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다른 세상의 아이들

딸기21 2008. 5. 1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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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의 아이들 Children of Other Worlds 
제레미 시브룩. 김윤창 옮김. 산눈.



정말로 ‘다른’ 세상의 아이들인가. 눈 먼 우리에겐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이 싸구려 흰색 블라우스, 지금 내가 신고 있는 (역시나 싸구려인) 검정 샌들, 학교 다니며 웃고 떠드느라 정신 없는 내 딸이 입고 다니는 티셔츠와 바지 따위가 ‘저 아이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보장이 있는가.

아니, 사실은 보지 않아도 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피땀을 통해 내 곁에까지 와 있다는 것을. 나 뿐만 아니고 누구든, 저 아이들을 ‘다른 세상의 아이들’이라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우리 세상의 아이들이고, 나와 내 아이의 검은 그림자다.

아동 노동에 대해서는 알만큼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다. 머리로 안다 해도 아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여전히 내게 ‘다른 세상’의 아이들이니. 아프리카 가나에서 어부들의 노예로 팔려갔던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 아이들과 부모들의 ‘반갑지 않은 해후’를 보며 마음이 씁쓸해졌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순간 지구 반대편 내 딸이 국제전화로 내게 장난감을 사다달라고 주문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다시 돌아온 나는 그들의 얼굴을 잊지 말자 하면서도 자꾸만 잊는다.

어쨌든 세상엔 그런 아이들이 있다. 노동하며 사는 아이들. 작은 몸 작은 손으로 목숨 걸고 일을 해 간신히 살아가는, 그리하여 제 몸을 팔아 제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나 같이 멀리 떨어져있는 곳의 ‘부유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눈을 돌리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설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먹고 살아야 하는 그 아이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세계화와 빈곤 문제에 천착해온 저널리스트다. 그의 시선은 다만 노동으로 얼룩진 방글라데시 아이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가 포착한 지점은 산업화 시기 영국의 아동 노동과 21세기 방글라데시의 아동 노동이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

시기와 장소를 뛰어넘는 그 유사성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서양 선진국들은 아이들의 노동을 착취해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그 힘으로 남의 땅을 점령해 부를 축적했다. 그들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이제와 그들의 노선을 따르려고 한다. 가난한 나라들은 여전히 가장 손쉬운 착취 대상인 아이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려 하지만, 서양 선진국을 따라잡긴 힘들다. 이 나라들엔 ‘식민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나라들은 선진국은 못 따라잡으면서 세계화가 만들어낸 착취의 악순환에 빠져 반영구적으로 아이들 피땀을 빼먹는 꼴이 되고 만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책은 그렇게 착취당하는 아이들을 다루되, 그 아이들을 일면적으로 불쌍히 여기거나 아동 노동을 단칼에 매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많은 고민거리를 던진다. “아동노동을 금지하자”는 말만으로는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더군다나 아동노동을 별스런 것으로 보는 행위 자체가 ‘근대 서구적 가치관의 산물’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일리가 있다. 아이들은 언제나 부모를 도왔고,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아동 노동’은 삶의 당연한 일면이었을 뿐이다. 노동과 노동 아닌 것의 명확한 구분, 어린이와 어른의 명확한 구분은 아주 최근에야 자리를 잡은 서구적 가치관의 산물이 분명하다. 이를 강조해 지적하는 의도는 분명하다. 아동노동을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그 어린이들의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계적인 접근은 현실적으로 일을 해 먹고살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더 깊은 나락으로 내몰 뿐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또한 저자는 아이들이 일을 통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배울 수도 있다고 말한다. 서구식 학교 교육만이 능사는 아니니까. 아이들의 노동이 그저 착취에 불과한 노예노동인가, 아니면 미래를 위한 바탕이 되는 노동인가를 가르는 것은 그 내용과 질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문제는 아이들을 둘러싼 어른들(그 가족들)의 삶과도 연결돼 있다. 게다가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에서, 아이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고장난 물건을 고치고 또 고쳐 새것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자원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여러 가지 측면들이 겹쳐 있으니, 어렵지만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

안타까운 것은 이 좋은 생각들이 방글라데시 같이 무능하고 부패한 빈국 정부나 착취를 본업 삼는 다국적기업들에게까지 연결되도록 하기가 여전히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려면, 우선은 알아야 하고,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항상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어째서 우리는 그들을 ‘다른 세상의 아이들’로 보는가.

“필시 우리는 예전의 우리 아이들이 알았던 그 고통에 관한 모든 기억을 우리의 집단적인 경험에서 깨끗이 지워버렸다.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동일한 경험으로부터 그 고통을 상기하지 않으려고 말이다. 이는 우리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그 아픔을 다카의 어린 소녀들, 인도의 소몰이들, 인도네시아의 어린 공장노동자들의 여린 어깨 위로 옮겨놓았기 때문은 아닐까? 어떤 공모된 건망증이 그들과 우리의 유사성을 없애버린다. 아울러 그들이 가진 피부색, 다른 기후, 별개의 종교, 이질적인 언어가 우리를 이러한 망각의 길로 세차게 이끈다.”(135쪽)

18~19세기 영국으로 가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한강의 기적’의 바탕이 됐던 어린 여공들의 기억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잘살게 된지 얼마나 됐다고, 우리는 ‘그들의 여린 어깨’를 잊어버리고 다른 세상의 일로 받아들이며 먹고 산다. 못 살던 기억을 잊지 않는 것, 그들의 여린 어깨를 기억하는 것. 결국 중요한 것은 아동노동의 산물들을 소비하는 나, 나의 문제다.

(번역은 매우 껄끄럽다. 번역기를 돌린 것보다야 물론 낫지만 수동태 문장이 너댓개씩 이어지는 것은 읽기 안 좋다.)

▷만약 제3세계 빈민층, 특히 아이들의 노동 여건이 극도로 가혹한 노예제를 닮아 있다면, 이는 필시 영국인들이 지난 200년 동안 마음대로 처분했던 방대한 배후 식민지를 갖지 못한 채 외래 모델들을 따르려는 노력의 직접적인 결과다.

▷선언과 결의, 협정들 자체는 어린이 노동으로 만들어진 상품을 불법화하는 서구 국가들의 입법 가결이나 마찬가지로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최악의 어린이 노동 양상을 근절하기 위한 최근의 ILO 협정은 일할 수밖에 없는 전세계 수백만 어린이들을 더욱 사려깊고 세심하게 고려함으로써 얻어진 결과다.

어린이 노동과 어린이들의 일을 구별하려는 시도들이 이뤄져 왔다. 이는 오로지 가장 위험하고 착취적인 노동만을 금지하겠다는 것이자, 남반구의 많은 가정들이 자녀들의 수입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1일 노동시간이 제한되고, 적당한 시간이 교육과 놀이에 할애되고, 오늘날의 일반적인 상식이 통용되기만 한다면, 어린이들의 노동 또한 긍정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

▷최상층을 제외하면 역사적으로 어린이들의 일은 이상할 것도 없다. 오늘날 유년기를 일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기는 것이 오히려 더 비정상적이다. 과로에 시달리는 방글라데시 어린이들과 소비자 주권주의에만 사로잡혀 있는 서구 어린이들 사이의 어딘가에, 일과 여가의 적절한 균형이 있다.

▷이제는 필히 어린이들 자신에게, 그들이 일을 어떻게 느끼는지 물어야 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들이 가족에게 주는 도움을 자랑스럽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많은 아이들이 전적으로 학업에 몸담고 싶어 하지만 말이다. 그들이 원하는 바는 착취와 폭력, 괴롭힘으로부터 보호받는 것, 어른들처럼 노동자로 인정받는 것, 조직을 이룰 수 있도록 허용되는 것, 그리고 가족과 사회에서 자신들의 기여를 평가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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