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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사람들- 21세기 노예제, 그 현장을 가다

딸기21 2010. 5. 1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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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사람들 : 21세기 노예제, 그 현장을 가다
E. 벤저민 스키너 저/유강은 역 | 난장이 | 원제 : A Crime So Monstrous(2008)



석 달 전 코트디부아르 내륙 부아케에서 부룰리 궤양에 걸려 피부가 다 녹아내린 사내아이를 보았다. 시뻘건 근육이 밖으로 드러나 피가 뚝뚝 떨어지고 파리 떼가 몰려드는데도 아이는 울지 않았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일 터인데, 아프고 못 먹어서 바짝 마른 아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릴 뿐 울지 않았다.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다시 감는 ‘치료’를 받은 뒤엔 조용히 진료소 앞 빈 터에 앉아있을 뿐 웃지도 않았다.


그 무표정을 보면서, 울지 않았던 다른 어떤 아이들을 떠올렸다. 4년 전 바로 옆 나라인 가나에 갔을 때다. 볼타 호수의 어부들이 가난한 주변 마을 주민들에게서 돈을 주고 아이들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는 것이 큰 문제라고 했다. 이른바 인신매매, 아동노동이다.

팔려온 아이들은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교도 보내주겠다던 약속과는 달리 호수로 떼밀렸다. 어부들은 다섯 살에서 열 서너 살까지의 아이들을 배에 태워 호수로 나간 뒤 물에 들여보내 고기를 잡아오게 했다. 그물 값도 안 나가는 살아 있는 ‘낚시 도구’로 썼던 것이다. 국제이주기구(IOM)는 그 아이들을 구해다 두어 달의 안정기간을 거친 뒤 부모들에게 돌려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마침 아이들과 부모가 만나는 ‘상봉일’ 행사가 있어 참관을 할 기회를 얻었다. 몇 년만에 만난 부모들과 아이들은 울지 않았다. 부모들 중 상당수는 자기 아이가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알면서도 보냈을 터이고, 아이들은 자신들을 넘긴 부모와의 만남이 마냥 기쁘고 반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어색한 그 자리가 끝나 집으로 돌아간 뒤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어떤 부모들은 아이를 다시 누군가에게 돈 받고 넘길 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부모자식간의 상봉에 어떤 눈물도 없다는 것, 아이들의 그 표정 없는 얼굴들은 내게 기이한 인상을 남겼다. 울며불며 껴안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익숙해져 있던 탓일까.

아동노동, 인신매매 같은 것들은 외신 기사에서 흔히 듣는 얘기다. 벤저민 스키너는 미국의 저널리스트다. 저자 소개에 따르면 2003년 뉴스위크에 아프리카 수단에 대한 글을 쓰면서 ‘노예제’를 접했고, 일군의 미국 복음주의자(조지 W 부시 정권 시절의 기독교 수구보수 일당들)들을 따라 수단 기독교 노예들의 ‘해방’ 작전을 잠입 취재했다고 한다.

책은 그가 아이티, 루마니아, 몰도바, 인도, 두바이 등을 돌며 취재한 노예제를 담고 있다. 노예 신세로 전락한 사람들, 팔려나가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사람을 사고파는 인신매매범들과 그들을 방치하는 정부 관리들의 인터뷰가 담겨 있다. 한때 노예였거나 지금도 노예인 이들의 입을 빌어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재구성’해 보여주기 때문에 흥미진진한(그러나 처참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아이티의 아동 가사노예, ‘채무’를 빙자한 인도의 대를 잇는 노예노동, 런던과 암스테르담 등 유럽 여러 도시에서 학대당하는 동유럽 출신 성노예 여성들. 생생히 전달되는 노예들의 삶은 끔찍하다.

“빌은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눈물 때문에 숨이 막혔다. 실론이 무르팍을 걷어찼다. 그러고는 양손에 돌을 하나씩 쥐게 하고는 손을 들고 있으라면서 돌을 떨어뜨리면 죽여버리겠다고 윽박질렀다. 처음에는 등에 채찍질을 했다. 빌은 입을 다문 채 돌을 꽉 쥐었다. 그러자 실론은 더 세게 채찍질을 했다. 빌이 소리를 지르자 닥치는 대로 채찍을 휘둘렀다- 머리에. 심지어는 눈에도 채찍이 날아왔다. 다른 아이들은 겁에 질려 바라보았다. 시멘트 바닥에 빌의 피가 흥건하게 고였다. 돌은 여전히 손에 쥐어 있었다.” (1장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 아이티의 더부살이)

“노예사냥은 단순히 오래된 증오가 왜곡되게 폭발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한 종족을 절멸시키는 수단이었다. 현대사에서 종족말살을 꾀하는 자들이 대량학살과 더불어 노예제를 활용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터키인들은 1915년의 아르메니아인 종족말살 과정에서 노예를 취했다. 나치는 1200만 명을 노예로 만들었다. 크메르루주 치하에서는 200만 명이 노예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하르툼 정부의 시도는 20세기에 가장 오래 지속된 노예사냥이었다.”

“아이티에서와 마찬가지로, 저발전은 노예사냥을 피한 가족까지 포함한 일부 가족으로 하여금 가장 약한 구성원을 더 안정된 미래를 위해 내주는 결과를 낳았다. 딩카족 역사가들은 식민시대 이전에 부모가 신용대부를 받기 위해 자식을 담보로 이용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고 말했다. 빚을 갚을 수 있을 때까지 자식을 빌려주는 것이었다. 1988년 기근 때 딩카족 부모들은 자식 한 명당 100달러씩을 받고 바가라족에게 자식을 저당 잡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식이 서서히 굶어죽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가 돈을 만들어 자식을 다시 찾아오려면 원금의 두 배를 갚아야 했다.” (3장 오른손이 소유한 사람들, 수단의 아프리카계 노예들)

“노예제가 폐지된 지 200년이 지난 영국에서는 노예 거래상들이 여전히 공공장소에서 경매를 진행했다. 어느 세르비아인 포주가 입찰 전쟁에서 눈물을 흘리는 리투아니아 10대 두 명을 낙찰받은 개트윅 공항 입국장의 커피숍도 그중 한 곳이었다. 인신매매업자들은 말과 성교하는 것을 거부한 루마니아 여자 네 명을 총으로 쏴 죽였다. 로마의 어느 포주는 루마니아인 노예가 돈을 충분히 벌지 못한 날에는 밤마다 노예를 얼음물에 처넣었다. 옛 유고슬라비아를 통과하는 서구 통로를 통해 여성들을 보내는 알바니아 조직망은 상품을 나체로 행진시키는 경매를 했는데, 구매자들은 여자들을 소처럼 찔러보았다.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쪽으로 보내진 일부 노예들은 산 채로 머리가 잘리거나 매장되고 때로는 신원을 알아보지 못하게 수족이 잘렸다.” (5장 민족 안의 민족, 성노예로 팔려다니는 여성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일들 중에 인간됨의 근본인 자기결정권을 빼앗는 것보다 더 커다란 폭력이 있을까마는, 노예제라는 것은 육체와 정신에 너무나 끔찍한 해를 입힌다. 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노예상인들은 노예를 말 그대로 ‘죽여 버리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여성들의 경우 노예노동은 성폭행과 뗄 수 없는 것이고, 이는 인격을 총체적으로 파괴하는 짓이다. 수단에서처럼 노예제가 ‘인종말살’과 연결돼 있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나라 전체가 노예제의 고리에 휘말리기도 한다. 1990년 1월 루마니아 외무부가 해외여행 제한을 풀자 여성들은 이스탄불에 성노예로 팔려나갔고, 젊은 남성들은 스페인 농장에 예속 노동자로 팔렸다. 구걸로 돈을 버는 조직들은 루마니아 어린이들을 이탈리아에 인신매매했다. 옛 러시아권에서도 가장 가난한 작은 나라 몰도바의 경우 어떤 지역에서는 노예로 팔려나간 사람들이 하도 많아 주민이 3분의 1로 줄었다 한다.

스키너의 작업은 취재의 위험도나 생생한 르포르타주 모든 면에서 두드러진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노예’라는 용어였다. 인신매매, 강제노동, ‘현대판 노예제’, ‘노예와 다름없는 노동’ 같은 완곡어법을 거부하고 그는 ‘노예’ ‘노예제’라는 말을 쓴다. 완곡어법으로 현실을 가리지 않고 드러내 보이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노예의 기준은 케빈 베일즈가 <일회용 사람들>(1999)에서 언급한 것을 따랐다고 밝히고 있다. 그 세 가지 기준은 ▲자신의 선택이 아닌 강요나 사기에 의해서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의 보수를 받지 못한 채 ▲강제적으로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된다. '더부살이'라는 이름으로 학대당하고 노동과 성폭행에 시달리는 아이티의 아이들은 노예다.

수단의 무슬림 아랍인들이 남부 기독교 흑인 부족민들을 납치해 착취하는 것은 '종교 갈등'이 아닌 노예제다. 루마니아에서 ‘애인’에게 속아 런던으로 팔려나가 홍등가에 놓이게 된 여성, 몰도바에서 이스탄불 뒷골목으로 팔려나간 여자들은 ‘성매매 여성’이나 ‘매춘부’가 아닌 성 노예들이다. 사우디와 두바이에서 매 맞으며 일하는 남아시아계 가사노동자들도 노예다. 인도 정부가 빚 때문에 일하는 빈민들로만 치부하는 광산촌 주민들도 역시 노예다.

지구상에 그런 노예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 케빈 베일즈는 2700만 명으로 잡았고, 국제노동기구는 ‘아시아에만 1000만명의 강제노역자가 있다’는 추정치를 내놓은 적 있다. 모르긴 몰라도 지구상 노예의 숫자는 ‘유사 이래 최대’일 것이라는 게 스키너의 말이다.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 첫 번째 방법은 그들이 노예로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류는 노예제와의 싸움에서 아직 완전히 승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현실에 눈 감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두 번째 화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세계경찰 미국은 노예제라는 현실을 외면할까 하는 점이다. 저자는 미 행정부(주로 부시 정부)의 인신매매 근절 노력을 분석하면서, 미국의 ‘인권정책’이라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수행되는지를 살펴본다. 저자는 밀러라는 사명감 강한 관리의 투쟁과 좌절을 통해 미국의 ‘인신매매 반대 외교’가 굴절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일부 관료들은 오늘날의 노예들에게 ‘노예제’라는 표현을 쓰면 과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겪은 고난이 하찮은 것으로 치부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노예제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에 대해 미국의 공식 사과를 받은 적이 없는 나라들에게 영향을 미칠까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4장 인간과 민족보다 앞서는 도덕률)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은 노예제의 의미를 ‘부도덕한 성매매’로 축소한 뒤 일종의 쇼로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이 ‘노예제’라는 말을 애써 피하는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유엔의 정의에 따르면 인신매매는 반인류 범죄는 아니다. 하지만 노예제는 대량학살과 마찬가지로 인류에 대한 범죄이고, 이런 범죄에는 확고히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사우디와 인도를 ‘인권탄압국가’로 지정하고 북한이나 이란에게 하듯 압박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도 성노예로 매매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남부의 농장과 공장지대에서 감금 노동에 시달리는 라틴계 이민자들의 실태가 최근 몇 년 새 잇달아 미국 언론들에 보도되기도 했다.

얼마 전 한국의 ‘사업가’가 베트남의 젊은 여성을 다른 남성과 위장 결혼시키는 방법으로 국내에 들여와, 아파트에 가둬놓고 성노예로 삼았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러시아 여성들’(진짜로 국적이 러시아인지 혹은 동유럽 어느 나라인지는 알 수 없지만)의 상당수는 팔려온 노예들일 것이다. 실제 이 책에도 중국, 일본, 한국 등지로 동유럽 여성들이 팔려나간다는 언급이 나온다. 우리 주변에도 노예들이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전세계 노예 인구의 ‘비율’은 지금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작다. 사람들의 관심, 정부의 강력한 근절정책(국민들의 관심 없이는 이런 정책이 나올 수 없다), 노예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을 품에 안으려는 노력을 통해 상황을 바꿀 수 있다. 책에는 그런 투쟁담, 영혼의 파괴를 극복한 용기있는 이들의 스토리도 담겨 있다.

* 책의 앞에는 리처드 홀브루크가 추천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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