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하는 공포
지그문트 바우만 저/함규진 역 | 산책자 | 원서 : LIQUID FEAR (2006)
책은 재미있다. 바우만은 폴란드 출신 유대인 사회학자로, 나중에 영국에 터를 잡았다. 마르크스주의자였다가 서구마르크스주의 쪽으로 이동했다. 현대 사회를 떠도는 공포, 벗어날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한 꺼풀 벗겨내’ 그 아래 숨겨진 심리와 원인을 다루는 것이 이 책이다. 주로 서양 여러 학자들의 코멘트들을 인용해 설명을 하고 있어서, 아도르노니 한나 아렌트니 하는 등등의 사람들의 저작을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네임드로핑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거 몰라도 책에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내용들을 ‘접수’하는 데에는 큰 지장 없다.
이 책은 공포의 해법을 제시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공포와 직면하라고 우리를 다그치기 위한 것이다. 20세기 전체주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현대사회의 공포’는 식상한 주제일 수 있다. 책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체주의 시대의 공포가 ‘글로벌화’라는 현상을 맞아 더욱 더 강도 높고 더욱 더 광범위하고 더욱 더 예측불가능한 공포로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굴락-아우슈비츠-히로시마는 ‘악마는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전체주의 속에는 고도로 합리화된 관료주의가 들어있었다. 그들 기계적인 관료들은 너나없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20세기의 사건들이 인류에게 던져 준 ‘우리 안의 악마’의 메시지가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데, 이제 우리는 허리케인 카트리나처럼 ‘인재(人災)라는 모습을 띤 새로운 자연재해(불평등이라는 재해)’와도 맞서야 한다. 자연을 정복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인간들은 정복은커녕 재해의 파괴적 효과를 오히려 강화시키고 있다.
게다가 9·11은 어떤가. 이 또한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낸, 이제는 천재지변처럼 예측불가능성으로 인류를 공포에 떨게 하는 말 그대로의 ‘테러리즘’이다. 공포는 생겨나는 순간 세계화된다.
"밀란 쿤데라가 간결하게 요약한 것처럼, 세계화가 낳은 ‘인류의 단일화’란 근본적으로 ‘달아날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뜻’이다. 그 누구도 안전한 쉼터를 찾을 수 없다. 유동적 근대 세계에서는 위험과 공포조차 유동적이다. 아니면 유체라기보다 기체와 같을까? 위험도 공포도 흐르며, 스미며, 새며, 배어든다. 아직 그런 흐름을 막아낼 장벽은 발명되지 않았다. 장벽을 세우려는 노력이야 많이 있어왔지만."
구절구절 고개를 끄덕이다가, 책에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면 여전히 맞서기 힘든 ‘유동하는 공포’들. 우리는 글로벌한 공포와, 그것에 맞닿아 있는 ‘한국적인 공포’들을 겹으로 마주하고 있다.
천안함 사고를 빌미로 전쟁을 ‘말로만 사주하는’ 현실(나는 조·중·동 따위가 진짜로 전쟁을 원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공포를 부추기는 것이 목적일 뿐이다), 공포를 바탕으로 한 정치가 판치는 현실(바우만의 말을 빌면 전체주의 국가와는 또 다른 ‘개인 안보국가’의 탄생), 저소득층을 사회에서 추방해버리기 위한 온갖 조작이 판치는 저열한 시대(‘추방’은 바우만이 이 책에서 다루는 현대사회의 공포의 근원 중의 하나다)에 우리가 할 일은 결국 직시하는 것, 드러내 말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다가오는 공포, 우리의 힘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공포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 그 시작은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이다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 뿌리를 찾아 들어가 잘라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두려워하는 위험,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공포는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 신체와 재산을 위협하는 위험이다. 다른 하나는 더 큰 차원에서, 우리가 기대어 살고 있는 사회질서의 지속가능성과 안정성을 -소득이나 고용 등의 환경에 영향을 줌으로써- 위협하며,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위험이다. 여기엔 우리가 세상 속에서 갖는 위치 -사회적 지위, 정체성(계급, 성, 인종, 종교 등의)-를 위협하는 위험, 사회적 입지가 좁아지거나 추방당하기 쉽도록 만드는 위험 등이 있다.
가장 무시무시한 세 번째 공포의 영역은 감각이 통하지 않고, 정신이 산란해지는 회색의 영역이다. 하지만 그 영역의 이름은 아직 없다. 우리 집을 무너뜨리고, 직장을 없애고, 우리 생명마저 위협하는 재난. 그러나 그 재난은 완전히 자연적이지도, 인위적이지도 않다. 둘 중 어느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파생적 공포’는 그것을 초래하는 위험의 실제 인식과 쉽게 ‘분리’된다.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실 제로 뭘 느끼든 그것이 세 가지의 위험 중 하나라고 멋대로 생각해버린다.
▶ 오늘날의 <빅브라더>는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처럼 사립들을 안에 가둬두고 줄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을 밖으로 쫓아내고, 쫓아낸 사람은 쫓아낼 만하며 절대로 다시 돌아올 수없음을 강조한다. 이 세계는 오로지 ‘누가 누구를 떨어뜨리라는 의사표시를 했느냐’의 세계다. 달리 말하면 누가 그런 의사표시를 먼저 했느냐, 남들이 하려고 하고 있는 사이에 누가 먼저 기회를 이용했으며, 다른 사람 이 자기 뜻대로 행동하려는 것에 앞서 선수를 쳤느냐가 관건이다.
추방 자체를 추방할 방법은 전혀 없다. 문제는 추방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고, 누구를, 언제 추방하느냐다. 누군가가 정말 나쁘기 때문에 내쫓는 것이 아니라, 그게 게임의 규칙이기 때문에 내쫓는다. 리얼리티 쇼들은 가장 약한 참가자를 가려내는 게 목적이 아니다. 매번 라운드마다 한 사람이 ‘가장 약한 참가자’로 선고받아야 하며 , 결국 최후에 남는 단 한 사람의 승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가장 약한 참가자’가 되어 게임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 게임을 시작할 때부터, 단 한 사람 외에는 모두가 정원 초과였다. 우리 시대의 교훈담이란 벌이 복불복으로 떨어지고, 특별한 이유도 없고, 설명도 없다. 다만 재수 없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가장 약한 링크가 있을 따름이다.
▶ 아우슈비츠, 굴락, 히로시마의 가장 무서운 교훈은 극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극악한 자들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극악한 자들만이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가장 무시무시하고 극악한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그런 범죄는 적절한 수단이 없어서 모의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아마도 적절한 ‘인적 자원’ 이 없어서 무산되었으리라.
아우슈비츠나 굴락, 히로시마의 도덕적 교훈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우리가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가스실의 경비를 서고, 그 굴뚝에 독극물을 넣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머리 위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그것을 떨어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깨달음이 낳은 결과는 현대의 ‘신뢰성 위기’다. 악이 도처에 숨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신뢰는 무너진다. 악인은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뚜렷이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두드러진 특정도 없고, 별도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지금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사실은 악의 군단의 예비군으로서 언제든 그 군대에 현역으로 복무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 우리는 ‘도덕 지체 moral lag’를 겪고 있다. 어떤 행동의 동기는 그 행동을 한 후에야 비로소 정리되며, 그것은 종종 뒤늦은 사과나 정상 참작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 소급 추인으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사흘 뒤의 나가사키 투하 결정이 사후에 정당화되었다. 일본을 즉각 항복으로 밀어붙여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일본 공략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이 스러졌을 것이라고.
▶ 우리는 도망치고 또 도망쳤지만 결국 공포의 총량은 늘어났을 뿐이고, 피하고 싶었던 떠들썩함도 더 커졌다. 추가된 공포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것은 이 두려운 상황을 피하거나 벗어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공포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전 지구적인 불확실성이 해소되려면 부정적 세계화가 긍정적 성격의 세계화에 의해 보완, 보정되어야 하고, 확률의 계산 가능성이 다시금 확보되어야 하리라. 우리가 왜 이렇게 위험에 취약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근원은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 마크 위르겐스마이어 Mark Juergensmeyer 는 펀잡 지방에서 끊임없이 요동하며 때로는 폭발하는 부족 간 적대행위에 대해 분석한 결과 종교, 민족주의, 폭력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카시미르, 스리랑카, 이란, 이집트,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정착촌 등 부족 간 또는 계급 간 대립이 종교 갈등의 형태를 띠고, 또 ‘유덕하고 신실하며 성스러운 삶’ 을 운운하며 유혈 사태를 신성함으로 윤색하는 지역으로 연구대상을 확대해 어느 곳에서나 놀랄 만큼 비슷한 패턴을 찾아냈다. ‘종교의 정치화’ 보다는 ‘정치의 종교화’가 앞선다는 것을. 일신교 신앙이 마니교적 세계관과 흑백논리와 결합하면서 ‘유일성’의 마지막 보루가 된다.
여기서 추천된 전략은 적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와 사전에 악의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는 귀찮은 작업을 배제해버린다. 적으로 찍힌 상대는 그 무죄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다. 그들의 유죄성은 이미 유권해석을 받은 사실이니까, 그들의 행동이나 의도가 아닌, 그들의 존재가 범죄다. 그들은 ‘원죄’를 지닌 자들이요, 태생적으로 죄인이요, 이단자요, 불신자요, 사탄의 도구요, 어둠의 세력이다.
▶ 전 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전 지구적으로 강화된 문제에는 지역적 해결책이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벤자민 바버 Benjamin R. Barber가 지적했듯, “카라치나 바그다드의 어린이들이 침대에서 평화롭게 잠들 수 없다면, 미국의 어린이들도 그럴 수가 없다. 유럽인들이 자유를 자랑하고 싶더라도, 세계의 다른 지역 사람들이 궁핍하고 치욕적인 삶을 사는 한, 그럴 자격이 없다.” 부정의가 날뛰는 세계, 수십 억의 사람들이 인간 존엄성을 부정당하는 세계에서 자신들만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려는 노력은 오히려 그 가치를 타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 민주주의는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자본으로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행동 능력에 대한 낙관적 자신감에도. 역사적으로 볼 때 복지국가는 그런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던 사회계층에 자신감을 부여하는 수단이었다. 복지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자신감을,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나라 전체의 공동재산으로 부여했다. 반면 ‘개인안전 국가’는 자신감과 신뢰의 두 숙적, 공포와 불확실성을 자본으로 한다.
‘안보국가’는 반드시 전체주의적일 필요는 없다. 안보국가의 유동적 근대판인 개인안전 국가는, 겉으로는 전체주의 국가와 정반대처럼 보인다. 한때 국가기구의 직접 지배와 관리 대상이었던 공적 영역의 대부분이 사적 기구 쪽으로 ‘트리클 다운 trickle down’되고, ‘보조화’ 되고, ‘외주’되고, ‘할당’된다. 그게 아니면 단지 국영 기구가 철수하고, 그 빈자리를 개인의 책임이 떠맡는 것이다.
▶ 지식인들이 말에 육신을 입히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은 무능함의 절망에서 자존감의 희열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런 생각이 그람시의 공산당론, 즉 ‘집단적 지성’이자 ‘유기체적 지성’으로써 계급의 이해관계를 정리하는 공산당론과 결합하면, 루카치가 재해석한 마르크스 이후 역사의 변칙적 발전은 역사에 대한 지식인의 역할을 크게 중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윤리적-정치적 책임 역시 재조명된다.
약 2세기 전에 칼 마르크스가 자본에 대해 제기한 두 가지 비판, 그 낭비성과 도덕적 범죄성은 하나도 그 시의성을 잃지 않았다. 낭비와 부정의의 규모만이 바뀌었을 뿐이다. 두 가지 모두 이제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행되고 있다. 그리고 해방의 과제 또한 그 만큼 거대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갈수록 ‘초국가적’이 되고 있는 지식 엘리트,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이고 노골적인 치외법권을 휘두르는 상징제작자, 상징조작자의 계급화된 엘리트는 ‘세계화’의 최전선에 서 있다.
지식인과 민중 간의 협약은 한때 역사를 이끌어왔으며, 자유와 자기주장의 용기를 북돋워왔다. 그러나 그런 협약은 이제 깨어졌다. 아니, 근대 초기에 있었던 일방성을 회복했다. 오늘날의 ‘지식 엘리트’는 그들만의 세상에서 활동하며 ‘만족스러운 분리’에 한몫하고 있다. 민중의 삶과 전망이 갇혀 있는 다른 많은 세상과는 등을 진 채로.
▶ ‘병 속의 편지’ 비유는 두 가지 추정을 내포한다. 그 메시지가 종이에 써서 병에 넣어 띄워 보낼 만큼 가치가 있다는 추정. 그리고 그것이 발견되어 읽혀질 시점- 비록 그 시점을 미리 확정할 수는 없지만- 에 아직도 가치가 남아 있으리라는 추정. 볼 수 없는 공간과 알 수 없는 시간으로 메시지를 날려 보내는 일은 그 잠재력이 지금의 무시된다는 감상을 이겨내고 이해될 수 있는 세계를 찾으리라는 희망에 기대는 일이다. ‘병 속의 편지’는 영원한 가치를 믿는 사람, 보편적인 진리를 믿는 사람, 지금 진리를 찾고 가치를 지키려 애쓰게 만드는 우려가 계속 되리라 의심하는 사람이 쓸 수 있는 편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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