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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선택- 지배인가 리더십인가. THE CHOICE.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김명섭 역주. 황금가지. 7/22
이름도 특이하고 어려운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널리 알려진 대로 미국의 ‘정통’ ‘보수파’ ‘현실주의’ ‘안보전문가 겸 정치외교학자’다.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 1928년 생이니 나이가 여든을 바라본다. 하버드 박사, 하버드 교수, 컬럼비아 교수, 카터 행정부 때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콜린 파월과 콘돌리자 라이스가 거쳐 갔던 백악관 브레인 자리), 존스홉킨스대학 교수. 경력은 최고로 화려하다. 키신저 만큼의 요란스러움은 없지만, 미국 외교의 큰 틀을 세운 인물 대열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다.
<선택>은 <체스판>과 연장선 위에서 봐야 하고 또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데, 그 기저에 깔린 것은 미국이 ‘제국’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제국이라는 것을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미국은 제국이다. 미국은 제국이냐 하는 논점과 관련해서는 영국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도 ‘콜로서스’에서 나름대로 정의를 해놓고 있는데, 두 사람이 말하는 제국의 맥락엔 상통하는 점이 있다.
미국은 제국이다. 미국은 세계를 경영한다. 미국의 책무는 세계를 어떻게 잘 경영하느냐, 즉 제국의 존속과 번영에 도움이 되게끔 어떻게 세계를 다루느냐 하는 것에 있다. 네오컨과 브레진스키의 차이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소아병적인 도덕주의 따위는 정통 보수파 현실주의자에겐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미국이 지금 제국으로서의 권리와 책무에 걸맞게 세계 경영을 잘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체스판>은 브레진스키라는 외교계 ‘원로’가 자기 뒷세대 미국인들에게 제국 경영의 경륜을 전수해주기 위해 쓴 책이다. 당시만 해도 브레진스키를 비롯한 미국 보수파의 시각엔 자신감이 넘쳤다. 역자의 말마따나 그의 책을 읽으면서 미국인들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브레진스키의 시각은 자신감 넘치다 못해 다소 역겨웠지만 말이다. 아마도 이런 느낌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독자들이라면 모두가 느꼈을 그런 역겨움이었을 것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을 경영했던 거물의 뻔뻔함과 담대함, 그 통찰력이 미우면서도 부러운 그런 느낌 말이다.
<선택>에서 브레진스키의 말투는 좀 많이 달라진다. 부잣집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이웃집 비렁뱅이 깡패 다루는 비법을 설명하듯 훈수를 놓았던 전작에 비해 <선택>에는 통탄과 절박감과 비판이 넘쳐난다.
두 권의 책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네오컨, 9·11 테러라는 일대 사건과 미국이 일으킨 두 차례의 전쟁이 있었다. 이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열변을 토하게 만든 것은 21세기의 몇 년에 걸쳐 미국의 헤게모니를 완전히 구겨지게 만든 백악관과 네오컨의 멍청한 실수들이었던 셈이다.
브레진스키는 이 책에서 미국의 딜레마를 국가 불안의 딜레마, 새로운 지구적 무질서의 딜레마, 동맹 관리의 딜레마, 세계화의 딜레마, 헤게모니적 민주주의의 딜레마 등 5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미국은 최대 안보 위협이 사라진 뒤 ‘작은 적들’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다. 지금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고 당분간 그에 필적하는 라이벌은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미국은 점점 더 많은, 더욱 다양한 ‘적대적 원천들’을 마주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미국의 헤게모니는 갈수록 상처를 입고 있다.
“그러므로 핵심 문제는 과연 미국이 현명하고 책임질 수 있으며 효과적인 대외 정책, 다시 말해 요새적 심리 상태의 함정을 회피하는 동시에 세계 최강국으로서 미국의 새로운 역사적 지위에 어울리는 대외정책을 구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23쪽, 서문)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 딜레마 각각에 대해 ‘합리적이고 균형있게’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현재의 상태 혹은 현 백악관 식의 대처 방안은 비합리적이고 닫혀 있으며 불균형적이어서 결국 미국에 더 큰 불안을 가져다준다는 지적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은 어떤 제국이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한 제국인가? 브레진스키가 말하는 제국의 목적은 말하자면 ‘진정한 글로벌 안전보장’이 되겠다. 국지적 분쟁, 테러 네트워크와 같은 신종 위협, 세계화로 인한 불안정, 미국과 그 잠재적 도전자들의 갈등관계 같은 것들로 인해 세계가 흔들리는 것을 막고 적절한 위기관리를 통해 최대한의 안전보장을 이끌어내는 것이 미국의 책무이고 세계제국의 역할이다.
‘지배인가 리더십인가’ 라는 부제에서 보이듯, ‘합리적이고 균형 있는 대외 정책’이라는 것은 결국 조지프 나이가 말한 ‘소프트 파워’와 맥락이 닿아 있다. <체스판> 때문에 브레진스키에 대해서 극우 보수주의자 같은 이미지를 갖게 되긴 했지만 실상 그는 민주당 카터 행정부 때 활약했던 사람이어서, 미국 공화당 보수파하고는 맥을 좀 달리 한다.
이 책에선 특히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과 지역 현안을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데올로기와 작동방식 등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의 후쿠야마와 조지프 나이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대목에선 노엄 촘스키를 연상하게 만든다. 옮긴이의 지적처럼, ‘체제 내부에서 생겨나는 불안’ 즉 세계화 시대 ‘자가면역결핍’을 이야기한 안토니오 네그리에게까지 이어지는 문제의식들도 많이 보인다.
책은 아주 진지하다. ‘빈 말’ 따위는 전혀 없어 보인다. 아주 큰 틀에서의 사고를 요하면서도 구체적이고, 아카데믹하면서도 현실적이다. 그래서 아주 재미있다.
브레진스키를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할 이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의 독자들이 가질 수 있는 정서적 반감과 이성적 불일치와는 별도로 제국의 속삭임을 엿들을 수 있는 합법적 기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옮긴이 서문)이다. ‘거인 할아버지’를 갖지 못한 가난한 집 자식들이 소작일이라도 해서 먹고 살려면 옆집 부잣집 할아버지는 손자들 어떻게 가르치는지 엿듣기라도 해야 한단 소리다.
사족을 붙이자면, “한국은 분단의 폭발적 종식을 경험할 가능성이 있으며 아마 통일 후에는 핵을 보유할 가능성이 높다”(169쪽)는 예언(?)도 인상적이었다.
집중적 전략전은 여전히 궁극의 위협이지만, 이제 실현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위협은 아니다.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러시아와 안정적인 상호 핵 억지를 유지하는 것이 미국 정책 결정자들의 주요한 안보 책임으로 남을 것이다.
... 전략적 역량이 부족한 국가들의 미사일 공격에 대항하는 중요한 방어 회담에 전통적인 동맹국들과 함께 러시아와 중국이 참가한다면, 미국이 미사일 방어를 이용하여 1950년대의 전략적 우월성을 재현할 것이라는 그들의 두려움도 완화시킬 수 있다. (51쪽)
새로운 지구적 무질서에 적응하려면 냉전 시대보다 융통성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또한 9·11 이후 대테러 작전에는 더욱 광범위한 접근이 필요해졌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개념이 유라시아 지역에서 미국 안보 정책의 중심 운영원리가 될 수는 없다. 그 개념은 너무 협소하게 초점을 맞춘 것이고 적에 대한 정의로서는 너무 모호하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개념이 유라시아의 중요 지역에서 발생하는 격렬한 정치적 혼란의 근본적 원인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81쪽)
이란이 어떤 식으로 발전해나갈 것인지는 불명확하지만 근본주의적 신정정치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테르미도르적 국면에 처해 있다. 그리고 이란이 없으면 근본주의는 어떤 곳에서도 지속되기 어렵다. 근본주의는... 장차 정치적으로 의식화될 수백만의 젊은 이살람교도들에게 지속적으로 정치적 매력을 유지하기에는 추진력과 역사적 타당성이 부족하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다. 이 특성은 단기적인 호소력과 장기적인 취약성 모두의 근원이다.
... 더욱 지속적인 정치적 도전은 신정정치 자체가 아니라 포괄적 정치이념으로서 이슬람주의를 지지하는 포퓰리즘 운동으로부터 오기 쉽다. 특히 수니파 이슬람 국가에서 그러하다. 보통 종교와 분리된 지식인들이 이끄는 이러한 운동들은 군사적 포퓰리즘과 종교적 포장을 결합시킨다. (99쪽)
서구, 특히 미국에서는 이란과 탈레반 정권 하의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의 터무니없고 반동적인 표현에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이러한 경향은 정치적으로 의식 있는 이슬람 지식인들 사이에서 현재 진행중인 논쟁의 지적 범위와 강도에 대한 광범위한 무지를 반영한다.
... 터키는 말할 필요도 없고 인도네시아, 바레인, 튀니지, 모로코와 같은 일련의 이슬람 국가와, 심지어 이란에서조차 평화적인 정치적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유동적인 상황에서 이슬람 세계의 지적 흥분을 반영한 이슬람 포퓰리즘과 근본주의는 변증법적으로 연관돼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근본주의 테제는 본질적으로 전근대를 반영하지만 식민지 시대 이후의 이슬람은 지배적이고 세속적인 서구에 대항하는 반작용으로 발생했다. 그 안티테제로서의 이슬람 포퓰리즘은 이슬람 구조 속에서 교조적이고 종종 선동적인 반 상징화를 시도하면서도 몇몇 근대적 요소들을 융합함으로써 서양 지배의 유산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이슬람 포퓰리즘과 근본주의 사이의 합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부분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될 것이며, 그 중 어떤 것도 초기부터 순수하게 민주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104쪽)
미국과 유럽연합 간의 적극적인 전략적 제휴 관계는 또한 이란이 이 지역의 괴물에서 궁극적으로는 이 지역의 안정자(stabilizer)로 변모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 만약 이 지역의 지리적 중심인 이란이 국제 사회에 통합되고 국내에서 근대화의 행진을 다시 시작한다면 이 에너지 수출지역 전체가 더욱 안정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이란의 고립을 도모하는 한 안정은 불가능하다. 이란 사회의 엘리트들이 국가의 고립을 미국이 강요한 어떤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부과한 짐이며, 따라서 그것이 비생산적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미국에게 더 이득이다.
... 종교적으로 광적인 사회라는 이미지와 반대로, 이 지역의 모든 국가들 중에서 이란은 터키가 앞서 추진했던 경로를 따를 최적의 기회를 얻었다. 이란은 높은 문자 해독률과 취업과 정치활동에서 확고한 여성 참여가 확립된 전통, 순수하게 철학적인 지식인 계층, 그리고 독자적인 역사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각성을 보유하고 있다. (127쪽)
시베리아의 측정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자연적 부(富)는 러시아의 미래를 보장하는 최고의 약속이지만, 서방의 도움 없이 러시아가 그곳을 계속 지배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베리아를 개척하고 개발하려는 초국가적 노력은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진정한 유대를 자극할 것이다.
... 유럽이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시베리아는 마침내 다자간 기반에서 개발되는 유라시아 공동의 자산이 될 것이며, 한편으로 포만감에 늘어진 유럽 사회를 흔들어 일깨우며 약동하는 ‘신 개척지’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러시아를 탈 제국주의적이고 점차 민주적인 나라로 공고히 하려는 노력을 신중하게 지원하는 것이 유럽-대서양 정책의 주요 작업이다. 유럽은 러시아와의 새로운 ‘에너지 동반자 관계’가 이웃 국가들을 통제할 새로운 정치적 지렛대를 크렘린에 제공하는 결과를 낳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59쪽)
일본의 군사력 강화는 대체로 예상치 못한 미군 철수 시의 방어 공백을 준비하는 신중한 욕구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자주적인 군사력을 보유하려는 국가적 열망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사실 일본 국민들과 정치 엘리트의 시각에는 민주적 가치와 강한 반군국주의 윤리가 자리 잡고 있다.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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