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농부님 사모님이 번역하신 <거짓된 진실>

딸기21 2008. 6. 1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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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진실 The Culture of Make Believe. 

데릭 젠슨. 이현정 옮김. 아고라



농부님 사모님이신 현정언니에게 선물 받은 책. 읽는 데에 좀 시간이 걸렸다. 날마다 초등 1학년 꼼꼼이 옆에 앉아 이 책을 보는데, 그림책 읽는 어린 딸과 모녀가 나란히 같이 앉아 독서를 하는 다정한 풍경엔 어울리지 않는 책이다. 


가끔씩 꼼꼼이는 엄마가 무슨 책을 읽나 쳐다보면서 “거짓된 진실?”하고 제목을 읽어보는데, 책 내용은 표지에 적혀있는대로 ‘계급·인종·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를 다룬 것이니,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아이에게 쉽게 설명해줄만한 차원은 아니다.

 

워낙 엽기적인 스토리를 끔찍해하는 차에 ‘증오의 문화’를 파헤친 책이라 해서 내심 위축된 채로 책장을 펼쳤다. 첫머리부터 심상치는 않았다. 1918년 미국 조지아주 발도스타라는 곳에서 ‘감히 남편을 죽인 백인들을 상대로 복수를 선언했던 겁대가리 없는 흑인 임신부’가 어찌나 처참하게 집단린치로 고문을 당하고 살해됐던지, 세기가 바뀌어 2001년 남미의 콜롬비아 알토나야라는 곳에서 부활절 주말에 ‘암살대’라 불리던 사람들에게 마흔명 남성들과 여성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살해당했는지.

 

“이 책의 짜임새와 방향은 이들의 죽음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 죽음들의 관계를 꿰고 있는 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자 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경제 체제와 증오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인가? 경제와 인종 간에 관계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관계인가? 우리 문화의 파괴적 행위를 깊이 파고들면 만나게 되는 여성에 대한 혐오는 또 어떤가? 어떤 형태의 잔학 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심지어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있는가? 이 책을 쓰면서 내가 탐구하고 싶었던 것은 인식에 관한 것이다. 또는 인식의 결핍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저자 서문)


출발점은 ‘증오’다. 사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형태의 증오인지, 심지어는 증오인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한다. 홀로코스트에 동참했던 ‘학살기술자’ 혹은 ‘학살관료’들은 유대인 하나하나를 증오했던가?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프란체스코 피사로가 잉카제국의 마지막 황제 아타왈파를 죽일 적에 그를 증오했던가? 혜진, 예슬이를 죽인 범죄자는 두 어린 소녀를 증오했었나? 혹은 효순, 미선양을 압살한 미군병사들은 한국의 소녀들을 증오했었나?


엄청난 내면의 증오를 갖고 있지 않은 다음에야 도저히 저지를 수 있을 성 싶지 않은 살상을 보면서 넘쳐나는 증오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일단은 저 질문들에 답하기 이전에, 그것을 ‘증오’라 부르기로 하자. 그 엽기적인 살상, 특히 대규모로 혹은 빈번하게 저질러지는 그런 살상을 ‘증오범죄’라고 부르기로 하자. 인종차별, 흑인 린치, 강간, 홀로코스트, 인디언 학살,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지금 우리 사회, 우리 글로벌 시스템의 바탕이 된 근대의 형성 과정에서 증오범죄의 주요 가해자는 ‘서구 백인 남성’이었다. 저자는 증오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자기 자신도 포함되는 ‘서구 백인 남성집단’의 증오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입에 담기도 끔찍한 범죄들의 리스트를 훑어본 저자가 내린 결론은 현 세계 사회·경제체제를 특징짓는 범죄의 바탕에 깔린 증오감정이 결코 개인적인 현상이라든가 개인의 신체적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우리 사회체제의 일부이자 근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더 나아가 증오의 사회학, 증오범죄의 메커니즘이야말로 (서구에서 시작돼 이미 지구를 장악해버린) 우리 ‘문명’의 특징이라고 결론짓는다.


그 ‘문명’은 서구적 근대성과 일신교의 문명, 다양성을 말살시키고 끝없는 확장으로 지구를 정복해가는 문명, 불필요한 인간들(그리고 자연들)을 제거하는 생산 지상주의 문명이다. 이 문명에서 ‘생산’ ‘효율성’은 절대적인 명령이 되며 방해되는 것 혹은 불필요한 것들은 가차 없이 제거된다.


유대인들이 하나하나 이름과 얼굴을 가진 사람이 아닌 살덩이 지방덩어리로 분리됐듯, 그들을 죽인 이들이 그저 관료적 몸짓 하나로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듯, 미군이 이라크 어린이들의 얼굴 따위를 떠올리는 대신 일련번호를 붙인 시설물들에 스위치 한 방으로 폭격을 가할 수 있었듯이, 우리 문명은 구체성을 죽이고 추상화시킴으로써 범죄를 범죄 아닌 것으로 만들고 학살 명령을 모든 이들에게 내면화시킨다.


그 희생자들은 감옥국가 미국의 곳곳에 들어선 교도소의 재소자들, 서부로의 확장 과정에서 절멸된 인디언, 흑인 노예들이다. ‘워블리’라 불렸던 지난 세기 초반의 좌파 노동자들, 유니언 카바이드사의 독극물 누출로 무참히 죽어간 인도 보팔의 노동자들, 지금도 노예노동에 내몰리는 제3세계의 빈민들도 그 희생자들이다. 문명은 희생자 없이는 지탱되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 자연까지 생산이라는 이름 하에 일렬종대로 늘어서도록 만들어 지구를 해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모든 사람들/자연은 모두 홀로코스트적 문명이라는 이 하나의 시스템에 의한 희생자들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생산이라는 명제는 결국 몇 안되는 부자들만을 위한 것인데도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자동차회사, 화학제품 회사, 석유회사들이 내놓는 물건들 속엔 우리가 세금이나 공공의료비용으로 때워야 하는 ‘숨겨진 사회적 비용’이 너무 많이 숨어있는데도 우리는 그저 속고만 산다. 어쩌면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지금은 제 나름의 아메리칸 드림에 취해 속고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이 홀로코스트적 문명에 휩쓸려가는 수많은 필부필부들이 ‘허위 계약’에 속고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우리의 진정한 출발점은 어디일까. 저자가 제안하는 것은 ‘문명 바로보기’다. 거짓된 진실을 보는 것, ‘그들이 우리에게 믿도록 만들었던 허위계약의 진실들’을 보는 것. 거짓된 진실을 파헤치는 반문명적인 주장의 결론치고는 미약하다. 과연 이 미약한 출발은 창대한 미래를 만들어낼 것인가? 

 

책은 다소 끔찍하면서도, 지지부진 중언부언이 많고 가끔은 기행문에다가 에세이 스타일까지 섞여 있어 긴장감이 떨어졌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중언부언이 많다 싶기도 하고, 내용과 관련해서도 홀로코스트적 문명의 끔찍한 증오범죄들을 결론적으론 기후변화 쪽으로 유도해가는 것 같아서 다소 비약이 있다는 듯한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당신이 범죄라고 생각 않고 당연한 권리라 생각했던 것에 대해 누군가가 범죄라는 이름을 씌운다면, 당신은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흑인을 목매달고 불태운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겠는가.”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지금 우리가 범죄라는 생각없이 저지르는 자연에 대한 홀로코스트 또한 범죄라고, 이를 부인하려는 우리의 마음 또한 흑인들을 린치한 사람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불편한 진실’이다.


증오범죄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범죄들의 메커니즘,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더 크고 더 조직적이고 더 경제적인 ‘문명이라는 이름의 범죄’를 직시하기 위해서라면 이 책은 훌륭한 출발점이 될 것 같다. 그 다음은? 그건 잘 모르겠다. 우리는 눈을 떠 문명의 범죄를 직시하고 이 문명을 거부해야 하는 것인지, 대안의 문명은 어떤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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