기도 했다.

돈으로 따지지 못할 이라크의 피해

이라크에서는 이 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난민이 되고 11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며 지금도 산발적으로 테러가 일어난다. 이라크 사망자는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매년 2만~3만 명을 기록했다. 지금까지 집계된 사망자 수는 11만6000명~18만9000명에 이른다. 

이 숫자가 모두 ‘미군의 총에 의해’ 숨진 이들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전쟁은 미사일과 총탄과 대포 외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삶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미군의 폭격과 지상 작전에서 숨진 이들도 있지만, 특히 전쟁 와중에 벌어진 종파갈등과 테러공격 등으로 이라크 민간인들이 많이 희생됐다. 

한동안 잠잠해지나 했던 테러공격은 미군 철수 뒤 첫 선거가 치러지는 올해 들어 다시 빈발하는 추세다. 4월 18일에는 바그다드 시내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두바이 카페’라는 곳에서 자폭테러가 일어나 32명이 숨졌다. 4월 20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특히 폭력사태가 많이 벌어졌고 선거 유세 도중 살해된 후보만 14명에 이르렀다. 이것이 미국이 자화자찬한 ‘이라크 안정화’의 실태다. 

미국은 전쟁의 상대국인 이라크의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집계조차 하지 않는다. 미국식 표현을 빌면 ‘시체는 세지 않는다.’ 그래서 이라크의 인적 피해는 집계 기관에 따라 추정치가 크게 엇갈린다. 미군 사망자 수조차 미 국방부는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는다. 이라크전이 한창일 때에는 이라크캐주얼티닷컴(icasualties.com)이라는 사이트에서 현지 보도와 인권단체 보고 등을 토대로 미군 사망자와 미군 외 다국적군 사망자 수를 집계했다. 이라크인 피해는 영국 의학연구기관 랜싯 등에서 추정치를 정기적으로 발표했다. 이라크 내에서 삶의 터전을 버리고 피신한 내부 유민 수도 27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Two U.S. Marine Corps M1 Abrams tanks patrol the streets of Baghdad, Iraq on April 14th, 2003. _ Wikepedia



미국 언론들에 따르면 이 모든 악순환을 일으킨 부시는 요즘 “그림 그리기와 페이스북으로 소일하고 있다.”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부시에 대한 평가는 각박하기 그지없는데, 일각에서는 최근 벌어진 보스턴 테러사건을 계기로 “부시 식의 대테러 전쟁이 옳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워싱턴포스트에는 미국 해군대학의 한 교수가 “부시에 대한 평가는 성급했다”며 부시의 ‘정치적 복권’을 주장했다. 

아프고 슬픈 일을 겪은 만큼 타인의 아픔에도 눈길을 주기는 사람과 사회가 있는가 하면, 내가 다쳤다는 핑계로 자신의 가해행위를 오히려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다. 보스턴 사건의 범인들은 체첸인 형제로 들어났다. 보스턴 테러공격을 빌미로 ‘그러니까 부시처럼 했어야 했어’라고 주장한다면, 이번엔 체첸 공습이라도 해야 한다는 소리인가. 

다행히도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얻은 교훈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보스턴 테러의 범인을 ‘외부에서 온 무슬림 테러범’이라 섣불리 몰아가는 대신, 연방법원에서 재판 받도록 할 방침이다. 공화당 일각에서는 쿠바 관타나모 미군기지 내 수용소의 수감자들처럼 ‘적 전투원(enemy combatant)’ 취급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말이다. 

관타나모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지난 1월부터 그곳 수감자들은 단식투쟁과 투석전으로 미군에 맞서고 있으며, 미국은 비인간적인 ‘강제급식’으로 갇힌 이들을 ‘진압’하고 있다. 수감자 중 일부는 2001년 말부터 지금까지 12년 넘게 재판도 못 받은 채로 갇혀 있다.  

냉전이 끝난 뒤 ‘미국 뜻대로’인 세계가 왔다는 걸 알린 것이 조지 H 부시(아버지 부시)의 걸프전이었다면, 그 미국이 제멋대로 굴었을 때 어떤 난장판이 벌어지는 지를 가르쳐준 것은 아들 부시의 이라크 전쟁이었다. 미국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세계는 늘 노심초사 지켜봐야 한다. 이것이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라니, 참 불안한 맏형이고 폭력적인 가장이다. 이제는 세계를 ‘지배’할 힘조차 별로 없어 보이긴 하지만. 보스턴 테러가 가르쳐주는 것은 한 대 얻어맞고 수백 대 때리는 식의 테러와의 전쟁은 실패였다는 것뿐이다. 남의 나라를 초토화하고 자기네 나라를 경찰국가로 만든 뒤에라도 미국이 그 오만의 대가를 깨달았다면 다행스런 일이다.

이라크와 ‘우리’

이라크전이 일어나자 한국 정부는 일본·폴란드·우크라이나·체코 등과 함께 가장 먼저 미국을 엄호하며 파병을 약속했다. 자이툰 부대로 이라크 북부에 파병된 병사에게 이라크 전쟁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2006년 10월 자이툰 부대 4진으로 파병됐던 김한별씨(29)에게 이라크전은 잊혀진 전쟁인 듯했다. 그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갑갑한 부대를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씨가 털어놓는 기억들은 의외로 특별한 것이 전혀 없었다. 쿠웨이트에서 중무장한 미군을 보았을 때, 그리고 주둔지인 이라크 북부 아르빌로 이동하기 위해 미군 C-130 수송기에 탈 때 ‘호랑이 입 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던’ 느낌을 받은 것이 그가 떠올리는 전쟁의 전부다.  

현지 쿠르드인들은 한국군에 호의적이었지만, 자이툰 부대는 안전문제 때문에 주로 영내에서만 생활을 했다. 한겨레신문은 2006년 파병됐다 돌아온 병사들을 접촉, 아르빌에서의 경험을 들은 뒤 “병사들은 그곳에서 글자 그대로의 ‘삽질’만 했다”고 꼬집은 바 있다. 

김한별씨는 “전쟁 무대가 정글에서 시가지로 바뀌었을 뿐, 이라크전 역시 베트남전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전쟁”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한국의 파병에 대해선 “정부가 대미관계를 고려해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고 본다”면서 한국군의 구호재건 사업은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마 이것이 파병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평균적인 시선’이 아닐까.  

한국은 2008년 12월 철수 때까지 연인원 1만 9000여명을 파병했다. 베트남전 이후 최대 규모의 해외파병이었다. 베트남전과 달리 이라크에 간 우리 부대는 비전투병력이었고, 맡은 임무도 ‘재건 지원’이었다. 자이툰 부대는 현지에서 병원과 기술교육센터를 운영하고 학교, 보건소를 짓는 일을 했다. 당시 여론은 “명분도 실리도 없는 전쟁”이라는 반대론이 우세했지만 노무현 정부는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파병을 결정했다. 지금도 파병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은 “한미 동맹을 강화해줬다”는 걸 최대 효과로 꼽는다.

Iraqi man weeps at a hospital in Kirkuk, over the body of his young daughter killed in one of two car bomb explosions. _ Wikipedia



호주 저널리스트 존 필저의 책에는 한 영국인 외교관의 인터뷰가 나온다. 이라크전과 아무 상관없는 이 인터뷰가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외교관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외교에서 도덕이 중요한 잣대가 아니라면 무슨 잣대가 있겠는가.” 필저는 영국이 영국령 인도양 섬에 살던 주민들을 강제로 몰아냈던 과거의 사건을 취재하면서 이런 코멘트를 들었다고 적었다. 공교롭게도 그 섬은 훗날 아프간·이라크 전쟁에서 미군의 주요 공격기지로 이용된 디에고 가르시아 섬이었다.

2010년 한국가스공사가 가스전·유전 개발을 수주한 뒤 국내 기업들도 이라크 시장에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선두는 한화그룹이다. 한화는 작년 5월 바그다드 인근 비스마야의 신도시 건설공사를 따냈다. 삼성엔지니어링은 남부 바스라 서(西)쿠르나 유전개발 사업의 일부를 수주했고 현대엔지니어링과 STX건설 등도 잇따라 계약을 따냈다. ‘국익’이 눈에 보이는 형체로 나타난 게 있다면 아마도 이 기업들의 계약일 것이다.

한국의 언론이나 여론에서 ‘국익’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는 용어다. 단순한 어휘가 아니라 ‘생각의 체제’다. 외교이든 무엇이든, 이익보다 도덕이 우선한다고 내놓고 말하면 철없는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는다. 이라크 파병 때도 그랬다. 파병 찬성론자들에게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의혹의 진위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정작 한국이 파병으로 어떤 ‘국익’을 얼마나 얻었는지, 세계가 반대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에나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위상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등에 대해선 그 후에도 충분한 토론이 이뤄지지 않았다.

10년 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던 그 순간, 나는 요르단에 있었다. 부시의 ‘최후통첩’ 뒤 바그다드를 빠져나와 요르단의 암만으로 이동, 현지 분위기를 취재하던 중이었다. 바그다드 공습이 벌어지던 날 호텔에 앉아 TV를 보던 나는 눈물이 났다. 그저 며칠 스쳐 지나쳤을 뿐인 그 도시가 불타오르는 게 안타깝고 슬퍼서.

공습을 알리는 속보가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미국 CNN방송과 BBC방송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와 노무현 한국 대통령의 ‘전쟁 지지 선언’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대대적인 보도’였다. 굳이 고이즈미를 앞세운 것은, 당시 보도 순서가 고이즈미 그리고 그 다음 노무현 순이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침공을 지지한 나라들 중 그나마 덩치가 있다 하는 게 한일 두 나라였던 탓에, 언론들도 미·영 언론들도 이 소식을 줄기차게 반복해서 전했다.

얼마 전 일본 아사히신문은 이라크 전쟁 발발 당시 일본 관방장관(정부 대변인)을 지낸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총리의 인터뷰를 실었다. 후쿠다는 “영국이 일본 먼저 전쟁 지지를 표명해 달라고 요청했다”며 뒷얘기를 공개했다. 토니 블레어 총리가 의회에서 연설을 해야 하는데, 그 전에 일본이 전쟁 지지의사를 밝혀주면 좋겠다고 영국이 요청해왔다는 것이다. 지지를 못 받는 걸 알면서 전쟁을 하려니 ‘친미 지도자’들 사이에 이런 부탁들까지 오갔던 모양이다.

뒤이어 털어놓은 고백들은 후쿠다의 변명일 뿐이었다. 그는 미·일 동맹이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고이즈미가 전쟁을 지지한 거라고, 하지만 고이즈미가 사실은 부시에게 전쟁을 피하게끔 설득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전쟁 근거였던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일본 자체 정보가 없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당시 판단은 잘못이 아니었다고 했다.

후쿠다의 변명은 바로 면박을 당했다. 일본 주요 언론들은 명분 없는 전쟁을 앞장서 지지하고 파병한 데 대해 정부의 반성을 촉구했다.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일본이 “대의 없는 전쟁을 지지하고 후방지원 등을 위해 자위대를 파견했다”며 정부와 국회가 검증위원회를 구성해 참전 과정을 조사하라고 요구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사설에서 “(이라크 전쟁을 지지해) 아랍세계에서 일본의 중립적인 이미지가 바뀌었다”며 미일동맹에 “일미동맹만 의지하면 되는 단순한 시대환경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반전평화공동행동(준) 주최로 '12-13 한국-중동 반전행동' 집회가 1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려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결정 철회를 촉구했다. 사진 http://user.chol.com/~chungyy/chungyy/10_news/06_sisa-file/sisafile-7-2.htm



‘평화’와 ‘국익’, 한국 사회에 질문을 던진 전쟁

우린 어떤가. 전쟁 10주년을 정리하는 기사들을 여러 신문이 잇달아 실었지만, ‘반성’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정치권은? 군인들을 전쟁터에 내보낸 민주당이나, 지금의 새누리당이나, 이라크 따위에 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 우리의 고민은 일본과 비교해서도 현저히 뒤쪽에 쳐져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전이 우리 사회가 앞으로 해야 할 고민을 드러내준 시발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정부는 군대를 보냈지만, 광화문 한복판에선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시위가 벌어졌고 평화 운동가들이 이례적으로 이라크 바그다드에 들어가 반전 캠페인에 동참했다. 국제적인 이슈를 놓고 국내에서 이런 적극적인 운동이 벌어진 것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출판사 이매진피스의 대표로 있는 임영신씨(43)는 10년 전 이라크에 직접 가서 폭격을 막기 위한 ‘인간방패’ 활동을 벌였다. 그는 이라크 파병에 대해 “집단의 이익이 정의와 도덕보다 더 중시된 부끄러운 역사”라고 비판한다. 

시민단체 나눔문화 평화활동가 고다현씨(20)는 이라크 전쟁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고씨는 고등학교 때 “석유 때문에 죽어간 아이들과 우리의 삶을 돌려 달라”는 이라크 사람의 이야기를 강연에서 듣고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를 비롯한 몇몇 젊은 활동가들은 이라크전의 부도덕성을 고발한 브래들리 매닝 미군 일병을 석방하라면서 주한 미국 대사관 앞에서 2월부터 돌아가며 1인 시위를 했다.

나는 지난해 가을 북아프리카의 모로코를 여행했다. 마라케시의 오래된 저택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는데 어떤 여행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라크 사람인데 사담 후세인 시절 자기 나라를 떠났고 그 후로 줄곧 영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이라크 전쟁 뒤에도 두어 번 바그다드에 다녀왔단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이런 내 감정에 대해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벌써 10년이 지났다. 전쟁 직전의 이라크 분위기를 취재한다고, 사막 길 950km를 달려 바그다드로 들어갔다. 그 때의 두근거리던 느낌. 달랑 일주일 만에 바그다드를 도망치듯 떠나올 때의 자괴감. 내게 이라크 전쟁은 ‘남의 전쟁’이 아니었다.

그저 외신으로 전해 듣고 전해주는 일을 할 뿐이었지만 그것은 내게도 ‘전쟁’이었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국익 논리’, 거창하게 말하면 국익이지만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을 죽여도 상관없다’는 야만과 부딪쳐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내 주변 동료들, 학교 선배들, 나보다 한참 어린 이들이 모두 ‘국익’을 이야기하고 ‘현실주의’를 운운하며 ‘미국과의 동맹’을 들먹이고 몹시도 애국자인 듯이 굴 때에 나는 절망하고 분노하고 때론 목소리를 높이며 유난을 떨었다.

10년 전 바그다드를 나오기 전 호텔 방에서 티그리스 강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다시 이곳으로 ‘여행’을 올 날이 오겠지, 거리에서 만난 이들을 보며 ‘이 사람들 죽으면 어쩌나’ 걱정하지 않고 즐겁게 웃고 떠들 때가 오겠지. 전쟁이 나고 1년이 지나면, 3년이 지나면, 5년이 지나면, 그런 때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새 10년이 지났다. 며칠 전 평화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의 활동가와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바그다드 생각이 났다. 그곳 사람들에게는 지옥과도 같았을 10년. 물론 그 전의 후세인 집권기도 천국은 아니었겠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현재와 미래도 그들에겐 전쟁일 터이다. 

미군은 이라크를 떠났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인들에게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브래들리 매닝처럼 이라크에서 미국이 저지른 범죄를 고발해 수감된 사람도 있고, 드러내 떠들지는 않았지만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도 있고, 무가치한 전쟁에 투입돼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 군인들도 있다. 무엇보다 미국에겐 관타나모가 남아 있다. 여전히 그 곳에는 수십 명의 ‘테러 용의자’들이 불법 수감돼 있다.  

우리는 어떨까. 우리에게 이라크 전쟁은 끝난 것일까. 파병은 잊어진 기억인가. 그렇다고 말하기엔 대답을 찾지 못한 물음들이 너무 많다. 평화유지 활동이란 무엇인지, 군사적 개입이란 무엇인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기여는 어떤 식으로 이뤄져야 하는지, ‘국익’이란 무엇인지, 세계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도덕적 원칙은 무엇인지, 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죽여 가며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해서는 안 되는지. 

이런 기본적인 물음들에 우린 얼마나 대답할 준비가 돼있는 걸까. 이라크 전쟁과 파병은 그저 ‘화두’를 던져준 것일 뿐이었다. 대답은 우리 앞에 여전히 숙제로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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