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정부가 통신·방송시장을 장악한 재벌그룹들을 향해 ‘독점 철폐’의 칼을 빼들었다. 칼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세계 1위 부자 카를로스 슬림이 소유한 통신회사들이다. 정부 방침대로라면 슬림의 곳간인 통신회사들을 강제로라도 팔아치우거나 쪼개야 할 상황이지만, 멕시코 정부가 과연 이를 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멕시코 정부는 11일 통신·방송분야 독점규제를 골자로 하는 규제강화법안을 공개하면서 다음날 법안을 의회에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취임한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통신·방송분야 독점기업들의 과도한 시장통제를 약화해야 한다며 강도높은 규제를 천명한 바 있다.
새 법안은 미국 연방통신위원회를 모델로 한 독립성 있는 규제기구를 설치하고 전국 단위의 TV채널을 2개 이상 신설하며, 외국 투자제한을 해제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독점기업의 자산을 강제 매각하고 사업허가를 취소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지금도 정부 안에 독점 감시기구가 있으나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데다 재벌에 휘둘리고 독립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통신 독점을 해소하려면 멕시코 정부는 슬림과 싸워야 한다. 슬림이 대주주로 있는 아메리카모빌과 텔멕스는 멕시코 이동통신·유선통신 시장에서 각각 80%, 70%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슬림 측의 지나친 독점에 대해선 멕시코 안팎에서 비난이 많았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멕시코 통신산업에 대한 보고서를 내고 “슬림 소유회사들의 독점으로 멕시코 통신비용이 너무 비싸져서 매년 국내총생산의 2.2%를 갉아먹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메리카모빌은 OECD 34개 회원국 통신회사들 중 가장 높은 통신료를 받고 있다. 반면 멕시코의 통신설비 투자는 34개국 중 꼴찌로 나타났다.
보고서가 나온 뒤 슬림 측은 거세게 반발했지만, ‘슬림 제국’의 부(富)가 가난한 멕시코인들에게서 거둬들인 것이라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열두살 때부터 주식을 사는 등 남다른 사업감각을 지녔던 슬림은 잘 알려진대로 포브스 집계에서 연속 4년째 세계 1위를 차지한 부자다. 그의 재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총 490억달러로 평가되는 아메리카모빌 주식이다. 슬림 일가가 절반 가까운 지분을 보유한 아메리카모빌은 특히 유선통신이 열악한 멕시코 농촌지역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높은 통화료를 매기는 것으로 악명 높다.
슬림은 1980년대 멕시코가 경제위기를 맞았을 때 파산한 기업들을 헐값에 사들여 사업을 키웠다. 텔멕스의 경우 원래 국영통신회사였으나 1990년 민영화와 함께 슬림 손에 들어갔다. 슬림은 ‘기부하지 않는 부자’로도 이름 높았다. 1995년 등떼밀려 텔멕스재단을 설립한 뒤 스포츠·문화부문을 지원하고는 있지만 세계 최고 부자의 자선기부로 보기엔 미흡하다는 지적도 많다.
당국의 규제법안에 대해 멕시코시티의 아메리카모빌 본사는 “새로운 발전의 무대가 열리는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지만, 강도높은 규제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시장분석가 크리스 킹은 미 블룸버그통신 인터뷰에서 “멕시코 정부가 정말로 칼을 들이댄 거라면 산업구조에 큰 변화가 올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정부와 슬림 측의 힘겨루기에서 정부가 이길 지는 알 수 없다. 독점 규제책이 나온 것은 처음이 아니다. 멕시코 중앙은행장까지 나서서 통신독점의 폐해를 경고한 바 있다. 법안대로라면 정부는 슬림 측 뿐만 아니라, 방송 시장을 독식하고 있는 또다른 재벌그룹 텔레비사까지 손 대야 한다. 하지만 텔레비사는 지난 대선 때 페냐 니에토 대통령의 승리를 도와준 일등공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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