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이웃동네, 일본

[2004, 일본] 쿠라시키

딸기21 2004. 5. 9.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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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것이 진짜일까. 과연 '진짜'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이렇게 이어지는 일련의 물음들에 대한 답은, 모두 'NO'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없다--라는 류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떤 것이 일본적인 것일까.


오카야마현 구라시키라는 곳은 아주 작은 도시같았다. 역에서 내리면서부터, 서양식(아지님은 뭐가 서양식이냐고 했지만) 느낌이 짙게 풍긴다. 글쎄, 뭐가 서양식이냐고? 딱히 할 말은 없다. 느낌,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서울의 모든 거리가 따지고 보면 서양식 건물들(한옥이 아니라는 의미에서)로 채워져 있지만 '서양식'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롯데월드에 가도, 월드컵 공원에 가도, 서양식은 아니다. 



구라시키에는 미관지구(美觀地區)라는 희한한 이름의 구역이 있다(첫번째 사진). 보기 좋은 지역-- 그 말 그대로다. 보기 좋았다. 작은 도랑이 있고, 양 옆으로 서양식과 일본식의 혼혈 건물들이 서있는. 막부 시절 이 곳은 도쿠가와 가문의 직할지였단다. 에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이 곳은 쌀 창고들이 늘어서있던, 곡물의 집산지였단다. 저 도랑은 그러니까, 쌀을 실어나르던 운하인 셈이다. 1888년에 반 도쿠가와 세력의 습격을 받아 쌀창고들은 다 타버렸고, 쿠라시키 방적소가 만들어진다. 일종의 기업인데, 선견지명이 있었던 모양이다. 쌀창고 자리를 '역사적으로' 남기려 했단다. 


이후의 줄거리는 정확한 소개가 없어 모르겠지만, 아무튼 방적공장 자리는 지금은 '아이비 스퀘어'(두번째 사진)라는 명소가 되어 있다. 공장 건물 벽을 뒤덮은 파란 담쟁이 덩쿨. 서양식 회랑을 흉내낸 건물 안쪽에는 제법 넓직한 광장이 있어서, 우리가 갔던 날에는 콘서트가 열렸다. 

잠시 행사 얘기를 하자면--'아시아의 노래'라는 이벤트였는데 출연진은 오키나와의 닌겐반도주니아(닌겐 밴드 주니어)와 몽골의 오윤나라는 여자가수, 중국 여자, 그리고 현지 재즈밴드. 재즈 공연은 보지 않았다. 아시아--라고 해놓고,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를 이국풍으로 치장해 보여주는 걸 보니,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어떤 종류든 갭이 느껴질 때 마음이 낮은 쪽으로 기울면서 편치않아지는 것은 식민지 근성인가? 


그들의 노래는 특이하다. 음계가 아시아의 다른 음계하고는 사뭇 달라서, C-E-F-G-B-C로 이어진다. 반음 없이 늘어지거나 단조 풍인 다른 민요들과 달리 흥겹게 느껴지는 건 특히 이 음계 때문이다. 류구국(오키나와)은 '禮로써 다스리는 나라', 율도국 같은 나라였다고 했다. 음악을 들으면, 과연 그랬겠거니 싶다. 어디엔가 '있었을' 이상향에 대한 바램이 아니라, 실제 그들의 음악은(많이 들어보진 않았지만) 흥겹고 즐겁다. 관광객용으로 포장된 노래일지는 몰라도, '히야-히야-히야사사-하이야' 하는 특이한 후렴구가 있고, 반박자 어긋나게 진행되는 리듬이 재미있다. 아무튼 그들은 에스키모나 인디언처럼, 일본인들의 재미난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쿠라시키는 깨끗하고 예뻤다. 화려하지 않지만, 교토처럼 유서깊은 곳은 아니지만, 절경이라 할 수는 없지만, 서양식과 일본식이 어우러져서 특별한 효과를 내고 있었다. 아이비 스퀘어니, 하트랜드니 하는 희한한 지명들이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곳. 

이 곳에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에 나온다는 한 구절을 떠올렸다. 일본의 힘은 '바꾸는 힘'이라는. 가라타니 고진은 <신들의 미소>라는 이 소설을 인용해서 일본 정신을 탐구하는데, 쿠라시키는 바로 그런 '바꾸는 힘'을 제대로 보여주는 곳일지도 모른다. 막부의 유산과 근대화의 유산, 서양풍이 빚어낸 풍경을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힘. 그렇다면 우키요에의 후지산 풍경이 '진짜 일본'인 것이 아니라, 모네의 그림 속 일본이야말로 '진짜 일본'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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